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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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몽글몽글 복슬복슬 당근꽃

  • 김광화 농부작가 flowingsky@hanmail.net

    입력2015-06-15 1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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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발이 많이 달린 벌레 같은 모습의 당근 씨앗.

    ‘당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부분 주황색을 띠는 뿌리 부분일 테다. 그만큼 우리는 당근을 먹는 데 익숙하다. 그럼, 꽃은? 우리 식구가 가을에 당근을 가꾼 다음, 다 캐지 않고 밭 한 귀퉁이에 몇 포기 남겨둔 적이 있다. 그런데 추운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까지 살아남았다.

    땅이 녹자 이 녀석들이 잎을 새로 내더니 5월부터 꽃대를 위로 올리는 게 아닌가. 당근 처지에서 보자면 사춘기. 불끈불끈 솟아나는 모양새가 하루가 다르다. 6월 초가 되자 사람 허리 가까이 솟고, 그 끝에서는 어느새 앙증맞은 꽃차례를 보여준다. 이게 정말 내가 먹던 그 당근이란 말인가. 한마디로 경이로웠다. 뿌리에 저장해둔 모든 에너지를 한꺼번에 끌어 올리는 것 같았다.

    곧이어 꽃을 피운다. 하얗고 소박한 꽃을. 처음으로 본 당근꽃은 많은 느낌을 갖게 했다. 먼저 반가웠다. 꽃 색깔이나 향기를 떠나 소중하지만 잃어버렸던 그 무엇을 다시 되찾은 느낌이랄까. 씨앗이 있다는 건 곧 꽃이 피는 걸 전제로 하지 않는가. 너무나 당연한 걸 까마득히 잊고 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남자의 성을 떠올리다

    당근은 꽃차례가 오밀조밀 복스럽다. 하얀 꽃 한 송이는 수수 알갱이같이 작다. 이 작은 꽃 수십 개가 모여 우산꽃차례(산형화서)를 이루며, 다시 이들 수십 개가 모여 큰 꽃 모양으로 피어난다(겹산형꽃차례·복산형화서). 가까이서 보면 마치 바람개비들로 매스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몽글몽글 솜사탕 같다. 향기도 은은하다. 꽃에는 먹을 게 많은지 온갖 곤충이 꼬인다. 배추흰나비, 노린재, 풍뎅이, 등에, 개미….



    당근꽃은 6월부터 피기 시작해 7월까지 약 40일간 핀다. 밭을 오가며 이 꽃을 자주 보다 보니, 어느 순간 남성 이미지와 겹친다. 뿌리를 남근이라 치면 줄기가 위로 꼿꼿이 솟는 건 발기된 상태. 수많은 흰 꽃은 정액. 이렇게 연상이 이어지니 새삼 당근이 예사롭지 않다.

    농작물을 기르다 보면 씨앗 하나 심어서 얼마나 거두느냐를 마음 쓰게 된다. 근데 이를 구체적인 숫자로 드러내고자 하면 어렵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공산품과 달리 그때그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씨앗마다 갖는 생명력이 다르고, 씨앗이 자라는 흙이 다르며, 날씨가 다를밖에.

    그러니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보다 대략 그 어떤 흐름을 짚어보자. 벼는 이삭 하나에 꽃이 100개에서 200개가량 핀다. 벼 한 포기가 대여섯 개 정도 가지치기를 했다 치면 볍씨 한 알은 얼추 1000송이가량 꽃을 피우는 셈이다.

    당근 역시 중심 줄기 하나가 먼저 올라오고 곧이어 그 둘레로 곁가지들이 자란다. 당근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환경이 좋다면 대략 여덟아홉 개 남짓 가지치기를 한다. 중심 줄기를 기준으로 그 둘레 가지들이 반원에 가깝게 뻗는다. 이 가지마다 다시 2차, 3차 가지가 나오는데 여기서 다시 꽃줄기가 나오고 겹산형꽃차례를 이루며 꽃이 핀다. 조금 정신이 없을 정도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자잘한 당근꽃 위에서 곤충들이 잔치를 즐긴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이제 막 싹이 튼 당근. 두세 포기만 있어도 엄청나게 많은 꽃을 피우는 당근. 꽃이 진 뒤 모습(왼쪽부터).

    꽃과 씨앗을 위한 아픔

    중심 줄기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꽃차례가 가장 크고, 가장 많은 꽃을 피운다. 얼추 3000~4000송이. 2차, 3차 가지로 갈수록 송이 수가 적다. 그렇다 하더라도 곁가지마다 피는 꽃차례가 많다 보니 한 포기의 전체 꽃 수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자료를 찾아보니 5만에서 15만 송이로 나온다. 아마도 우리가 먹는 채소 가운데 한 포기로 가장 많은 꽃을 피우지 싶다.

    도대체 무슨 힘이 어디서 나오기에 이렇게 많은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새삼 땅속 뿌리가 궁금하다. 조심스레 한 포기 당겨봤다. 아, 우리가 먹던 그 당근이 아니다. 곱고 미끈하고 예쁘기만 하던 그 모습이 아니다. 세로로 갈라 터진 모습이 처절하다. 아기를 낳을 때 살이 찢기는 아픔을 겪는 건 우리네 어머니만이 아닌 셈이다. 말 없는 당근도 수많은 꽃을 피우고자 땅속에서 아프게 온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 생명이 수많은 꽃을 피우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 생명력을 닮고 싶어진다. 당근을 즐겨 먹다 보면 그 생명력도 얻는 게 아닐까. 내가 잘 아는 누군가 초여름에 결혼한다면 당근꽃으로 부케를 선물하고 싶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꽃을 피우며 갈라 터진 당근 뿌리.

    당근 : 산형과의 두해살이풀이며, 원산지는 아프가니스탄.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당나라에서 들어왔다고 ‘당’근이라 한다. 1m 높이로 자라며, 뿌리는 원뿔 모양인데 그 길이가 10~15cm 정도. 꽃은 6~7월 흰색으로 피고, 5개의 꽃잎과 꽃받기와 수술이 있다. 암술은 2개인데 꽃이 작아 꽃잎이 져야 간신히 보인다. 줄기 끝과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꽃줄기에서 겹산형꽃차례(복산형화서)를 이룬다. 당근꽃을 보려면 겨울을 난 당근을 화분에 심으면 된다. 씨앗까지 받으려면 중심 줄기에서 피는 꽃대를 지지대로 묶어주고, 나머지 곁가지는 정리하는 게 좋다. 당근은 제꽃가루받이를 하지 않으니 두세 포기를 같이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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