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4

2015.09.07

우연이 낳은 세계 최강의 인기

카베르네 소비뇽의 역사

  • 김상미 와인칼럼니스트 sangmi1013@gmail.com

    입력2015-09-07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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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이 낳은 세계 최강의 인기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적포도 품종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와인을 자주 즐기지 않는 사람도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한두 번쯤은 마셔봤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높은 인기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할 것 같지만, 카베르네 소비뇽은 6000년 와인 역사에서 400살밖에 안 된 새내기다. 17세기 프랑스 보르도(Bordeaux) 지방에서 적포도인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과 백포도인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의 우연한 교잡으로 태어난 품종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보르도는 대서양과 가까워 서늘하고 습한 기운이 바다로부터 강하게 올라온다. 흐린 날이 많아 포도가 충분히 익지 못할 때가 많다 보니 과거 보르도 와인은 색이 옅고 맛이 가벼워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저렴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열악한 기후 때문에 늘 생명력이 강한 품종을 필요로 하던 보르도에서 카베르네 소비뇽의 등장은 신의 선물이었다. 포도 껍질이 두꺼워 곰팡이성 질병을 잘 이겨냈고, 서늘하고 습한 날씨 속에서도 좋은 수확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르도 안에 습지로 버려져 있던 메독(Me′doc) 지역이 개간되면서 드러난 자갈땅은 물 빠짐이 좋아 카베르네 소비뇽을 기르기에 더없이 좋은 토양이었다.

    우연이 낳은 세계 최강의 인기
    메독에서 생산한 카베르네 소비뇽은 이전의 가벼운 레드 와인과는 완전히 달랐다. 색상이 진하고 묵직했으며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면 한층 더 복잡한 향을 매혹적으로 뿜어냈다. 타닌과 산도가 강해 장기간 병 숙성도 가능했다. 카베르네 소비뇽 덕에 보르도가 명품 와인 산지로 격상되고 와인 애호가들이 메독 와인을 앞다투어 찾자 유럽 전역은 물론 미국 캘리포니아, 남미, 호주 등 신대륙에서도 너나없이 카베르네 소비뇽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전 세계 와인 산지 가운데 카베르네 소비뇽을 기르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하지만 워낙 다양한 기후와 토양에서 자라다 보니 같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도 산지마다 조금씩 다른 맛과 향을 보여준다.



    보르도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에는 과일향보다 허브향과 바이올렛 같은 꽃향이 많이 나고 담배, 감초, 흙냄새와 비슷한 미묘한 향이 복잡하게 섞여 있다. 신대륙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무게감이 가볍고 섬세하지만 타닌이 거칠고 산도가 강한 편이어서 메를로(Merlot)나 카베르네 프랑과 블렌딩될 때가 많다. 반면 신대륙 카베르네 소비뇽은 검은 체리나 검은 자두 같은 과일향이 많이 나고 묵직하며 후추향이 느껴진다. 기온이 보르도보다 높고 맑은 날이 많기 때문에 포도가 농익어 타닌이 부드럽고 알코올 도수도 14~15%로 높은 편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임팩트가 강한 와인을 선호하는 우리 입맛에 잘 맞는 와인이다. 카베르네 소비뇽과 친해지고 싶다면 먼저 마시기 편한 신대륙 카베르네 소비뇽을 충분히 즐기는 게 좋다. 품종 특성에 익숙해진 뒤 보르도나 메독에서 생산된 카베르네 소비뇽을 마시면 특유의 섬세함을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타닌이 강해 스테이크나 갈비찜처럼 육질이 단단한 음식과 어울리지만, 바게트나 담백한 크래커에 치즈를 얹은 간단한 안주와 즐기는 것도 품종이 지닌 맛과 향을 진솔하게 느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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