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9

2014.12.29

소규모 저예산 영화 흥행 이변

포장 안 된 이야기…배우들 진한 감동에 관객 몰려

  • 배선영 텐아시아 기자 sypova@tenasia.co.kr

    입력2014-12-29 1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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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규모 저예산 영화 흥행 이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 중이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가 2014년 연말 극장가에서 한 편의 반전 드라마를 쓰고 있다. 2014년 한 해 다양성 영화라고 부르는 소규모 저예산 영화들의 흥행 이변이 속속 화제가 된 가운데 그 마지막 주인공은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차지했다. 강원도 시골에 사는 노부부의 80년 가까운 긴 시간 속에 쌓인 은은한 정과 사랑, 투덕거림, 그리고 이별 등을 담은 이 영화는 개봉 18일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하고, 24일 만에 200만 명까지 넘어서는 등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 중이다. 박스오피스 1위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모르던 세계적인 명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SF 블록버스터 ‘인터스텔라’의 꼬리를 잡아 내린 것도 바로 이 영화다. 현 기세라면 국내 독립영화 최고 흥행작인 ‘워낭소리’(293만 명)를 넘어설 것이 확실해 보인다.

    집념의 성공…상업영화에 귀감

    매끄럽고 덩치 큰 화제작들의 틈바구니에서 노부부의 선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독립영화는 상영 공간 확보 단계부터 멀티플렉스를 보유한 배급사가 투자해 만든 상업영화와의 싸움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최근에는 대형 배급사 CGV아트하우스(구 무비꼴라쥬)가 소규모 영화의 배급을 지원하면서 ‘한공주’(22만 명),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처럼 흥행 사례가 잦아졌다. 물론 일각에서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지만, 상업영화 중심이던 과거에 비해 관객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관객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상업영화와 결감부터가 다른 독립영화만의 매력에 눈을 뜰 수 있게 됐다. ‘인사이드 르윈’(10만 명),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10만 명),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80만 명), ‘그녀’(30만 명) 등은 모두 200개 이하 스크린에서 시작했으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입소문으로 이른바 ‘역주행 흥행’에 성공한 사례다.

    젊고 예쁜 배우의 로맨틱 코미디만 흥행할 수 있다고 판단한 상업영화의 물결 속에서 강원도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가 흥행에 성공하리라고 그 누가 생각했을까. 자막을 통해 전달될 만큼 투박한 노부부의 사투리와 그들의 얼굴에 깊이 새겨진 주름은 그 어떤 명배우의 명확한 딕션과 소름끼치는 연기보다 더 진한 감정을 선사했다. 이들의 소소하고도 아기자기한 하루하루가 전하는 감동 역시 그 어떤 드라마틱한 상황보다 짙은 감동을 전하는 데 성공했다.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결정적 차이는 결국 시선이다. 독립영화는 만듦새는 투박해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닳아 있지 않고 치밀해 신선한 맛을 준다. 상업영화는 거대 자본에 휘둘리다 보니 성공이 어느 정도 보장된 기획력으로 스토리를 포장할 수밖에 없다. 세련되게 잘 만들었으나 자본의 감시 아닌 감시하에서 매만져진 틀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인위적인 색채를 내뿜는다. 반면, 독립영화 하면 ‘암울하고 독하다’는 선입견이 존재하고, 그 선입견대로 많은 독립영화가 무거운 내용으로 관객 가슴을 짓누르지만, 판타지로 포장해 현실 도피성 위안을 안기는 상업영화와 달리 인생의 씁쓸한 단면까지 지독하게 파고들어 개운한 뒷맛을 안긴다.



    모두가 의심하는 가운데도 끝내 시도하는 실험성 역시 독립영화가 보여주는 주요한 미덕이다. 이들의 실험정신이 모두 대중에게 갈채를 받지 못한다 해도, 끈질기게 시도하는 정신이 결국 마이너가 보여주는 집념이며, 그 집념의 성공 사례는 늘 메이저에게 신선한 자극으로 작용한다.

    독립영화 출연 배우 성장세 뚜렷

    소규모 저예산 영화 흥행 이변

    2014년은 독립영화 출연 배우들의 성장세가 뚜렷했다. 독립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변요한, 최우식, 천우희(위부터).

    그런가 하면 2014년은 독립영화에 출연해온 배우들의 성장세가 뚜렷했다. ‘한공주’의 주연배우 천우희는 제35회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놀라움을 안겼다. 김희애, 손예진, 심은경 등 지명도가 월등히 높은 스타급 선배들과의 경쟁에서 아직 이름과 얼굴이 낯선 천우희가 이겼다. 천우희 역시 스스로도 믿기 힘든 수상 사실에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높은 시청률로 지상파를 능가하는 파워 콘텐츠가 된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미생’에서 주목받은 신예 변요한 역시 독립영화 관계자 사이에서는 일찍부터 이름난 배우였다. 그는 2011년 독립영화 ‘토요근무’로 데뷔해 이후 ‘목격자의 밤’ ‘세 개의 거울’ 등에 출연했고,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선과 악, 반항과 순응이 묘하게 교차하는 얼굴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눈에 띄는 재목이었다. 변요한은 첫 TV 출연작인 ‘미생’을 통해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자마자 스타라는 수식어와 함께 배우라는 인식도 확고히 해, 배우의 힘을 가진 신예라는 평가를 얻는 것에 성공한다.

    브라운관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배우 최우식은 독립영화 ‘거인’을 통해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김태용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가 담겨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결코 신파적이지 않은 이 작품에서 최우식은 드라마 속 빤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와는 달리 깊은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배우 처지에서 독립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비록 대중성은 보장받지 못한다 해도 어디서 본 듯한 전형적인 캐릭터가 아닌, 삶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새롭게 연기할 맛이 나는 캐릭터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내면을 깊이 파고 들어가는 연기가 요구되는 독립영화 속 캐릭터로 단련된 배우들이 연기 측면에서 눈에 띄는 성장을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 충무로에서 가장 환영받는 하정우 역시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독립영화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 영화를 연출한 윤종빈 감독과는 영화적 동지가 돼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군도 : 민란의 시대’ 등으로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매끄럽게 매만져진 ‘가공된 캐릭터’에 불과한 인물을 연기하기보다, 인생을 깊이 있게 표현하는 캐릭터를 독립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우 처지에서도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영역인 것은 분명하다. 독립영화에 오래 출연해온 한 배우는 “확실히 독립영화는 현실감 있는 내용이 주를 이루다 보니 배우 처지에서 고민할 부분이 더 많다”며 “상업영화와 비교할 때 호흡이 길어 연기 부분에서도 여유 있게 배워나갈 수 있다”고 전했다.

    상업영화를 매끄럽게 잘 깎인 성형미인에 비유한다면, 독립영화는 어딘지 툭툭 불거져 있으나 묘한 매력을 가진 자연인쯤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자연인이 뿜어내는 천연의 매력은 때로 성형미인에 질식된 사회에서 방부제 구실을 하기도 한다. 다양성 영화의 이례적이고도 꾸준한 흥행과 다양성 영화를 통해 배우로 인정받은 무서운 신예들의 등장이라는 2014년 영화계 지형도는 안전한 길만 가려 한 상업영화에 찬물을 끼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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