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9

2015.05.26

옛 지명 더듬으며 사람 사는 구경하며

골목 구석구석 볼거리 풍성한 강남 수서역 인근 단독주택 마을

  •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jerome363@uos.ac.kr

    입력2015-05-26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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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지명 더듬으며  사람 사는 구경하며

    아파트와 단독주택들이 어우러진 서울 강남구 수서동 수서역 인근의 주택가 풍경.

    서울 강남에는 아파트만 있는 게 아니다. 단독주택도 있다. 지금은 드물지만 예전엔 아주 많았다. 1981년 필자가 대학생이 돼 서울에 왔을 때 살았던 곳은 영동시장 옆 논현동 단독주택이었다. 이후 강남의 단독주택 단지는 하나 둘 아파트단지로 바뀌었지만, 몇몇 곳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필자가 지금 살고 있는 율현동 방죽마을도 그중 하나다.

    국내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지도 서비스나 구글의 위성영상 서비스 사이트를 열어 수서역 부근을 살펴보면, 서울공항 쪽으로 내려가는 밤고개로 좌우에 단독주택 마을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 여행할 곳은 바로 이곳, 강남의 끝자락 단독주택 마을이다.

    수서역 동남쪽부터 보자. ‘궁마을’이 있다. 왜 마을 이름에 궁(宮) 자가 붙었을까. 백제 도읍지가 있던 곳이라 그렇다는 말도 있지만, 조선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등 여러 왕손의 묘와 집터가 있어서라는 설명이 더 그럴듯하다. 대왕중학교와 왕북초등학교처럼 ‘왕(王)’ 자가 흔한 이 동네의 과거 지명은 경기 광주군 ‘대왕면’ 수서리였다. 경사지에 줄줄이 늘어선 집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마을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못골·방죽이 마을 이름 된 사연

    궁마을 남쪽으로 ‘쟁골마을’과 ‘교수마을’이 있다. 대모산 남사면 양지바른 곳에 있는 쟁골마을은 날이 밝으면 햇볕을 가장 먼저 받는 곳이라고 해서 쟁골, 자양골, 자양동(紫陽洞)이라 불렀다. 마을 입구에 자동차 출입 차단봉이 있어 외부인은 차량으로 들어가기 어렵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교수마을은 유명한 한정식집, 추어탕집, 갈비집 등과 마당 너른 카페로 유명하다. 마을 안쪽에는 불경 번역 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룬 탄허 대종사를 기리는 탄허기념박물관이 있다.



    여기서 남쪽으로 좀 더 내려가면 ‘못골마을’이 나온다. 조선 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후원의 묘역 앞에 100평(330여㎡)쯤 되는 규모의 연못이 있어 못골, 지곡동(池谷洞)이라 불렀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경기 광주군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마을 상징이던 연못은 1980년대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메워져 지금은 볼 수 없다.

    못골마을의 행정구역 명칭은 자곡동(紫谷洞)이다. 자양동과 지곡동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 만든 이름이다. 종로구 인사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중부 8방의 하나인 관인방(寬仁坊)과 사동(寺洞)에서 한 글자씩 떼다 만든 이름이고, 창신동은 한성부 동부 12방에 속한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을 합친 이름이다. 이런 식의 조합형 지명은 서울에 아주 많다.

    못골마을 남쪽으로는 내가 사는 ‘방죽마을’이 있고 그 옆은 ‘은곡마을’이다. 방죽마을에는 웅덩이나 저수지가 많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밤고개로를 경계 삼아 서쪽 방죽1마을과 동쪽 방죽2마을로 나뉜다. 이곳의 행정구역 이름은 율현동(栗峴洞)인데, 밤나무가 많은 언덕이어서 밤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애초 고개 이름은 밤고개가 아니라 ‘반고개’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개는 고개인데 그리 높지 않아 반고개라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곳이 서울 가는 길의 절반쯤 되는 곳으로, 반쯤 왔으니 잠시 쉬어가라는 뜻에서 반고개라 불렀다고도 한다. 지명의 유래는 이렇듯 흥미롭다.

    방죽마을 남쪽 세곡사거리에도 단독주택 마을이 있다. 이곳은 ‘윗반’ ‘아랫반’으로 불린다. 반고개마을이란 뜻이다. 방죽마을에서 좁은 길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가면 나지막한 산의 남사면에 옹기종기 자리한 은곡마을이 나온다. 안숙선 명창이 이곳에 산다.

    2007년 직장을 옮기면서 경기 일산에서 강남으로 이사 왔을 때 처음 살았던 곳은 일원동의 일원역 근처 아파트였다. 그런데 2년마다 치솟는 전세금을 감당하기 힘들어 방법을 찾다 방죽마을에 있는 지금 우리 집으로 이사했다. 마당 있는 집에 사는 게 불편한 점도 있지만 아파트에서는 누리기 힘든 새로운 행복도 풍성하다. 강아지와 길냥이(길고양이)를 키우고 마당 한구석에 작은 텃밭도 일군다. 우리 아이들은 등굣길이 불편해졌을 텐데도 단독주택이 아파트보다 더 좋다고 한다. 마음씨 좋은 주인을 만난 덕에 2년 거주 뒤에도 전세금 인상 없이 계약을 연장해 이 좋은 집에서 3년째 살고 있다.

    옛 지명 더듬으며  사람 사는 구경하며

    각기 다른 집 모양과 주인들이 정성껏 가꾼 정원을 감상할 수 있는 서울 강남구 자곡동 못골마을(왼쪽). 충남 논산의 윤증고택을 본떠 못골마을에 지은 한옥.

    라일락 향기 머무는 마을

    따뜻한 봄날, 서울 강남의 단독주택 마을들을 찾아가보자. 수서역에서 내리면 걸어서 궁마을, 쟁골마을, 교수마을을 둘러보고 조금 더 걸어 못골마을까지 가볼 수 있다. 보금자리주택이 건설돼 지금은 동네 풍경이 변했지만, 그래도 새로 지은 아파트와 오피스텔 틈새에서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한 예쁜 마을들을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곳에서 저마다 다른 집 모양을 보고 집주인이 정성스레 가꾼 정원을 보면 아파트라는 틀에 갇힌 ‘집’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거리마다 진동하는 라일락 향기를 맡고 새소리를 들으며, 새잎을 피워내는 배롱나무, 감나무, 소나무의 자태를 보는 것도 좋겠다. 못골마을 지나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국내외 저명 건축가들이 설계한 이색적인 아파트단지도 구경할 수 있다. 겉모습만 보지 말고 살기에 좋을지도 한 번 가늠해보자.

    못골마을 코앞에서는 뜻밖의 풍경도 마주하게 된다. 덩그렇게 자리한 큼지막한 한옥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2012년 강남지구 보금자리주택을 건설하면서 충남 논산에 있는 전통 한옥 ‘윤증고택’의 모습대로 한옥을 지어 강남구청에 제공하려 한 것인데,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지금까지 빈 채로 있다. 한옥 옆에는 아주 커다란 공원도 있다.

    비어 있는 한옥과 그 옆 공원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못골마을 등 인근 주민들에게 좋으면서 서울시민도 유익하게 쓸 방법은 없을까. 동네 산책을 하다 빈집을 볼 때면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펴곤 한다. 한옥과 공원을 묶어 서울 어디에도 없는 아주 커다란 ‘사람책 도서관(human library)’을 만들면 어떨까. 너른 공원에 사람책이 앉을 작은 부스를 줄지어 배치하고, 사람들이 오고가며 사람책을 만나 읽게 하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살아왔을 못골마을 어르신부터 자원해 사람책이 되고, 미래를 꿈꾸는 청년들과 어르신들이 독자로 만나면 참 좋겠다. 독자들에게 듬뿍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사람책은 한옥으로 모셔 더 많은 독자와 만나게 할 수도 있다. 나의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게 못골마을 어르신들부터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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