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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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해킹, 평양은 왜 선을 넘었을까

‘최고존엄’ 충성 경쟁, 핵 자신감, 6·25 비체험 세대의 도발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4-12-29 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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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 실제로 북한이 했는지 안 했는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앞으로의 상황 전개에서 중요한 건 워싱턴이 북한 소행이라고 확신한다는 점이고, 미국 본토에 공격을 가한 최초 사례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김정일 시대의 평양은 거칠지만 영리했던 반면, 김정은 시대의 평양은 무모하고 어리석다는 판단이 확고히 자리 잡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14년 12월 19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소니픽처스 엔터테인먼트 해킹을 북한의 소행으로 공식 발표한 직후 미국의 한 싱크탱크 관계자가 남긴 말이다. 북한이 ‘최고존엄’이 얽힌 문제에 대해 비상식적으로 과민하게 반응한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기 전인 2012년 이전에는 미국에 대해서만큼은 사뭇 결이 달랐다는 것. 오바마 대통령의 전례 없이 단호한 태도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 본토 공격 최초 사례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풀어보자. 국가 혹은 최고지도자의 위신을 유지하고 과시하는 일이 북한의 대외전략에서 매우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음은 그간 충분히 확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북한의 도발을 모두 되짚어보면, 이러한 특성은 그 대상이 미국이냐 한국이냐에 따라 미묘하게 엇갈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은 1994년 ‘서울 불바다’ 등 다양한 발언을 통해 반복적으로 남한을 위협해왔고, 87년 대한항공 폭파 사건이나 2010년 연평도 포격 등을 통해 실제로 공격을 실행하기도 했지만, 2012년 이전에는 미국 국민 또는 자산, 영토를 상대로 직접적인 군사 행동으로 위협하거나 감행한 경우는 한 차례도 없었다. 2000년대 이후 누가 봐도 미국을 목표로 하는 것이 분명한 장거리로켓 발사와 대륙간탄도탄(ICBM) 기술을 축적하는 과정에서조차 ‘평화적 우주개발을 위한 인공위성 발사’라는 명분을 내세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암묵적인 원칙은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무너지기 시작했다. 2013년 봄 미국을 향해 쏟아낸 ‘워싱턴 불바다’ 발언이 그 첫 번째였다. 북한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가 화염에 휩싸인 뉴욕과 성조기 이미지가 포함된 동영상을 인터넷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올렸던 게 그해 2월 6일이었고, 한 달 뒤에는 “지난날과는 완전히 달리 다종화된 우리 식의 정밀 핵타격 수단으로 서울만이 아니라 워싱턴까지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는 인민군 고위관계자의 말이 북한 언론에 공개됐다.

    말의 상승 효과가 행동으로 이어진 것일까. 소니픽처스에 대한 해킹이 평양 작품이라면 이는 미국을 상대로 ‘실제 행동’을 벌인 최초 사례가 된다. 인명피해를 낳지 않는 사이버 공격이라는 점에서 평양은 다르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워싱턴이 받아들이기에 이번 사건은 그 정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FBI가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민간 부문(private sector)과 그에 종사하는 일반 시민들(ordinary citizens)을 대상으로 한 공격’을 강조한 배경이고, 해외 전문가 사이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전에 북한이 갖고 있던 공세와 물러서기의 선(線)을 넘어선 매우 특이한 케이스’. 이런 특징 때문에 FBI의 공식 발표 이후에도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을 북한 소행으로 단정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는 반론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미국의 한 IT(정보기술) 전문매체는 해커와 동일한 이름을 사용한 발신자가 사건 수일 전 소니픽처스 최고위 임원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내용의 e메일을 보냈다며 전문을 공개한 바 있다. 시간순으로 따지면 소니픽처스 측이 이 요구를 무시하자 해킹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 이는 북한의 도발과는 패턴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도 섣불리 못 건드려 계산

    소니 해킹, 평양은 왜 선을 넘었을까

    2013년 2월 북한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일부. 뉴욕과 성조기가 불타는 모습이 미국 내에서 큰 반발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최근 수년간 평양의 달라진 사고방식이 이 ‘최초의 사건’을 낳았다는 분석이 훨씬 우세하다. 첫 번째 근거는 ‘최고존엄’ 문제에 대한 북측 태도가 권력승계 과정마다 엄청나게 강경해지곤 했다는 점. 이 용어가 북측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4년으로, 김일성 주석 사망에 즈음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승계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였다. 더욱이 이 말이 본격적으로 북한 관영언론을 뒤덮기 시작한 것은 김 위원장의 건강 악화와 3대 승계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2010년부터였다. ‘노동신문’에만 그해 1월부터 김 위원장 사망 시점까지 총 800여 차례 등장할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평양이 권력승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지도자의 존엄을 지켜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논리를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물리적 군사력이 열세라 해도 애국심이나 충성 같은 정신적인 자산을 활용해 훨씬 더 강력한 군대를 만들 수 있고, 이러한 정신적 자산의 원천은 바로 최고지도자라는 것. 결국 최고지도자 한 사람의 위신과 존엄이 훼손되면 이는 물리적 군사력의 약화로 직결되므로 국가 전체의 안보도 흔들린다는 게 이 시기 북한 매체들이 반복적으로 설파해온 논리구조였다. 3대 승계 정당화를 위해 몰두해온 ‘최고존엄’ 집착이 ‘미국을 직접 건드리지 않는다’는 이전 시기의 원칙을 어기게 된 근본 이유라는 분석이 가능해진다.

    핵과 장거리로켓 기술이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자신감도 평양이 선을 넘게 된 또 하나의 배경으로 꼽힌다. 따지고 보면 김정일 시대 북한이 섣불리 미국 국민이나 영토를 위협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은 이유는 ‘미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공산이 크다는 것. 남한은 도발을 감행해도 쉽게 보복할 수 없을 테지만, 미국은 자칫 평양을 잿더미로 만들 능력과 의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워싱턴 불바다’ 발언이 장거리로켓 은하3호 발사 성공과 3차 핵실험을 통해 핵 능력을 일정 수위 이상으로 끌어올린 시점에서 나왔다는 점은 이런 각도에서 보면 의미심장하다. 미국 본토를 핵무기로 타격할 수 있게 됐다는, 이제는 미국도 우리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섣부른 계산이 깔려 있으리라는 뜻이다. 물론 이 역시 미국의 압도적인 핵 능력과 아직 초보 단계인 북한의 ICBM 기술을 감안하면 비상식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김정은 본인은 물론 최근 수년간 권좌에 오른 북한의 정책결정그룹 핵심 구성원은 대부분 6·25전쟁에 대한 기억이 없는 세대다. 최룡해 조선노동당 비서가 1950년생,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이 49년생, 이영길 총참모장이 55년생,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49년생이다. 42년생이던 김정일 위원장을 포함해 이전 시기 정책결정자 대부분이 유소년 시절 미국의 압도적인 공중폭격 능력에 나라 전체가 초토화되는 모습을 체험했던 것과는 다르다. 더욱이 김정은은 아버지가 조선인민군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인물로 지목했던 이영호 총참모장(42년생)을 숙청하는 등 세대교체에 열을 올려왔다. 요컨대 지금 평양 수뇌부에는 ‘미국의 무서움’을 말할 인물이 없다는 뜻이다.

    소니픽처스 해킹이 작은 출발점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우려는 이 대목에서 비롯된다. 이전 시기의 북한은 1968년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이나 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등 미국과의 대립구도에서 결국은 꼬리를 내리곤 했지만, 김정은과 ‘새로운 세대’가 이끄는 북한은 남한을 두려워하지 않듯 미국도 두려워하지 않는 셈이다. 권력승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최고존엄’ 집착이 이제부터는 대미(對美)관계에서도 전혀 다른 행동 패턴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철없는 지도자의 다음 선택 궁금

    ‘비례적 대응(proportional response).’ 오바마 대통령이 소니픽처스 해킹 사건에 대한 응징 방침을 밝히며 사용한 용어다. 국제법상 자위권 원칙의 골자를 이루는 이 말은 상대에게 입은 피해만큼 되갚아주는 행동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취지다. 그러나 당초 오바마 대통령이 공언했던 테러지원국 재지정은 실효성 문제와 법적 절차에 걸려 사실상 좌절됐다. 이미 다양한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데다, 1970년대 만들어진 미 행정부의 ‘낡은’ 관련 규정에 따르면 물리적 피해가 없는 사이버해킹을 테러에 포함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반면 북한 국방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오바마가 선포한 ‘비례성 대응’을 초월해 백악관과 펜타곤, 테러의 본거지인 미국 본토 전체를 겨냥한 초강경 대응전을 벌일 것”이라고 되받고 나섰다. ‘일천배 피의 복수’라는 말로 상징되는, 당한 것보다 훨씬 강경한 보복만이 자신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북한 특유의 군사전략 DNA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문장이다. 확전(擴戰)에 대한 양측 시각이 다를 때야말로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는 국제정치학의 기본공식에 새삼 눈길이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선순위와 목적이 다른 국가 사이에서 충돌이 한층 더 쉽게 발생하는 까닭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북한의 인터넷망이 연거푸 다운되고 미국이 NCND(neither confirm nor deny·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하는 지금, 철없는 젊은 지도자와 충성 경쟁에 분주한 권력 엘리트들의 다음 선택은 무엇일까. 역사는 어쩌면 2014년 12월의 소니픽처스 해킹을 파국의 서막으로 기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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