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9

2015.05.26

캔버스에 붉게 펼쳐진 화가의 번뇌

연극 ‘레드’

  • 구희언 주간동아 기자 hawkeye@donga.com

    입력2015-05-26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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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버스에 붉게 펼쳐진 화가의 번뇌
    ‘색면 추상’이라 부르는 추상표현주의의 선구자 마크 로스코의 삶과 말을 무대에 재현한 2인극 ‘레드’가 2011년에 이어 다시 국내 관객을 찾았다. 올해는 ‘마크 로스코展’과 시기가 겹쳐 그 어느 때보다도 마크 로스코에 대한 관심이 높은 상태다. 연극 ‘레드’는 마크 로스코가 미국 뉴욕 시그램 빌딩 포시즌스 레스토랑에 걸릴 벽화 연작을 완성했다 갑자기 계약을 파기한 ‘시그램 사건’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무대에 펼쳐진 공간은 뉴욕에 있는 마크 로스코의 작업실. 로스코는 거액을 받고 고급 레스토랑 포시즌스에 걸 벽화를 작업 중이다. 로스코는 켄을 조수로 고용해 물감을 섞거나, 캔버스 틀을 짜고 만드는 단순한 일 외에도 청소와 식사 준비까지 시킨다. 시간이 지날수록 켄은 로스코가 상업적인 프로젝트를 수락한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고, 거침없는 질문을 쏟아내며 로스코를 자극한다.

    만약 작품이 로스코만의 1인극이었다면 관객은 쏟아지는 대사의 향연으로 미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가상의 인물인 젊은 조수 켄은 관객의 대리인이자 로스코와 대립하는 인물로, 작품에서 그리스신화 속 아리아드네의 실과 같은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로스코가 좋아하는 화가를 묻자 주저 없이 ‘잭슨 폴록’을 외치는 당당함은 작품에 신선함을 더한다. 켄은 로스코의 이야기를 자기 스타일로 해석하기도 하고, 이건 아니다 싶은 부분에서는 언쟁을 벌인다. 신구 세대의 대표 격인 두 사람이 맹렬하게 흰 캔버스를 붉은빛으로 물들이는 장면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땀을 뚝뚝 흘릴 정도의 격렬한 몸짓 뒤에 남은 것은 압도적으로 선명한 ‘레드’다.

    캔버스에 붉게 펼쳐진 화가의 번뇌
    로스코는 대사 양도 많고, 아집과 예술혼으로 똘똘 뭉쳐 있어 내공이 상당한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배역이다. 초연을 보고 먼저 출연 의사를 내비칠 정도로 작품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다는 마크 로스코 역의 정보석은 한 인터뷰에서 “30년 연기 인생에서 가장 힘든 배역이다. 관객으로서만 봤어야 할, 배우에겐 최악인 작품이다.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그러나 개연성 없는 대사가 많아 대본을 받아들고 바로 후회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배우가 힘들수록 관객은 편하다. 한명구와 정보석은 초연의 강신일에 이어 자신만의 로스코를 성공적으로 구축했고, 역시 만만찮은 대사를 쏟아내는 켄 역의 박은석과 박정복은 젊은 에너지로 활기를 더한다.

    사전 정보 없이 봐야 재밌는 작품이 있고, 공부하고 보면 더 재밌는 극이 있는데 이 작품은 후자에 가깝다. 피카소, 잭슨 폴록, 앙리 마티스, 로이 릭턴스타인, 앤디 워홀 등 시대를 넘나드는 다양한 화가의 이름과 작품이 언급된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화풍이나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정도만 알아도 작품을 즐기는 데 무리가 없지만, 관람 전 간략하게나마 각 화가의 대표작을 훑어본다면 극을 온전하게 몰입해 즐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5월 31일까지,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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