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5

2015.02.09

“방위산업 관련 자문과 소송하고 싶어요”

인터뷰 l 법무병과 최초 여성 장군 출신 이은수 변호사

  •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입력2015-02-09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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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위산업 관련 자문과 소송하고 싶어요”

    23년 전 한국군 최초로 여성 법무관으로 입대한 이은수 변호사. 지난해 말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끝으로 전역했다.

    “한숨 돌리고 편안하게 시작하세요.”

    첫 여성 군법무관, 법무병과 최초의 여성 장군,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 인터뷰에 앞서 상상한 이은수(50) 변호사의 권위적일 것 같던 이미지가 따뜻한 말 한마디에 모두 날아갔다. 지난해 말 군 사법 최고기관인 고등군사법원장에서 내려와 2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친 이 변호사는 오히려 민간으로 나와 변호사로 첫발을 뗀 것에 대해 어색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군에서는 정해진 시간 동안 근무하면 됐는데 변호사는 24시간 업무의 연장으로 일해야 해 적응이 안 된다. 지난 일요일에는 교회 예배를 마치고 딸과 드라이브에 나섰다가 지하주차장에서 상담전화를 1시간이나 하는 통에 딸에게 한 소리 들었다”며 웃음 지었다.

    군법무관 40명 중 유일한 홍일점

    경북 구미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이 변호사는 평범한 농사꾼이었지만 자식 교육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던 부모 덕에 경북대 사법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시절 사법시험(사시)을 준비하던 그는 남자 선배가 지원서를 하나 더 작성하는 걸 보고 그게 뭐냐고 물었다.

    “그 선배가 ‘군법무관임용시험’이라고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변호사가 되는 길이 사시와 군법무관임용시험 두 가지였어요. 여자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모르겠다고 원서교부자에게 물어보라고 해서 찾아갔죠. 담당 공무원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아서 지원서를 제출했어요.”



    사시 1차와 군법무관임용시험 1차를 동시에 패스한 이 변호사는 일단 사시 2차를 치렀고 고배를 마셨다. 그는 동생들이 공부하려면 장녀인 자신이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 졸업 후 공부 대신 한국개발연구원(KDI) 입사를 선택했다. 그러나 동등하게 입사한 자신을 ‘미스 리’라고 부르는 남자 직원들과 사회생활을 계속해나가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다니며 군법무관 2차 시험을 준비해 1990년 합격했다.

    “군법무관 40명 가운데 유일한 여자였어요. 군에서도 처음 여자 법무관이 들어오니 교육시킬 방법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저 혼자 따로 국방부 여군학교에서 여군들과 교육받고 다시 사법연수원에서 2년 동안 연수를 받았죠. 10년 뒤 여성 군법무관 후배들이 들어왔을 때는 남자 동기들과 함께 교육받게끔 바뀌었어요.”

    이 변호사는 경남 창녕에 있는 제11군단의 군판사로 첫 부임했다. 이후 군검찰관과 국선변호장교 등을 거치며 민간에서의 판사와 검사, 변호사 업무를 모두 다뤘다. 어떤 일이 가장 적성에 맞았을까. 이 변호사는 “직책을 떠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이 가장 보람됐다”고 회상했다.

    “국선변호장교로 일할 때 군무이탈로 구속된 병사를 변호한 적이 있어요. 군대에서는 사소한 규율이라도 어기면 처벌받는데 구속까지 됐으니 병사의 부모가 걱정을 많이 했죠. 병사가 어렵사리 풀려났을 때 그의 부모가 굉장히 고마워하더라고요.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 값진 경험이었죠. 법무참모로 있을 때 여성 군무원이 중령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 피해를 당한 사건을 담당한 적이 있어요. 보통 실무자들이 조사하지만 피해자를 직접 만나야 사실관계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만나보니 겉으로 보기에도 부서질 것같이 연약한 여성이었어요. 그런 약자를 괴롭히고 싶은 심리가 어디서 나오는지 안타까운 마음에 철저히 수사했죠.”

    군 내 열악한 처우 개선에 기여하고파

    이 변호사는 굵직한 사건 수사에도 기여했다. 2008년 현역 육군 중위가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400억 원대 금융사기 행각을 벌여 전 군이 발칵 뒤집힌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이 변호사의 집요함이 없었다면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을 뻔했다. 당시 제2작전사령부 법무참모였던 이 변호사는 “예하 부대소속 중위의 행위를 지도방문 다녀오신 사령관님으로부터 관련 내용을 접하고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에 계속 문제제기를 했다”고 말했다.

    “육군 중위가 50% 이상의 수익을 내주겠다며 삼사관학교 동기 2명을 끌어들이고 군인들과 그 친인척, 민간인들로부터 3000만~4000만 원씩 건네받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형사법적으로 문제없는 것으로 보여 해당 부대에서 징계만 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자율이 그렇게 높을 수 없을 것 같아 육군본부 법무실에 문제제기를 하고, 고등검찰부장에게도 계속 계좌를 열어봐야 한다고 말했죠. 결국 영장을 받아 열어봤더니 수백억 원이 나왔고 해당 중위는 형사처벌받았습니다.”

    이 밖에도 이 변호사는 행정데이터베이스 구축 관련 뇌물사건, 장군 진급 관련 뇌물사건 등 군 내부 비리와 관련된 사건들을 처리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육군본부 법무실 고등검찰부장과 법무실장을 거쳐 법무병과 최초의 여성 장군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 변호사가 군법무관 임용 당시부터 높은 곳을 바라본 것은 아니다.

    “군법무관은 10년 의무복무를 채우면 전역할 수 있었어요. 주변에서 ‘더 있어 봐라.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고 했지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딱 10년 만에 여성 군법무관 5명이 제 후배로 들어온 거예요. 책임감 없이 혼자 나가는 것보다 남아서 이들에게 길을 열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일하다 보니 중령, 대령, 장군 등 계속 길이 열렸어요.”

    그동안 이 변호사는 군에서는 인정받는 장교, 집에서는 아내와 어머니 노릇을 동시에 해내야 했다. 지방 근무지에 머무르던 그는 남편과 아이를 보러 주말마다 장거리를 달려야 했고, 2007년 남편이 암투병을 할 때도 법제과장이라는 중책을 포기할 수 없어 짬을 내 간호해야 했다. 그는 “23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며 웃음 지었다.

    “보통 병과장을 끝으로 예편하는데 고등군사법원장까지 지내고 전역했으니 운이 좋았죠. 젊은 시절에는 보직 발령에서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니 혜택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장군이 되는 것을 평생소원이라는 분도 있는데, 저는 그 자리까지 올랐으니까요. 아직 젊은 나이라 군에서 나오니 아쉬움이 커요. 군에서 배운 바를 잘 활용해 방위산업 관련 자문을 하고, 방산 비리사건과 관련한 형사소송도 할 계획이에요. 무엇보다 제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밖에서 보기에는 병사들 처우만 열악한 것 같지만, 직위와 관계없이 열악한 상황에 처한 이가 많거든요.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큰 기쁨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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