주간동아 1006

2015.09.21

흑백사진에 담긴 당신의 이야기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15-09-21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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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사진에 담긴 당신의 이야기
    “어느 날 할머니께서 빛바랜 사진첩을 들고 나오시더니 내 앞에 내미셨다.”

    박종휘 작가의 장편소설 ‘태양의 그늘’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젊은 시절 지인의 소개로 전북 진안의 한 할머니 댁에 머무는 동안 우연히 듣게 된 할머니의 생생한 과거 이야기가 소설이 됐다. 소설의 무대는 일제강점기 말 전북 전주와 김제 일대. 김제 서암리 부자 윤태섭의 막내딸 채봉은 전문학교를 나와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전주 남문시장에 갔다가 불량배와 맞닥뜨린 것을 계기로 마령에서 정미소와 주조장을 운영하는 남씨가와 인연을 맺는다. 채봉의 미모와 올곧은 마음에 반한 남상백은 일본 도쿄대 유학생인 막내아들 평우와 맺어줄 궁리를 하고, 두 사람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하지만 행복한 시절은 잠시, 남씨가와 윤씨가는 광복 이후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전주에서 제지공장을 운영하던 윤태섭의 막내아들 재중은 공산당이 유도한 파업으로 사업이 망할 위기에 처하자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이후 윤씨 집안의 가세가 급격히 기운다. 한때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지만 이내 염증을 느끼고 조용히 사진작가로 살던 남평우는 여순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게 된다. 남편이 실종된 이후 채봉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진안군여맹위원장이 됐고, 국군의 진격에 퇴각하는 빨치산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간다. 수소문 끝에 가야산에 숨어 지내던 남편과 만나지만 “꼭 살아남을 것”을 약속하며 다시 헤어지는 것이 3부작 1권 ‘태양의 그늘’의 마지막 장면이다.

    ‘태양의 그늘’은 개인의 의지나 신념과는 상관없이 운명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삶에 대한 열망과 사랑으로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는 인간의 힘은 위대하며, 이는 곧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임을 보여준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이 소설의 2부가 기대되는 이유다.

    ‘태양의 그늘’이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호방한 스케일의 대서사시라면, 캐나다 여성작가 캐럴 실즈가 쓴 ‘스톤 다이어리’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20세기를 훌쩍 건너온 ‘데이지 굿윌’의 투쟁기다. 너무 뚱뚱해 임신 사실조차 모르다 자신을 낳자마자 죽어버린 어머니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불행의 아이콘이던 데이지는 남의 손에 맡겨져 자라고, 부유한 집안의 아들과 결혼하지만 신혼여행 중 남편이 추락사하는 바람에 졸지에 과부가 된다. 서른이 다 돼 자신을 키워준 이웃집 여자의 아들이자 아버지뻘인 남자와 결혼하고 세 아이를 낳지만 그조차도 긴 인생 여정의 통과의례일 뿐. 캐럴 실즈가 왜 캐나다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인지, 왜 ‘스톤 다이어리’가 퓰리처상 수상작인지는 작가의 섬세한 묘사로 데이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군데군데 오자가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아쉽긴 하다.



    작가수업 오탁번

    흑백사진에 담긴 당신의 이야기
    오탁번 지음/ 다산책방/ 224쪽/ 1만3000원

    충북 제천 백운면 평동리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 눈깔만 화등잔만큼 컸던 아이는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그리움을 ‘가을’이라는 시로 남긴다. 이 소년이 동화, 시, 소설로 신춘문예에 세 번 당선한 작가가 되고, 대학교수로 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년 시절의 배고픔부터 소년 시절의 첫사랑, 혈기 넘치는 대학 시절까지 자전적 이야기를 통해 아름다운 시 창작의 세계를 들려준다.



    흑백사진에 담긴 당신의 이야기
    빨간구두당

    구병모 지음/ 창비/ 256쪽/ 1만2000원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전래동화를 모티프로 한 판타지 단편집을 선보였다. 표제작 ‘빨간구두당’은 안데르센 동화 ‘빨간 구두’에서 착안해 색채가 사라진 도시에서 벌어지는 혼란과 공포를 그린다. ‘기슭과 노수부’ ‘카이사르의 순무’ ‘거위지기가 본 것’ ‘화갑소녀전’ 등 고전적 문법을 전복한 ‘나쁜 동화’ 8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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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딩 다이어리 인 재팬

    장원재 지음/ 명태/ 360쪽/ 1만7000원

    친숙하지만 과거사를 생각하면 속이 부글거리는 애증의 대상 일본.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인 저자가 ‘피스라이딩’을 내걸고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 와카나이부터 최남단 규슈 가고시마까지 36일 동안 3100km를 달린 기록이다. 라이딩을 하면서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일본어 전단지를 나눠주며 현지인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꼼꼼히 기록해 ‘주간동아’에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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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

    게이버 메이트 지음/ 류경희 옮김/ 김영사/ 520쪽/ 1만8000원

    캐나다의 통증 완화 전문의인 저자는 임상 경험, 병력 인터뷰, 유명인의 전기와 자서전을 통해 마음의 상처가 천식, 류머티즘 관절염, 알츠하이머, 암 같은 신체 질환을 유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는 감정적 고통이 질환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믿음의 생물학’으로 설명하고 “나는 언제나 강해야 해”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아” 같은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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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를 위한 북디자인

    정민영 지음/ 아트북스/ 328쪽/ 1만7000원

    미술평론가이자 출판편집자인 저자는 책이란 ‘사각의 링’이라고 말한다. 그 링 안에서 디자이너는 책의 정체성을 담고 독자를 유혹해야 한다. 사지 않고는 못 배길 표지의 가치, 효과적인 뒤표지와 뒷날개 사용법, 제목 서체와 일러스트, 띠지와 덧싸개 사이 등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정보도 풍부하지만, ‘책의 형식=심리 구조’라는 분석이 ‘책꼴’을 만들어가는 데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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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드볼 게임

    김장수 지음/ 사회평론/ 256쪽/ 1만3000원

    ‘하드볼 폴리틱스’는 강경파끼리 물러서지 않고 대립하는 정치를 가리킨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근무했던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양보와 타협 없이 고착된 한국 정치구조를 ‘하드볼 게임’으로 분석했다. 1부는 16~18대 대통령선거(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친 주요 원인들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대선 결과에 대한 해석과 평가, 3부에서는 사회적 대타협의 길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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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품명품 수집 이야기

    전갑주 지음/ 한국교과서/ 246쪽/ 1만6000원

    35년간 교과서 출판인으로, 32년간 수집가로 살아온 기록. 수집 목록에는 근대교육 최초의 국어 교과서인 ‘신정 심상소학’(1896)과 광복 후 문교부가 발행한 ‘바둑이와 철수(국어1-1)’도 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최초의 조선인 학생 이름은 ‘김지학과 박정복’이었고, 광복 후 되찾은 이름은 ‘철수와 영이’였다. 광복 70년을 맞아 ‘바둑이와 철수’ 4종을 모두 손에 넣고 감격해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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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애 間

    이하석 지음/ 문학과지성사/ 167쪽/ 8000원

    표제작 ‘연애 間’의 전문은 이렇다. ‘점과 점이/ 마음/ 내어/ 선을 이루지만,// 참새라도 앉으면 여리게 떨/ 리는, 저 전깃줄.’ 평론가 김주연은 “모든 아름다운 시들이 그렇듯이 이하석의 시도 떨리는 전깃줄”이라고 했다. 1971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은 줄곧 서정시에 매진해왔고, 2011년에는 ‘극(極)’ 서정시를 표방한 ‘상응’을 발표한 바 있다. 이번 시집은 기억의 흔적을 응시하는 관찰자 시선으로 이끌어간다.

    만보에는 책 속에 ‘만 가지 보물(萬寶)’이 있다는 뜻과 ‘한가롭게 슬슬 걷는 것(漫步)’처럼 책을 읽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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