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9

2014.12.29

‘제’ 아닌 ‘쟤’로 둘러대고 ‘잘못’ 아닌 ‘미안’ 역효과

‘땅콩회항’ 사과 일파만파…첫 단추 잘못 꿰어

  •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hoh.kim@thelabh.com

    입력2014-12-29 0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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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아닌 ‘쟤’로 둘러대고 ‘잘못’ 아닌 ‘미안’ 역효과

    ‘땅콩회항’ 사건의 당사자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잠시만 이 글을 읽는 우리가 거대 재벌 항공사의 딸이라고 상상해보자. 나이는 마흔이며 부사장인 내가 2014년 12월 5일 그 유명한 ‘땅콩회항’을 저질렀다. 별문제 없을 줄 알았던 이 사건이 12월 8일 언론을 통해 급속도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 소식을 들은 나도 당황했을 것이다. 아직 어떤 공식 사과나 입장을 내놓지 않은 상황이라고 가정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사과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실수나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라면, 자신의 판단을 자동으로 의심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라면 이런 경우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과학적으로 매우 낮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우리 뇌의 컨트롤타워인 전두엽(이마 바로 뒤에 위치·이마엽)이 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땅콩회항처럼 자신이 잘못을 저질러 비난의 대상이 되고 스트레스가 높아진 상황에서는 전두엽이 아닌, 감정과 관련된 편도체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어려워진다. 그럼 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힘들어지고 방어적이 된다. 그 결과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순진한 판단을 하게 된다.

    ‘무늬만’ 사과에 더 분노

    사과를 제대로 하려면 일단 외부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땅콩회항 사건에서도 보듯, 실제 피해자나 여론은 사과문 하나로 진정되지 않는다. 큰맘먹고 대기업 오너 회장과 딸이 사과했지만 왜 역효과가 났을까. 시민들은 ‘높은 사람’의 공개 사과를 보면서 사과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당사자가 정말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사과하는 것인지에 주목한다. 신문에 사과문을 내고 카메라 앞에 나와 사과를 하는데도 정작 당사자에게서 반성하는 빛이 보이지 않으면 사과를 받고도 더 분노하게 된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몇 차례 공개적으로 언급했지만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애매한 방법으로, ‘무늬만’ 사과를 했기 때문이다.

    2010년 미국 CNN은 ‘완벽한 사과를 하는 법’이란 보도를 했다. 여기서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흙 한 주먹 정도라면 이를 산처럼 크게 만들라고 강조했다. 즉 잘못을 축소하려 하지 말고 과장하라는 것이다. 사과 주체가 자기 잘못을 크게 부풀릴 때 여론이나 피해자는 “저 사람이 그래도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아는가 보군” 하면서 일종의 안심을 하게 된다. 그렇게 했다가 법정에서 불리해질 수도 있다고 걱정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땅콩회항 사건에서 보듯 자기 잘못을 축소하면 오히려 여론이 악화하고, 각종 수사가 더 강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사과를 회피하거나 잘못된 사과를 하는 건 오히려 정상참작의 여지를 스스로 줄이는 셈이 된다.



    사과를 제대로 하고 싶다면 “미안합니다(I am sorry)”가 아닌 “제가 잘못했습니다(I was wrong)”라고 ‘쿨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을 통해 땅콩회항이 알려진 2014년 12월 8일은 위기관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초기 사과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제(부사장)’가 아닌 ‘쟤(사무장)’가 잘못했다고 둘러댔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른 후 잘못된 초기 사과로 여론이 더 악화하면, 그 후 아무리 강도 높게 다시 사과해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가 12월 8일 대한항공의 첫 번째 사과문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첫 사과문을 질적, 양적으로 분석해보자. ‘승객분들께 불편을 끼쳐드려 사과드립니다’로 시작하는 이 사과문은 총 134개 단어로 구성돼 있다. 잘못을 저지른 상황에서 어떻게 공개 사과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세 가지 A를 강조한다. 사과(apology), 해명(apologia), 조치(actions). 대한항공의 사과문을 보면 사과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음이다.

    ‘승객분들께 불편을 끼쳐드려 사과드립니다. 비상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승무원을 하기시킨 점은 지나친 행동이었으며, 이로 인해 승객분들께 불편을 끼쳐드려 사과드립니다.’

    신문 사과문 조현아 직책, 이름 없어

    ‘제’ 아닌 ‘쟤’로 둘러대고 ‘잘못’ 아닌 ‘미안’ 역효과

    ‘땅콩회항’ 사건과 관련해 2014년 12월 12일 열린 기자회견 에서 딸 대신 사과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총 26개(19%) 단어다. ‘항공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라는 표현에서 주어를 부사장이 아닌 항공기로 해놓은 것은 법적인 고려인 듯한데, 누가 봐도 어색하며 잘못을 비켜가기 위한 주도면밀한 사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해명에 해당하는 부분은 87개(65%) 단어에 해당한다. 위기관리 컨설팅 경험에 따르면, 해명에 해당하는 부분이 양적으로 보통 25%를 넘으면 뻔뻔한 사과로 들린다. 그나마 해명도 제대로 했을 때다. 이번 사과문에서는 사무장이 ‘규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변명과 거짓으로 적당히 둘러댔다’고 몰아세웠고, 조현아 전 부사장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밝혔으니 양적, 질적으로 모두 뻔뻔한 사과가 될 운명이었다.

    마지막으로 조치에 해당하는 부분은 21개(16%) 단어로, 사안의 핵심인 부사장 잘못과는 거리가 먼 ‘서비스 질을 높이고 승무원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실패한 부분이다.

    사과는 간을 보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과문을 띄운 뒤 일부 직책에서 물러났다가, 여론이 악화하자 직접 나서고 또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고…. 사과 횟수를 늘리면서 내놔야 하는 해결책은 점점 커지지만 이처럼 간을 보면서 하는 사과는 효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위기대응 전략을 최악의 시나리오에 기반을 두고 짜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사과 순서에서도 거꾸로 갔다. 회사 사과문 발표→조양호 회장→조현아 전 부사장 순으로. 사과해야 한다면 잘못한 주체가 먼저 나서는 것이 맞다. 대상도 직접적인 피해자인 사무장과 승무원을 먼저 만나 개인적으로 사과하고, 공개 사과로 가는 것이 맞다.

    사과도 눈치가 필요하다

    2014년 12월 16일 각 일간지에 발표한 사과문이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는 당사자인 조 전 부사장의 이름이나 직책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과문에는 대한항공 로고도 없는데, 이는 브랜드에 미치게 될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한 결과였을 개연성이 높다. 1990년대만 해도 일부 글로벌 기업의 위기관리 지침 중에는 위기사고가 발생하면 회사 로비에 있는 로고를 거대한 천으로 가리게 하는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언론사 카메라에 부정적 사건과 로고가 연관돼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소셜미디어 시대에는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차라리 쿨하게 회사와 리더의 이름을 노출해 진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맞다.

    우리가 대한항공 부사장의 동생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맞을까. 조현민 전무가 12월 17일 자신의 부서 직원들에게 보낸 반성문이 또다시 여론을 악화시켰다. 조 전무는 대한항공 마케팅팀 소속 직원들에게 보낸 e메일에서 ‘누가 봐도 전 아직 부족함이 많은, 과연 자격이 있냐 해도 할 말이 없다’면서 ‘하지만 마케팅이란 이 중요한 부서를 맡은 이상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전 이유 없이 마케팅을 맡은 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유연한 조직문화, 지금까지 회사의 잘못된 부분들은 한 사람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여기에서 반성문 말미에 ‘모든 임직원의 잘못입니다’라고 적은 것이 문제가 됐다.

    ‘제’ 아닌 ‘쟤’로 둘러대고 ‘잘못’ 아닌 ‘미안’ 역효과

    2014년 12월 17일 사내 직원에게 보낸 e메일 사과문으로 논란을 재점화한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

    조 전무 처지에서는 ‘저부터 반성합니다’라고 쓴 것은 보지 않고, 엉뚱한 부분을 공격한다고 억울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론과 언론은 이번 사건이 터지자 조 전 부사장뿐 아니라 오너 일가의 과거 부적절한 행동을 지적하며 일가 전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역시 눈치는 중요하다. 오너 일가 때문에 고생하는 임직원들이 ‘모두 잘못했다’는 표현을 일반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 생각해봤다면 그런 반성문을 ‘대담하게’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실수나 잘못을 스스로 쿨하게 인정하기는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다. ‘사과 솔루션’을 쓴 정신의학과 교수 아론 라자르가 ‘사람들은 사과를 나약함의 상징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과의 행위는 위대한 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조 전 부사장도 지금쯤 사고 이후 상황을 돌아보면서 ‘차라리 처음부터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 것을…’ 하고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상황을 악화하지 않고 제대로 사과할 수 있었을까.

    리더라면 자신과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없으면서 외부 시각에서 직언할 수 있는 조언자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 전문가일 필요도 없다. 지혜로운 선배나 친구도 좋다. 그리고 뭔가 실수하거나 잘못했다면 일단 이들에게 연락하라. 제삼자의 처지에서 내 상황을 바라보다 보면 좀 더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될 테고, 피해자에게 좀 더 다가서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쯤 돼야 우리는 좀 더 ‘눈치 있는’ 사과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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