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9

2015.05.26

마크 로스코展에서 잠시 멈춤

‘추상미의 극치’ 보여주는 색면회화…위로받고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

  • 정민영 아트북스 대표 artmin21@hanmail.net

    입력2015-05-26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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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크 로스코展에서 잠시 멈춤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작품 앞에 선 마크 로스코.

    동일한 전시회도 개최지의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수용자의 감동이 달라진다. 더욱이 전시회가 대규모 기획전이라면, 개최되는 시점의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한 번쯤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마크 로스코전’(6월 2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개막을 전후해 우리 사회는 표정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지난해 있었던 세월호 참사=와 ‘땅콩회항’ 사건, 올해 정치계에 파란을 일으킨 ‘성완종 리스트’ 등 큰 이슈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전시회가 국내 미술계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로스코가 살아생전 관람객과의 교감을 중시했던 점을 감안하면, 국내 관람객이 처한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국내 미술계는 어떤가. 2000년대 들어 우리 미술계를 접수한 작품 스타일은 극사실주의와 팝아트 계열이다. 1970~80년대 현대미술의 상징이던 추상회화는 ‘명퇴자’(명예퇴직한 사람)처럼 뒷전으로 물러났다. 극사실주의와 팝아트 계열이 기세등등할 때는 대규모 추상회화전이 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막을 내린 적도 있다. 그런데 최근 ‘단색화’가 노익장을 과시하듯 약진하고 있다. ‘열풍’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술시장의 논리에 따른 미술계 내부 움직임일 뿐, 미술계 바깥의 호응까지 얻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몇몇 단색화 대가들 작품에만 조명이 집중되고, 그 밖의 추상회화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볼거리가 많은 극사실과 팝아트 계열의 구상회화 작품은 시각적 쾌감은 크지만 한편으론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가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감동이 눈을 지나 가슴에까지 미치지 못한 탓이 크다.

    뜻밖의 흥행 뒤엔 우울한 현실이

    이 같은 현실에서 ‘추상미의 극치’로 통하는 마크 로스코전이 개막했다. 국내에서 눈으로 확인 가능한 이미지가 없는 추상회화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흥행 면에서 모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뜻밖의 호응이 이어졌다. 물론 기획사의 치밀한 마케팅 전략 덕분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이 긍정적인 반응을 설명하기에는 허전한 감이 있다.



    이 열기 이면에는 일차적으로 우리 사회의 어둡고 우울한 현실이 도시리고 있다. 좀체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에서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들에게 로스코 회화는 갈증을 달래주는 ‘샘이 깊은 물’이었다. 초기작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전시장을 밝힌 거대한 ‘색면회화’를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위로를 받는다. 일상이 된 경쟁에서 벗어나, 호젓한 산사에서 명상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활력을 되찾듯, 사람들은 로스코가 연출해둔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물며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계기를 얻는 것이다. 그 과정은 위로와 쉼의 시간이고, 영성과 치유의 시간이다.

    사실 고요하게 다가오는 그의 작품은 명상과 썩 잘 어울린다. 그래서 전시장은 마치 교회나 성당 기도실을 연상케 한다. 심지어 46cm라는 작품 감상의 거리와 실내 분위기까지 지정했을 정도로 로스코는 연극적인 공간 연출을 통해 작품 감상의 극대화를 꾀했다. 그것이 관람객을 더 적극적인 작품 완성의 동참자로 만들었다.

    마크 로스코展에서 잠시 멈춤

    마크 로스코의 1948년 작 ‘No.9’(위)과 1970년 로스코가 자살 직전 완성한 아크릴화 ‘무제’.

    다음으로 ‘인문학 열풍’이라는 맥락이다. 각종 수험서 등으로 대표되는 요약된 지식을 익힐 수밖에 없고, 그 극단에서 사유를 요점정리로 대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같은 책이 인문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깊고 느리게 음미하는 지식과 지혜에 대한 욕구가 강해진다. 초고속으로 질주해도 살기 힘든 반인문적인 사람살이는, 반대로 인간의 존재와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인문학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게 한다.

    결코 만만찮은 내용에도 인문학 강좌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갈망의 정도를 확인하게 해준다. 디지털 기기에 명멸하는 정보의 부박함과 달리 영혼의 울림이 큰 로스코 작품은 사람들 내부에 잠든 사유 세계를 가동하는 자극제가 된다. 사실 로스코는 문학, 역사, 철학 등 소위 ‘문사철’에 밝았다. 한때 작품 주제를 신화적인 것과 니체의 ‘비극의 탄생’으로 대표되는 비극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것도 그의 회화가 색채나 형태의 표면적인 아름다움만 탐닉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로스코에 대한 관심은 국내 인문학 붐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로스코의 작품이 곧 인문학인 셈이다.

    풀어진 듯 조화로운 조형세계

    또 하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라는 맥락이다. 우리 정서의 밑바탕을 이루는 미의식과 로스코의 색면회화가 궁합이 잘 맞는다는 점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같은 사각형을 다룬다는 점에서 떠올릴 수 있는 화가가 피터르 몬드리안이다. 가로세로로 엄격하게 구획된 사각형을 색으로 채운 몬드리안의 작품은 흔히 ‘차가운 추상’으로 통한다. 화폭을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설계한 몬드리안의 작품은 역시나 이성에 호소한다.

    반면 색채가 주인공인 로스코의 회화는 사각의 색면을 기본으로 조형하기는 하되, 그것의 가장자리를 부드럽고 모호하게 흐려서 사각형끼리 내통하는 듯한 조형미를 연출한다. 완벽하게 기하하적인 세계보다 모호한 조형방식은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면서 호소력을 발휘한다.

    한국인의 미의식도 완벽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어딘가 한 곳이 이지러진 듯한 아름다움을 선호한다. 예컨대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의 경우, 중국이나 일본 도자기처럼 조형적으로 완벽하게 둥근 형태가 아니다. 한 곳이 약간 이지러진 둥근 모양이다. 대충 만든 것 같은데, 은근히 가슴을 파고드는 힘이 있다.

    이런 미의식과 로스코의 경계를 넘나드는 색면들의 흐물흐물한 조형어법은 통하는 바가 있다. 우리에겐 몬드리안의 차가운 조형세계보다 로스코의 풀어진 듯 조화로운 조형세계가 맞는 것이다. 로스코 회화의 열기에는 이 같은 우리 미의식도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로스코의 작품은 그림으로 명상이 가능함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리고 구상회화가 대세인 국내 미술계에 추상회화의 미덕을 알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긴 하지만 확정성 면에서는 의문이 든다. 서양미술사를 장식한 스타 작가에 대한 일시적인 쏠림현상이라는, 여타의 ‘블록버스트급’ 전시회와 결과가 별반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점에서 만난 로스코의 작품은 덤으로 우리 현실을 비춰준 거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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