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6

2017.07.12

국제

日 첫 여성 총리 청신호 켜졌다

도쿄도의원 선거 압승한 고이케 도지사…2020 도쿄올림픽 끝난 뒤 도전 예상

  • 장원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입력2017-07-10 16:4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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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말 집권 후 중·참의원 선거에서 4연승을 거두며 불패를 자랑하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도쿄(東京)도의원 선거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하며 코너에 몰렸다. 아베 총리를 무너뜨린 이는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65) 도쿄도지사다.

    7월 2일 선거에서 고이케 지사가 이끄는 도민퍼스트회는 자체 공천자 50명 중 49명이 당선됐다. 당선 직후 합류한 무소속 의원을 포함하면 127석 중 55석을 차지했다. 후보 전원이 당선된 공명당(23명) 등을 넣으면 고이케 지지세력은 79석으로 절반(64석)을 훌쩍 넘어 3분의 2에 육박한다.

    반면 집권 자민당은 후보 60명을 냈지만 23명만 당선됐다. 기존 의석(57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역대 최소 의석이던 38석(1965, 2009년)을 밑도는 대참패에 일본 정계는 경악했다.

    이번 선거는 한마디로 고이케 지사의 독무대였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8월 고이케 지사가 취임할 때부터 예고된 일이기도 했다. ‘투명한 행정’을 내건 고이케 지사는 취임 직후 도정개혁본부를 설치해 불투명한 도정과 낡은 관행에 거침없이 메스를 들이댔다. 2020 도쿄올림픽 개최 총비용이 3조 엔(약 30조 원)이 넘는다는 보고서를 공개한 후 신축 경기장 3곳의 건설 보류를 결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친정 자민당의 반발을 무릅쓰고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지던 쪽지예산도 없앴다. ‘의회 경시’라며 자민당 도의원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기희생도 과감했다. “공약을 지키겠다”며 자신의 급여를 절반으로 깎는 조례를 제출했다. 도의회는 개혁에 반대한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 통과시켰는데, 결과적으로 의원 급여가 도지사보다 많게 되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의원 급여도 20% 깎았다.
    신임 지사의 개혁적 언행에 도민은 열광했다. ‘고이케 극장(劇場)’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고이케 지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도의회 개혁’을 내세우며 도민퍼스트회를 만들어 선거에 도전했다.





    고이케는 누구? 기회주의자 vs 개혁가

    1952년생인 고이케 지사는 아랍어가 유엔 공용어로 지정된다는 말을 듣고 이집트로 유학을 떠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대학에서 일본인 유학생을 만나 20세에 결혼했지만 1년 만에 이혼했다.

    귀국 후 방송국에서 일하던 그는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등의 인터뷰를 성사시키며 주목받았고, 뉴스 앵커를 맡으며 인지도를 높였다.

    1992년 일본신당 소속으로 참의원 선거에서 처음 당선되며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이후 신진당, 자유당, 보수당, 자민당을 거쳐 ‘철새’라는 비판도 받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 때 환경상으로 발탁됐고, 아베 1차 내각(2006~2007)에서는 총리보좌관을 거쳐 첫 여성 방위상에 임명됐다.

    시련이 찾아온 것은 2012년이었다.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선두를 달리던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편에 섰지만 아베 총리가 역전, 당선한 것. 방위상까지 시켜줬는데도 라이벌을 지지한 그를 아베 총리는 외면했고 이후 비주류 길을 걸었다.

    와신상담하던 고이케 지사는 지난해 도지사 선거 공천을 받지 못하자 별도로 출마를 강행했다. 부족한 조직력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메웠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에 ‘녹색을 입고 모이자’는 글을 올려 유세장에 자발적인 ‘녹색 물결’을 만들었다. 그 결과 100만 표 이상의 압도적 차이로 당선됐다.

    고이케 지사는 개혁 이미지로 대중적 인기가 높지만 정계에서는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오자와 이치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 당대 권력자 편에 붙었다 상황이 바뀌면 재빨리 돌아섰기 때문이다. 다만 보수적인 일본 정계에서 여성 정치인으로서 생존의 길을 찾은 것뿐이란 반론도 있다.

    우익 성향도 강하다. 도지사 취임 후 “여기는 일본이고 도쿄”라며 전임자가 약속한 한국 학교 신설 계획을 백지화했다. 2005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2007년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채택을 저지하고자 미국까지 날아가 로비를 했다.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일본에선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도민퍼스트회의 승리가 아니라 자민당의 자멸’이라는 분석이 많다.

    실제로 아베 총리와 자민당 주변에선 선거 기간 내내 악재가 터졌다. 아베 총리는 ‘모리토모(森友) 학원 스캔들’과 ‘가케(加計)학원 스캔들’로 지지율이 30%대로 떨어졌고 대중의 반감 탓에 유세도 제대로 못 하는 처지가 됐다. 선거 직전에는 도요타 마유코(豊田眞由子) 중의원이 비서에게 폭언, 폭행을 일삼은 녹취파일이 공개됐다. ‘여자 아베’로 불리던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방위상은 정치 중립을 규정한 자위대법을 어기고 지지를 호소했다 사과하기도 했다.



    누구와 손잡나? 자민당 VS 야당

    고이케 진영은 자민당이 지지부진한 틈을 타 세몰이에 나섰다. ‘낡은 도정을 새로운 도정으로’ ‘도쿄 대(大)개혁’ 등 대중친화적 슬로건을 내세웠고 의원 공용차 폐지, 정무활동비 식당 사용 금지, 의사당 금연 등 구체적이면서도 체감할 수 있는 공약을 제시했다.

     “도쿄는 빠르다. 도정은 늦다. 도의회는 더 늦다” “지난 25년 동안 의원 제안으로 만들어진 조례가 1건에 불과하다” “보스정치가 횡행하는 낡은 의회는 필요 없다” 등 사이다 발언도 유권자의 공감을 샀다.

    도쿄도의회 선거가 정계 개편으로 이어진 사례는 적잖다. 최근에는 2009년 자민당이 선거에서 민주당(현 민진당)에 참패한 후 한 달 만에 정권을 넘겨준 전례가 있다.

    이번 선거에서 압승한 고이케 지사는 총리직을 노리고 있다. 그는 2008년 총리를 꿈꾸며 여성 최초로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장 총리직에 도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도민퍼스트회는 아직 지역정당이고 중앙무대에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미약하다. 고이케 지사는 2020 도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총리직에 도전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첫 관문은 내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정치세력을 얼마나 늘리느냐다. 선택지는 크게 2개다. 민진당 등과 야당 통합에 나서거나, 반대로 다시 자민당과 손잡는 것이다. 

    현재 지지율이 낮은 아베 총리는 내년 하반기까지 최대한 지지율을 끌어올린 후 중의원 임기(2018년 12월)가 끝나기 직전 해산할 것으로 예측된다. 아베 총리는 개헌 추진을 위해서라도 3분의 2 이상의 지지 의석을 당분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다.

    아베 총리는 또 내년 9월로 예정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3연임하고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포스트 아베’를 노리는 당내 주자들과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변수들을 감안하면 앞으로 고이케 지사에게 정치적 공간이 열릴 공산은 충분하다.

    고이케 지사는 선거 다음 날 예상을 깨고 도민퍼스트회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당분간 도정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수면 아래서 국정 진출 구상을 가다듬을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1년 또는 1년 반 동안 그가 정치적 역량을 얼마나 보여주느냐에 ‘일본 첫 여성 총리’의 등장 여부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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