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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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찬가, 로마의 데카당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그레이트 뷰티’

  • 한창호 영화평론가 hans427@daum.net

    입력2015-05-18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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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찬가, 로마의 데카당스
    도시가 간혹 주인공을 제치고 영화 주역을 차지할 때가 있다. 이를 테면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고전 ‘로마의 휴일’(1953) 같은 경우다. 아름다운 스타들의 사랑 이야기도 매력적이지만, 그 사랑의 배경인 로마의 빼어난 자태는 영원히 관객의 기억 속에 남았다.

    이 영화를 통해 로마가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다면, 비단 스페인광장이나 콜로세움 같은 명승지의 시각적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는 비현실적인 사랑도 가능하게 만드는 도시의 여유와 자유 같은, 공기 속을 흐르는 신비한 기운이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그레이트 뷰티’(2013)는 영화의 일반적인 스토리는 거의 무시하고 그런 신비한 기운만을 노래한 ‘로마 찬가’다.

    한때 이름을 날린 작가였고, 지금은 과거 명성을 이용해 시답잖은 글이나 쓰는 젭(토니 세르빌로 분)이라는 60대 남성이 주인공이다. 그는 콜로세움이 눈앞에 펼쳐지는 로마 시내 한 고급주택에 살고 있다. 걸핏하면 파티를 열어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그러면서 자신의 사교력을 확인하는 세속적인 남자다. 그런데 젭은 65회 생일을 맞아 늘 그렇듯 밤샘 파티를 즐긴 뒤 새벽에 혼자 테베레 강변을 거닐다 이제부터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 타인의 기분을 맞추려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일들과 헤어지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과의 결별선언이자, 점점 다가오는 자신의 마지막 시간에 대한 준비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소렌티노 감독 특유의 데카당한(퇴폐적인) 분위기가 강조되기 시작한다. 그는 데뷔 때부터 현실과 환상 사이를 넘나드는 상상력으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과 자주 비교됐다. 두 감독 모두 고급스러운 코미디 감각으로 세상에 대한 발군의 풍자를 펼쳤다. 차이점이 있다면 펠리니 감독이 유머를 선호하는 반면, 소렌티노 감독은 권태와 추락의 데카당스에 탐닉한다는 것이다. 소렌티노 감독의 영화에는 노화, 질병,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늘 담겨 있다.

    젭은 ‘영원의 도시’ 로마, 다시 말해 ‘늙은 도시’ 로마를 천천히 걸으며 자신의 삶 모두를, 그리고 미래까지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레이트 뷰티’는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데카당한 소설 ‘밤 끝으로의 여행’(1932)을 인용하며 시작하는데, 영화는 소설처럼 로마 거리를 ‘여행’하며 젭이 펼치는 상상력을 묘사한다. 셀린은 ‘여행이 유용하다면, 오직 상상을 펼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젭은 로마를 바라보며 자기 마음속을 여행하는 것이다.



    젭은 아득한 청춘을 더듬고, 죽을병에 걸린 스트립걸과 짧은 사랑을 나누며, 천재인지 위선자인지 구분되지 않는 예술가들을 만나고, 살아 있는 성녀처럼 보이는 수녀에게서 종교의 진정성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여정은 ‘검은’ 바다 앞에서 젭이 첫사랑을 추억할 때 끝난다. 말하자면 영화의 모든 순간은 죽음을 앞둔 젭이 상상하고 기억한 것들이다. 소렌티노 감독은 느리게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이런 상상들을 ‘위대한 아름다움(그레이트 뷰티)’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늙은 도시’ 로마가 줄 수 있는 최고 미덕이라는 것이다.

    로마의 찬가, 로마의 데카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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