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1

2015.08.17

쥐도 새도 모르게! ‘신상’이 털린다

교통사고 발생 시 결정적 단서, 공익신고 크게 늘어…편집 영상 무차별 유포 우려

  •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입력2015-08-17 14: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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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쥐도 새도 모르게! ‘신상’이 털린다
    5월 결혼식에 참석했다 자신의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최은상(35) 씨는 가벼운 접촉사고로 경찰서까지 가게 됐다. 최씨가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진입하려고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는 순간 정차 중이던 택시가 출발하면서 두 대가 부딪힌 것. 최씨는 자신의 차를 보지 못하고 출발한 택시기사를 탓했고, 택시기사는 뒤에서 다가와 갑자기 우회전하려던 최씨를 탓했다. 출동한 경찰의 중재에도 합의점을 찾지 못한 두 사람은 결국 경찰서까지 가서 최씨 차량에 부착된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을 확인한 경찰은 택시기사 100% 과실로 판정했다. 최씨 차량이 우회전하기 직전 브레이크를 밟아 멈췄음에도 택시가 최씨 차량을 받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기 때문이다. 끝까지 억울함을 주장하던 택시기사는 최씨 차량의 수리비 전액을 물어줘야 했다. 최씨는 “보험료를 할인받을 수 있어 블랙박스를 달긴 했는데 교통사고를 경험하니 ‘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랙박스가 없었다면 아마도 목격자를 찾기 위해 한참 헤매고 다녔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륜차에도 다는 추세

    차량에 부착하는 블랙박스가 보편화한 오늘날, 많은 운전자가 블랙박스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과거 교통사고 현장을 보고 사고 원인을 추측했다면, 이제는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과실 유무를 판단할 수 있게 됐다. 최근에는 오토바이나 자전거 같은 이륜차에도 블랙박스를 부착하는 경우가 늘었다.

    주말이면 동호회 회원들과 자전거 라이딩에 나서는 김재성(36) 씨도 출발 전 자전거에 블랙박스를 항상 부착한다. 몇 해 전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던 중 인라인스케이트를 신은 초등학생이 갑자기 튀어나와 부딪힐 뻔한 아찔한 경험을 한 뒤 곧바로 블랙박스를 구매했다. 김씨는 “사소한 접촉사고라도 부상하거나 분쟁이 심해지면 소송까지 가는 경우를 봤다. 그럴 때 블랙박스가 유용할 것 같아 마련했다. 그런데 자전거를 세워두고 화장실이나 편의점에 들어가는 잠깐 사이 누가 블랙박스를 떼어가는 일이 많다. 자전거 주차 시 항상 떼서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긴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블랙박스를 부착한 운전자는 자신이 경험한 아찔한 순간들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 공유하기도 한다. 중고차 거래 사이트 ‘보배드림’ 게시판에는 운전자들이 경험한 각종 영상이 올라와 있다. 휴대전화를 보느라 신호를 보지 못하고 무단횡단을 하는 보행자,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드는 운전자, 계속 차선을 바꿔가며 앞길을 가로막는 보복운전자 등 사고 직전 영상이 대다수. 이러한 영상들은 공중파, 케이블방송 뉴스의 한 꼭지로 묶여 소개되기도 한다. 누리꾼들은 관련 영상 밑에 ‘경찰에 신고해 범칙금 상품권을 줘야 한다’ ‘다시 운전대를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등 강도 높은 비난 댓글을 쏟아내고 있다.

    이 가운데 간혹 ‘억울한 뺑소니 사고를 당해 목격자를 찾는다’며 블랙박스 영상과 함께 도움을 요청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올 초 임신한 아내를 위해 크림빵을 사러 갔다 뺑소니 사고로 숨진 피해자의 사연도 이 사이트를 통해 확대됐다. 당시 사이트 회원들이 관련 폐쇄회로(CC)TV와 블랙박스 영상을 보고 잇달아 판독 결과를 제시해 차량 종류와 차량 번호를 알아내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트 회원들 사이에서 고수로 불리는 블랙박스 영상판독 전문가 김두호(29) 씨는 당시 피의 차량의 종류와 번호를 가장 근접하게 알아내 경찰에 제보했다. 그는 현재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고 일반 운전자의 블랙박스 영상을 판독해 뺑소니 차량의 종류와 번호를 알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천 선학역 인근 도로에서 발생한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의 피의 차량도 분석해 경찰에 제보했다. 피해자의 친구가 뒤따르던 차량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을 여러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올려 도움을 요청한 것. 해당 영상에는 달리던 오토바이가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SUV)에 치여 스파크가 일어날 정도로 도로에 나뒹굴고, 운전자까지 나가떨어지는 아찔한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있다. 현재 뒤따르던 차량에 찍힌 블랙박스 영상이 결정적 증거가 되고 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신상’이 털린다
    김씨는 “뺑소니 사고에서 블랙박스는 매우 결정적 구실을 한다. 예전에 새로 구매한 차를 주차장에 세워뒀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폐차해야 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블랙박스가 없던 시절이라 경찰도 범인을 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만 했다. 주변 CCTV 영상을 구해 영상판독하는 일에 몇 개월을 매달리다 보니 지금은 아예 업이 됐는데, 아직도 ‘그때 블랙박스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블랙박스 영상을 경찰에 제출하면 그만일 일을 판독까지 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김씨는 “블랙박스 화질이 과거에 비해 좋아졌지만 야간에는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으면 빛이 없어 어둡게 찍히는 데다 화질이 좋은 제품의 경우 노이즈까지 다 잡히는 등 문제가 있다. 또 차 앞뒤 유리에 대부분 선팅을 해놔서 야간뿐 아니라 주간에도 블랙박스에 제대로 찍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계를 지적했다.

    보상 없지만 경찰 신고 크게 늘어나

    경찰 수사에 블랙박스 영상이 기여하는 바는 매우 크다. 또 교통법규 위반 차량을 찍은 블랙박스 영상을 경찰에 신고하는 이가 대폭 증가하면서 범칙금 부과 건수도 늘었다. 경찰에서 보상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 일반 시민이 인터넷 사이트나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신고를 하는 이유는 뭘까. 2년 전 신호위반 차량을 ‘국민신문고’(www.epeople.go.kr)에 신고한 적 있는 직장인 서원민(36) 씨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위험을 겪고 나니 해당 운전자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당시 서씨는 퇴근길 회사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는데 SUV 한 대가 쏜살같이 코앞에서 지나갔다. 해당 SUV의 속도는 시속 100km를 훌쩍 넘는 것으로 보여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더라면 병원 신세를 질 뻔했다. 집에 도착한 서씨는 곧바로 블랙박스 영상을 편집하고 정황 내용을 정리해 경찰청 홈페이지에 신고했다. 접수 확인 e메일을 받고 일주일 뒤 관할 경찰서로부터 답신이 왔다. 해당 차량의 위반을 확인했고 운전자에게 범칙금 6만 원과 벌점 15점을 부과했다는 것. 서씨는 “신고 과정이 번거롭기는 했지만 해당 차량 운전자가 계속 그런 식으로 운전하다가는 어디선가 분명 크게 사고를 낼 것 같다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신상’이 털린다
    경찰청 홈페이지와 국민신문고를 통해 교통법규 위반 신고 사례가 늘자 경찰은 4월 ‘스마트 국민제보 목격자를 찾습니다’(http://onetouch.police.go.kr) 사이트를 만들어 웹·앱 동시 서비스를 시작했다. 범죄 용의자에 대한 제보를 비롯해 블랙박스 영상으로 교통법규 위반 신고도 할 수 있도록 통합한 이 사이트는 넉 달이 지난 현재까지 전국 누적 신고가 2만5000건을 넘어섰다.

    짧은 기간 신고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익명성이 보장돼 보복 위험이 적고, 스마트폰 앱을 통해 쉽게 신고할 수 있기 때문. 또 위치기반으로 설계돼 지도의 특정 위치를 선택해 신고하면 곧바로 관할 경찰서에 할당되는 시스템이라 피드백이 빠르다는 이점도 있다. 경찰청 정보협력과 관계자는 “국민 의식이 성숙해지면서 자발적 참여가 늘어난 것으로 본다. 특히 교통법규 위반 신고의 비중이 높다. 관할 경찰서에 신고 접수된 후 빠르면 일주일 안에 해당 차량을 찾아내 범칙금 부과를 통보하는 등 즉각적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고된 블랙박스 영상은 경찰 업무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 관계자는 “전체 신고 건 가운데 블랙박스 영상 신고 건의 경우 80% 정도 처리가 됐다. 과거에는 사고 당사자가 제시한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하는 데만 20~30분이 걸렸는데 최근에는 신고자들이 3~5분가량으로 자른 편집본으로 신고하기 때문에 업무 부담이 줄었다. 신고 건이 늘어 전체 업무량은 증가했지만 건당 확인 시간은 단축됐기 때문에 예전보다 일 처리가 수월해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찍혀 확산된다면?

    블랙박스 영상이 좋은 일에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그만큼 피해 사례도 늘고 있다. 택시에 탑승한 손님, 골목길 데이트하는 커플 등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을 무분별하게 인터넷에 올려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적잖다.

    실제로 2010년 택시기사에게 무례한 태도로 일관하는 한 여성의 모습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확산돼 논란이 일었다. 블랙박스 영상 속 여성은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한 뒤 휴대전화로 말다툼을 계속하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기사가 방어운전으로 급정거를 하자 “왜 난폭운전을 하느냐”며 욕설을 퍼부었다. 화가 난 기사가 내리라고 하자 여성은 신고하겠다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기사는 갓길에 여성을 내려준 채 떠났다. 기사는 블랙박스 영상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는데 여성 얼굴을 모자이크하긴 했지만 지인이라면 말투와 차림새만으로도 그 여성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여성의 태도를 비난하는 누리꾼이 많았으나 일부는 택시기사의 업무 방식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해당 영상을 본 직장인 박지혜(34) 씨는 “택시에 탑승하자마자 내 모습이 블랙박스에 찍힌다고 생각하니 무섭고 불쾌하다. 찍히기만 하면 다행인데 요즘에는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돼 어디엔가 이렇게 올라가 논란 또는 희화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섬뜩하기도 하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온라인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에서 ‘블랙박스’를 검색하면 다양한 영상이 뜬다. 이 가운데 일반 시민이 찍힌 영상도 적잖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교복을 입은 남녀학생이 서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걸어가는 영상, 주택가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던 한 커플이 집 앞에 다다르자 키스하고 헤어지는 영상 등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이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다. 해당 영상에는 얼굴 모자이크도 돼 있지 않아 신원 파악이 가능할 정도다.

    쥐도 새도 모르게! ‘신상’이 털린다
    신상털기·영상 조작 등 부작용도

    논란의 블랙박스 영상 당사자가 신상털기 피해를 겪는 경우도 있다. 2012년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된 ‘학교 운동장 김여사 동영상’의 운전자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됐다. 해당 영상에는 비오는 하굣길 학교 운동장에 진입하던 차량이 지나가던 여학생을 받아 쓰러뜨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런데 운전자로 추정되는 중년 여성이 당황해 소리를 지르면서 브레이크가 아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돌진해 누리꾼의 공분을 샀다.

    당시 사고 차량 운전자의 남편이라고 밝힌 한 남성이 블랙박스 영상과 함께 ‘보험사 직원이 피해자와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조언을 부탁한다’는 글을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 파문이 확산됐다. 누리꾼들은 ‘사고 여학생은 생명이 위독하다는데 가해자는 빠져나갈 궁리만 한다’며 분노했고, 급기야 운전자 신상털기에 나섰다. 며칠 뒤 결국 온라인상에는 가해 여성과 남편을 비롯해 심지어 두 자녀의 이름과 생일, 거주지, 연락처, 차량 번호와 차종 등이 모두 공개돼 또 다른 우려를 낳았다.

    이같이 운전자 신상이 공개되는 부작용 외에도 뺑소니 차량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허위신고에 의해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언급한 인천 선학역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의 경우 해당 글 아래 ‘뺑소니 차량과 비슷한 차량 발견, 긁힌 자국도 있음’ ‘사고 부위와 같은 지점이 손상된 뺑소니 의심 차량 발견’ 등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제보 사진이 여러 건 올라왔다. 이 가운데 사고 차량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무고한 운전자가 뺑소니 사고 차량과 같은 차종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경찰 조사를 받는다면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억울한 경험을 한 이도 적잖다. 취업준비생 이지훈(29) 씨는 2년 전 경찰로부터 신호위반 신고가 접수됐다며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빨간불에 직진하는 모습이 찍힌 블랙박스 영상을 누군가 신고했고 그의 차량번호라는 것. 지방에 거주하던 이씨는 “서울로 올라간 적도 없는데 위반했다고 하니 억울한 심정이 컸다”고 말했다. 실랑이 끝에 인근 지구대에서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했는데 차량 번호 4자리만 같을 뿐 앞 번호는 보이지 않아 확인이 불가능했다. 결정적으로 차종이 전혀 달라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또 블랙박스 영상이 조작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경찰청 한 관계자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블랙박스 영상 중에는 조작, 편집된 것이 많다. 편집 능력이 떨어져 조잡하게 만들어진 영상도 있지만 어디까지가 실제 일어난 일이고 어디부터가 조작인지 전문가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영상도 있다. 특히 찍힌 날짜의 경우 쉽게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신빙성 여부를 항상 의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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