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3

2015.08.31

안창호와 서북파의 변혁운동

접경지대에서 ‘진보’의 매개가 된 기독교…서북파와 기호파 갈등이 지역감정 부추기기도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입력2015-08-31 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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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호와 서북파의 변혁운동
    장준하와 김준엽의 운명적 만남과 서로에 대한 이끌림에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작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출신 지역과 성장 환경에서 유사한 점이 많았다. 장준하는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옆 군(郡)인 삭주에서 유년을 보냈다. 평양 숭실중 교사로 재직하던 부친을 따라 16세 때 숭실중에 입학했다 1학년을 마친 후 역시 부친을 따라 평북 선천 신성중으로 전학했다. 두 학교 모두 미국 기독교 북장로교 재단의 미션스쿨이었다.

    김준엽은 장준하의 고향인 의주에서 좀 떨어져 있는 평북 강계에서 태어났지만 신의주에서 10대 학창시절을 보냈다. 14세가 된 1933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1938년 신의주동중으로 개칭)에 입학해 중학시절을 보내면서 압록강 건너 중국 안동(현 단둥)으로 자주 다녔다. 이것이 후일 중국사를 전공하게 된 동기가 됐다고 한다.

    장준하와 김준엽 두 사람의 유소년기를 보면 이 지역의 특성 한두 가지를 알아챌 수 있다. ‘기독교’ 그리고 ‘접경지역’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국가와 지역(지방)의 관계라는 다소 까다로운 문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는 국가 경영에 폐해로 작용하고 있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지역주의는 ‘나쁜’ 것일까. 특정 지역의 성향이 정치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설계를 이야기하면서 왜 지역을 거론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과 같은 큰 사회변동의 시기, 한국사에서 ‘지역’은 무언가를 시사하게 된다. 지역에 따라 근대 지향성에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이 평안도다.



    안창호와 서북파의 변혁운동
    차별과 착취의 땅 서북지방

    김준엽은 ‘장정’에서, 자신의 고향과 유년기에 대해 회고하는 가운데 평안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평안도는 조선조 내내 차별을 받은 지역이다. 근대 이후 기독교의 세가 전국에서 가장 강했던 것도 기독교를 조선조 통치이념인 주자학에 대항하는 가치관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김준엽의 말에는 평안도의 특성뿐 아니라 ‘그 지역민이 자기 출신 지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드러나 있다.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이 조선시대 내내 차별을 받은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서북지방은 차별에 그치지 않고 가혹한 착취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근대 이후 서북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할 때 자주 19세기 ‘홍경래의 난’을 앞에 내세웠던 이유도 여기 있다.

    그런데 평안도가 조선 이념인 성리학을 중심에 놓았을 때는 변방의 가장 낙후한 지역이었지만, 유교적 질서에 반하는 것을 ‘진보’로 상정하면 오히려 가장 앞선 지역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에서 북학파나 서학파가 가지고 있던 진보성을 생각해본다면, 평안도는 바깥세계로 이어지는 관문이라는 점에서 지정학적으로도 유리한 지점에 있었다. 평안도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 일대에서 상공업이 일찍 성장한 배경이 됐던 이런 상황은, 개화계몽기 개신교가 이 지역에 일찍 수용된 배경이기도 했다. 개화계몽기 이후 이 지역에서 바로 그 ‘진보’의 매개가 기독교였던 것이다.

    김상태의 연구에 의하면,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평안도의 지역적 특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선교사업을 위한 최적지로 서북지방을 지목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평안도와 황해도는 한국 장로교의 핵심 근거지가 됐고, 한국 기독교의 서북 주도 양상은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됐다(김상태의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 엘리트의 형성’).

    기독교를 통한 서북지역의 개화는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사업으로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말 전국 각종 사립학교 중 70%가량이 관서와 관북지역(넓은 의미의 서북)에 집중돼 있었으며, 그 대부분이 기독교 계열 학교였다.

    서북인들은 이런 모든 상황을 과거 조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회 건설의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 근대 서북의 두 거두,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중심이 돼 1907년 만든 운동체 이름이 신민회(新民會)였음은 이들이 과거와 단절된 ‘새로움’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과거 유교국가인 조선이라는 나라를 회복할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서북의 후예 장준하가 후일 1945년 8·15를 ‘광복(光復)’이 아닌 ‘신생(新生)’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 있다. 민족은 해방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것이지 빛을 되찾은 것은 아니라는 뜻, 말하자면 ‘다시 찾을 빛’은 없었다는 것이다.

    근대 서북인들이 벌인 새 문화 건설 운동의 좋은 예가 있다. 한국 현대문학을 최초로 성립한 문인은 모두 평안도 출신이다. 서북지역 연구자인 정주아에 의하면 “이광수,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김억, 김소월 등 근대문학사의 외연을 만들어낸 주요 작가들이 평안도의 평양, 정주 등에서 출생했고, 문학 활동을 포함하여 정치사회적 활동에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이 있다(정주아의 ‘한국 근대 서북 문인의 로컬리티와 보편지향성 연구’).

    그 배경에 도산 안창호가 있음을 언급해두자. 실제로 한국 근대문학의 대문을 열어젖힌 두 작가 이광수와 주요한은 각각 도산의 ‘오른팔’과 ‘왼팔’에 해당했다.

    안창호와 서북파의 변혁운동
    서북파와 기호파의 갈등

    안창호는 개화계몽기와 일제강점기에 걸쳐 서북 지식인들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조직의 중심이었다. 서북 출신 지식인들은 안창호를 중심으로 강하게 결집해 있었고, 이러한 강한 결집력은 종종 다른 지식인 집단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기호파(경기·충청 출신)와의 갈등이다. 김상태에 의하면, 미국 한인 및 유학생 사회가 갈등의 대표적 공간이었다고 한다. 대체로 하와이나 미국 동부지역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기호세력이, 로스앤젤레스(LA)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에서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서북세력이 강했다고 하는데, 이들 두 세력이 부딪쳤던 것이다. 1920년대 이후에는 국내 우파 민족주의 지식인층에서도 기호세력과 서북세력의 대립이 본격화됐다.

    김상태가 편역하고 논평한 ‘윤치호 일기’에는 서북파와 기호파의 대립 및 지역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대표적인 부분들을 인용한다.

    “안창호 씨가 지역감정의 소유자여서, 기호인들의 노력으로 독립을 얻을 것 같으면 차라리 독립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서북인들은 기호인들에 대해 커다란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1920년 8월 30일). 이조 500년 동안 서북인들은 정치적 박대와 모욕적인 차별을 받아왔다. 서북인들이 기호인들, 특히 지배계층으로 군림했던 기호인들을 증오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1921년 6월 4일). 두 파벌이 이제는 서울에서 더욱더 적대적인 양상을 연출해가고 있다. 서북파의 지도자인 안창호 씨가 이런 말을 했단다. ‘먼저 기호 사람들을 제거하고 난 후에 독립해야 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다(1931년 1월 8일). 오후에 안창호 씨가 수감되었다. 김활란 양이 내가 안씨 석방을 위해 당국자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에 분개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승만계와 서북파를 이끌고 있는 안창호계 간의 볼썽사나운 다툼이 마침내 서울까지 다다른 것 같다(1932년 7월 15일).”

    실제 안창호가 강한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이 쉽지 않다. 그렇지만 서북파 지식인과 기호파 지식인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심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시 물어볼 수 있다. ‘모든 지역주의는 상대적인 것인가.’ 당연하게도, 지역이 가진 특성이 지역주의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또한 지역주의 자체도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을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지역성이 정치 이념의 형태로 나타날 때 그 이념과 성격이 가지는 현실적합성과 가치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근대 서북의 이념은 조선조와 비교했을 때 확실히 새로운 것이었고 또 진보적인 것이었다. 서북인들의 변혁운동을 단순히 서북인의 원한감정이나 변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에서 나온 것으로 치부해버리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서북인들의 변혁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과 방향을 가졌던 것일까.

    안창호와 서북파의 변혁운동
    개인의 정신개조를 통한 사회 변혁

    안창호는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민족의 힘을 기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더하여 민족의 힘은 개개인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개인의 역량 강화를 위해 가장 기본으로 확고한 정신성, 도덕성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믿었다. 다음, 흥사단 입단문답에 그런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흥사단은 정권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나 수양단체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보다도 수양이 근본이 됩니다.”

    그런데 개개인의 확고한 정신성을 확립하는 것이 식민지 현실에서 독립운동의 방략이 되기는 어렵다는 데 이 노선의 문제가 있다. 실력을 양성한다고 했을 때 그 ‘실력’은 실제로 어떤 힘을 가리키는 것인가. 일제강점기 안창호의 독립운동 노선이 가진 문제점에 대해서는 널리 인지돼 있다. 민족의 주권이 제국에 의해 침탈된 상태에서 ‘힘을 기르자’는 논리는, 그 힘의 원천이 제국의 선진화된 제도와 문물에 있는 까닭에 결과적으로 식민제국에 동화되고 마는 상황을 낳는다.

    그렇지만 안창호의 생각은 해방 이후에도 서북 출신 지식인들에게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박정희 정권에 가장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던 함석헌조차 이 계열에 있었다. 교육을 통한 ‘정신개조’라는, 일제강점기 안창호로 대표되는 우파 준비론자들의 계보에 함석헌도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함석헌은 1987년 당시 오산학교 동창회장으로서 ‘오산 팔십년사’ 서문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노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만주에 가서 독립군이 된다든지, 임시정부를 조직해서 싸울 기회를 기다린다든지 하는 것도 물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오늘에 와서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며 생각할 때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역시 나라 안에 남아 있어, 정치적, 군사적으로 투쟁하는 것보다는 교육을 통해 정신운동을 한 것이 보다 더 크게 공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창호와 서북파의 변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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