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2

2015.08.24

누구를 위한 신당 논의인가

현역의원 동참 없이는 공허한 메아리, 유력 대권주자 없는 신당은 맹목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5-08-24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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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위한 신당 논의인가
    내년 4월 20대 총선을 8개월 앞두고 야권발(發) 신당 창당 논의가 무성하다. 진앙지는 주로 호남이다. 4·29 재·보궐선거(재보선) 광주 서구을에서 무소속으로 당선한 천정배 의원이 한 축이고, 얼마 전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을 탈당한 박준영 전 전남도지사가 또 다른 축이다. 4·29 재보선 서울 관악을에서 낙선한 이후 잠행을 계속하고 있는 정동영 전 의원도 눈여겨볼 인사다.

    광주에서는 천 의원을 중심으로 한 신당 창당을 전제로 내년 총선에 나설 인사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천 의원과 가까운 김경진 변호사가 북구갑, 김영집 지역미래연구원장이 남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광주지부장을 지낸 이상갑 변호사는 광산을 출마 예상자로 분류된다. 광주에서는 창당 깃발만 올리지 않았을 뿐 이미 천정배발 신당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광주 천정배, 전남 박준영, 전북 정동영 세 사람이 호남을 기반으로 힘을 합해 신당을 창당한다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행법상 발기인 200명을 모집해 창당준비위원회를 꾸린 뒤 6개월 이내 5개 시도당을 결성하면 정당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내년 총선까지 7개월 이상 남아 있기에 총선 전 창당할 수 있는 시간도 충분하다.

    4·29 재보선 이후 호남발 신당 가능성은 꾸준히 거론돼왔다. 하지만 넉 달이 다 돼도록 실행에 옮기려는 움직임은 여전히 미미하다. 군불만 때고 어느 누구도 발 벗고 창당에 적극 나서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야권 신당이 지지부진한 이유



    “야권 재편에 이르지 못한 호남을 기반으로 한 신당으로는 야권 분열의 책임을 뒤집어쓸 수 있다.”

    야권 인사들이 ‘호남발 신당’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내년 총선을 겨냥해 호남의 비(非)노무현 정서를 지렛대 삼아 신당을 만들고픈 유혹이 클 것이다. 9월 말 추석 밥상에 ‘야권 신당’이 화제에 오르도록 하고 싶지 않겠나. 하지만 먼저 신당 창당에 나섰다 야권 분열의 책임자로 비쳐 내후년 대선(대통령선거) 전망을 더 어둡게 했다는 역풍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야권 전략통 인사의 분석이다. 새정연이 김상곤 혁신위원회를 띄워 혁신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도 ‘야권 신당’ 동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새정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지 않은 다수 야권 지지층이 선뜻 신당 추진 세력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있는 것. 야권 신당이 지지부진한 근본적인 이유는 신당 창당 동력이 유권자로부터 나왔다기보다 내년 총선에 나서려는 입지자와 총선을 발판 삼아 내후년 대선에 나서려는 이들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이다.

    이숙현 시사칼럼니스트는 “총선은 국회의원에 뜻을 둔 입지자에게는 4년 만에 찾아온 중요한 기회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의 대선 패배를 경험한 야권 지지층은 내년 총선보다 내후년 대선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즉 내년 총선이 내후년 대선 승리 가능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원하는 이가 많다”며 “야권 신당 추진 세력이 야권 지지층에게 ‘신당이 내후년 대선 승리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해내지 못하면 ‘신당 창당=제몫 챙기기’로 비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누구를 위한 신당 논의인가
    지금처럼 신당 논의가 호남에만 머물러서는 야권 재편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야권 한 인사는 “신당이 새로운 세력으로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으려면 호남이라는, 전통적으로 야권에게 유리한 울타리를 벗어나야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며 “전국적 지명도를 갖춰 내후년 대선에서 뛰어볼 만한 인사들이 한데 모여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고 창당에 나선다면 모를까, 호남 출신 몇몇 인사가 창당을 주도해봐야 국민 눈에는 ‘호남 주도권 다툼’ 정도로 비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야권 일각에선 서울 박영선, TK(대구·경북) 김부겸, PK(부산·경남) 안철수, 호남 천정배와 정동영 등이 신당 창당에 뜻을 모으고, 정계은퇴 선언 이후 전남 강진 토굴에 칩거 중인 손학규 전 의원까지 합류하는 신당이어야 야권 재편을 촉발할 수 있다는 시각이다.

    권역별 집단지도체제 신당

    새정연 한 비주류 인사는 “지금 야권에서 창당 논의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이유는 현 문재인 대표 체제로는 2012년 총선과 대선 때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현재 야권에서 친노(친노무현) 세력을 제외하고 전국적인 신당 바람을 일으킬 만한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한두 사람의 힘만으로 신당 창당이 어렵다면 권역별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 한데 모여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당 논의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내후년 대선 승리 가능성을 높일 카리스마를 갖춘 차기주자’가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1996년 15대 총선을 9개월여 앞두고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DJ가 창당 깃발을 높이 들자 당시 민주당에 몸담고 있던 동교동계 출신 인사가 대거 탈당해 신당 깃발 아래 모였다. DJ가 유력 대선주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5대 총선에서는 정치적 의리를 지킨 동교동계와 아태평화재단 출신을 한 축으로, 다른 한 축으로는 새 인물을 앞세워 선거를 치렀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정계에 입문한 이가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 정세균, 추미애, 김한길 등 현재 야권 중진들이다.

    새정연 한 원외 인사는 “1996년 15대 총선 직전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공천에서 대거 탈락한 친박근혜계 인사들이 ‘친박연대’ ‘친박무소속연대’를 꾸려 총선에서 당선할 수 있었던 것도 전국적 지명도를 갖춘 차기 지도자 김대중과 박근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선거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내걸었을 때 득표에 도움이 되는 게 지도자”라고 말했다. 그는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이런 분들은 총선 때 득표에 도움이 되겠지만 천정배, 박준영, 정동영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득표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며 “천정배 의원은 광주·전남 일부, 박준영 전 도지사는 전남 일부, 정동영 전 의원은 전북 일부에서 도움이 되는 수준이기 때문에 신당 바람이 크게 일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야권 신당 논의가 지지부진한 또 다른 이유는 현역의원들의 NATO(Not Action Talking Only)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호남 출신 현역의원들이 이따금 호남발 신당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이 앞장서 어떻게 신당을 창당할지 구체적인 구상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야권신당, 호남신당’이 단순히 새정연 내 비주류의 주류 압박하기용 카드라는 얘기가 나온다.

    현역 의원들의 NATO

    새정연의 한 주류 측 인사는 “비주류 의원들이 호남 신당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새정연 공천 외에 또 다른 옵션을 갖게 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아직 어느 쪽이 더 유리한지 판단이 서지 않아 가능성만 열어두고 있을 뿐, 실행에 옮기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내다봤다.

    내년 총선 전 호남에서는 천정배 신당이든 박준영 신당이든, 어떤 형태로든 신당의 윤곽이 나올 공산이 크다. 4·29 재보선 직전 새정연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광주에서 당선한 천 의원이 내년 총선에 또다시 혈혈단신으로 출마하게 되면 정치적으로 ‘천정배 홀로서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박준영 전 도지사의 경우 새정연 탈당으로 배수진을 쳤다. 신당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 하지만 실제 창당으로 이어질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현역의원들이 동조하지 않는 한 ‘나 홀로 원외신당’에 머물 수 있다는 점에서다. 호남 지역 한 인사는 “만약 천정배 의원이 신당을 창당하면 최소한 천 의원

    1명이라도 원내 의석을 보유한 신당이 될 수 있지만, 박 전 도지사가 추진하는 신당은 현역의원 없이 원외신당에 머물 공산이 커 주목도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원외정당 ‘민주당’과 김민석 전 의원의 노림수

    누구를 위한 신당 논의인가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이 당명 개정에 나서면서 원외정당 ‘민주당’이 주목받고 있다. 민주당은 새정연 창당 직전까지 사용했던 당명. 새정연 창당과 함께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에 반납했던 것을 사업가 출신 강신성 대표가 선관위에 다시 당명으로 등록하면서 존속하게 됐다. 민주당이 다시 당명으로 등록되는 과정은 ‘제비뽑기’를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민주당처럼 유력 정당의 당명이 다른 사람에 의해 등록돼 다시 사용되는 경우는 과거에도 있었다. 2012년 2월 한나라당은 총선을 두 달 앞두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그러나 19대 총선 비례대표 투표용지에는 ‘한나라당’이 버젓이 올라와 있었다. 물론 기호가 달랐다. 새누리당 1번, 민주통합당 2번이었고, 원외정당인 한나라당은 20번이었다. 한나라당 당명 반납 이후 다른 이가 다시 당명으로 등록해 총선 때 비례대표 용지에 한나라당이란 당명이 오를 수 있었던 것.

    원외정당인 민주당이 주목받는 이유는 당명이 갖는 가치 외에도 김민석 전 의원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강신성 대표는 김 전 의원의 후원회장을 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김 전 의원과 동명이인인 김민석 사무총장 역시 김 전 의원의 오랜 지인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이 외견상 강신성 대표-김민석 사무총장 체제로 돼 있지만 사실상 김 전 의원이 배후에서 창당을 주도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야권에서는 민주당 등록 당시 피선거권이 없던 김민석 전 의원이 민주당이란 당명을 선점하기 위해 자신과 가까운 인사들로 하여금 당명을 확보하게 한 것 아니냐고 추론한다. 민주당사는 선관위 등록 당시에는 서울 여의도 김 전 의원 개인 사무실을 썼고 올해 초 마포로 당사를 옮긴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5년간 피선거권이 묶여 있던 김 전 의원은 최근 피선거권을 회복해 내년 총선에 나설 수 있게 됐다.

    내년 총선 출마와 관련해 김 전 의원은 일부 언론에 “학교 갈 생각도 안 하는 사람에게 시험 볼 생각이냐고 묻는 격”이라며 우회적으로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정치활동 재개를 앞둔 그가 야권 재편 과정에 가만히 있으리라고 보는 이는 많지 않다. 지인을 통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민주당이란 당명 확보에 성공한 김 전 의원에게 내년 총선까지 몇 가지 선택지가 주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새정연이 ‘민주당’으로 당명 복귀를 강력히 원할 경우 합당 외에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새정연의 합당 파트너로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하는 수순이 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호남을 기반으로 신당 창당 움직임을 보이는 천정배 의원, 박준영 전 전남도지사 등과 연대해 신당의 한 축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김 전 의원은 한때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황태자로 불리기도 했다. 야권 일각에서는 천정배-김민석 두 사람이 수시로 만나 신당 창당에 대한 교감을 나누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셋째로는 내년 초 새정연 공천 과정에 낙천이 유력한 인사가 대거 탈당해 나올 경우 이들을 민주당에서 받아들여 내년 총선에 독자세력화를 시도할 가능성이다. 자신이 직접 총선에 나서지 않더라도 수도권과 호남에 의석 몇 석이라도 건지면 실질적 당수로 정치적 위상을 한껏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야권이 통합이 아닌 신당 창당 등 분열로 치달으면서 5년 만에 정치 재개에 나설 김 전 의원에게는 역설적으로 더 큰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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