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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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와 라울, 59년 만의 악수

국교정상화 조건 놓고 동상이몽…갈 길 먼데 세월은 카스트로 형제 기다려주지 않아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uth21c@empas.com

    입력2015-04-20 11: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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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 남쪽 바이아 데 코치노스(Bahia de Cochinos), 영어로는 피그스 베이(Bay of Pigs · 피그스 만)라 부르는 이곳에 1961년 4월 17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훈련시킨 쿠바 망명자 1500여 명이 비밀리에 상륙했다.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정부를 전복하는 게 작전의 목표. 그러나 당시 쿠바 정부군은 이들 중 100여 명을 사살하고 1113명을 생포하는 대승을 거둔다. 쿠바 정부는 그해 12월 미국 정부로부터 530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과 이유식을 몸값으로 받고 포로들을 풀어줬다. 그 후 이 사건은 미국과 쿠바의 험악한 관계를 상징하게 됐다.

    54년이 흐른 지난 4월 11일 피델 카스트로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파나마 수도 파나마시티에서 열린 미주기구(OAS) 정상회의에서 기조연설에 나섰다. 그는 이 자리에서 피그스 만 침공 사건을 다시 한 번 거론했다. “10명의 전임 미국 대통령 모두가 쿠바에 빚이 있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빚이 없다”는 것이 그 골자. 오바마 대통령 역시 “미국은 과거의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며 미래를 보고 있다”고 화답했다.

    주도권 유지와 경제개혁

    이날 두 정상은 역사적인 비공식 회담을 갖고 악수를 나눴다. 미국과 쿠바의 국가정상이 회동한 것은 1956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풀헨시오 바티스타 쿠바 대통령의 회담 이후 59년 만이다.

    1959년 변호사 출신인 피델 카스트로가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인 체 게바라와 함께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린 이후 쿠바는 농지를 국유화하는 등 국가 정체를 공산주의 체제로 바꿨고, 자국 소재 미국 기업과 국민의 재산도 모두 몰수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61년 1월 쿠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했고, 이듬해에는 금수조치를 단행하는 등 철저한 봉쇄정책을 유지해왔다. 이에 맞서 쿠바는 중남미 좌파정권들의 구심점 구실을 하며 반미에 앞장섰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그동안 쿠바를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이유다.



    견원지간이던 양국 관계에 해빙이 시작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쿠바와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이후부터다. 오바마 행정부가 전임자들과 다른 결정을 내린 이유는 중남미에 대한 전략적 이해관계 때문. 중남미는 전통적으로 미국 ‘뒷마당’이라고 불려온 지역이지만, 21세기 들어 대부분 국가에서 좌파정권이 통치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이 점을 이용해 중남미 진출에 적극적이었다. 미국은 중남미의 주도권을 중국에 넘겨줄 경우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쿠바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중남미 주도권을 유지한다는 게 오바마의 의도인 셈이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가 정치·경제개혁 정책을 적극 추진한다면 제2의 미얀마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쿠바는 북한, 중국, 베트남 등과 함께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몇 안 되는 국가다. 물론 공화당과 미국에 거주하는 200만 명의 쿠바계 난민 및 그 후손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이러한 행보를 비판하고 있다.

    라울 카스트로 의장이 오바마의 손을 잡은 것은 자신이 야심차게 추진해온 경제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다. 카스트로 의장은 경제개혁을 적극 추진해왔지만 미국의 봉쇄정책이 계속되는 한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미국과의 국교정상화가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카드라고 본 것이다. 미국의 봉쇄조치가 해제되면 쿠바에 대한 미국 기업의 투자가 활성화하고 외국인의 투자도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간 쿠바의 돈줄이던 베네수엘라의 원조가 끊길 기미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의 95%를 원유 수출로 충당하는 베네수엘라는 최근 국제유가 하락으로 재정적자가 커지는 등 디폴트(채무 불이행) 직전까지 내몰린 상태다.

    남아 있는 줄다리기

    두 정상의 악수로 양국 관계는 크게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4월 14일 쿠바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로 최종 승인하고 의회에 통보했다. 카스트로 의장을 만나고 사흘 만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 것이다. 의회는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테러지원국 해제 결정에 대해 45일 이내에 찬반 견해를 밝힐 수 있으나 승인 권한은 없다. 미국은 1982년 스페인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ETA)와 콜롬비아 반군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쿠바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고 각종 제재조치를 취해왔다.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는 양국이 진행해온 국교정상화 협상의 최대 쟁점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쿠바에 요구해온 정치개혁과 인권개선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카스트로 의장이 “인권 문제를 미국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지만 압력에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해왔기 때문. 그는 미국과의 국교정상화가 가져올 후폭풍을 우려하는 듯하다. 카스트로 의장은 지난해 12월 20일 인민권력국가회의(의회) 연설에서 “미국과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급격한 체제 변동은 없을 것”이라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쿠바가 힘들게 지켜온 가치를 버릴 수는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가 이번 미주기구 정상회의에서 미국의 피그스 만 침공 사건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두 나라는 앞으로 진행될 국교정상화 협상에서 재수교 조건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일 것이 분명해 보인다. 카스트로 의장은 ‘쿠바의 덩샤오핑’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실용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해왔지만, 형 피델과 함께 구축해온 공산주의 체제를 수호하겠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라울은 피델보다 먼저 공산주의에 투신할 정도로 이념면에서는 강경파다. 피델이 “내 뒤에 나보다 더 강경한 사람이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라울은 그동안 반체제 인사들과 인권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일에도 적극 관여해왔다.

    라울은 피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봉쇄정책이 실패하자 오바마 대통령이 화해정책을 들고 나온 것이라 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처럼 경제 분야에서 개혁 정책이 성공한다면 쿠바의 현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다. 다만 남은 변수는 올해 83세와 88세인 라울과 피델 카스트로 형제의 시대가 석양처럼 저물고 있다는 점.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쿠바와 미국의 향후 관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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