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5

2014.09.22

‘제2외국어’ 푸대접, 해도 너무해

수능 필수 아니라 교과과정서 거의 퇴출 수순…글로벌 시대 역행 지적 이어져

  • 김지은 객원기자 likepoolggot@empal.com

    입력2014-09-22 1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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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어 수업이 무척 재밌어서 2학년 때까진 따로 일본어 교재를 보면서 공부도 하고, 일본어 동아리 활동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엔 일본어 시간에도 수업을 안 해요.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 공부를 해야 하니까. 선생님이 들어와서도 자습하라 하고….”

    서울 양천구 목동고 3학년 박모 양은 장래희망이 일본어 교사였다. 그런데 고3이 되자 꿈이 영어 교사로 바뀌었다. 교육과정이 개정될 때마다 가뜩이나 이리저리 휘둘리던 제2외국어 수업이 앞으로는 아예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 때문이다. 박양 부모는 물론이고 진로상담을 하던 교사도 일본어 교사가 되고 싶다는 박양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시험문제가 정말 쉽게 나오는데도 점수 편차가 엄청나요. 다른 과목 성적이 좋은 친구 중에도 일본어 철자조차 모르는 애들이 꽤 있어요. 수능에 안 나오니까, 그 시간엔 아예 자거나 딴 과목을 공부하는 거죠. 저처럼 일본어를 좋아하고 재밌어 하는 친구는 조금만 공부해도 성적이 잘 나오니까 기분 좋았지만요.”

    학교에 따라 0시간 될 수도

    지난 2년 동안 전국 일본어 교사 임용 인원은 0명. 다른 제2외국어 과목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9월 12일 ‘2015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총론 주요 사항 공청회에 다녀온 제2외국어 교사들은 분노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숱한 언론 투고와 교육부 장관 면담, 성명서 발표는 물론이고, 거리에서 전단지까지 돌려가며 제2외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호소해왔지만 국가교육과정개정연구위원회(연구위원회)에서 내놓은 안에는 자신들의 주장이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9월 24일 발표될 총론 시안에서 제2외국어는 생활교양 영역으로 편재돼 학교에 따라 수업이 영영 사라질 수도 있다.

    연구위원회가 작성한 2015 교육과정 개정의 주요 내용과 방향에 관한 발표 자료에는 제2외국어 수업에 대해 “기술가정, 제2외국어를 교과별로 분리하고 교과별로 별도의 이수 단위 수를 배정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문제점 지적과 반대의견이 많아 학생과 학부모 의견을 반영한 추가 논의 필요함”이라고 간략히 기술돼 있다. 추가 논의가 필요하지만 기술가정, 교양, 한문 등과 함께 생활교양 영역으로 묶여 있는 제2외국어 수업을 별도의 독립 영역으로 분리하거나, 영어와 함께 외국어 영역으로 분류해달라는 제2외국어 교사들의 요구는 수용하기 곤란하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제출된 안대로라면, 제2외국어는 학교 재량에 따라 16단위, 즉 전체 3년 과정 중 1주일에 8시간 안에서 다른 생활교양 영역 과목들과 수업을 나눠 진행해야 한다. 학교에 따라 0시간이 될 수도, 8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제2외국어가 교과과정에서 내몰리는 가장 큰 이유는 수능 필수과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로운 과목이 하나 둘씩 개설될 때마다 배점이 가장 큰 국어, 영어, 수학의 수업단위는 그대로 둔 채 나머지 과목에 배정된 시간을 쪼개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제2외국어 수업 역시 그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생활교양 영역에 논술을 편재하겠다는 말까지 있어 담당 교사들의 불안은 더 커졌다. 수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과목이 생활교양 영역으로 분류되면 가뜩이나 몇 시간 안 되는 수업 배정 시간을 고스란히 논술에 내줘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2외국어 교사들은 유독 영어만 독립 과목으로 분류하고 다른 외국어는 생활교양 영역에 포함하는 기형적인 분류 방법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다. 지나치게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학생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 교육부 측 설명인데, 국·영·수 외 다른 과목들을 무조건 배제하고 외면하는 것이 학생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일까요. 게다가 이번에 개정되는 2015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이 적용되는 것은 현재 초등 6학년 학생부터입니다. 교육부에서 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제2외국어 교육이 부담이냐 아니냐를 물어본 것도 아닌데 학생들 핑계를 대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서울일본어교육연구회 모임에서 만난 서울 마포고 일본어 교사 이영환 씨는 국·영·수에만 집중한 현재의 교육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지 않은 채 다른 과목들을 들러리 세워놓고 교사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연구회 모임에 참석한 다른 교사들도 “오히려 모든 학생이 지금처럼 자신의 개성과 재능, 취향을 존중받지 못하고 국·영·수에만 다걸기 해야 하는 교육구조가 학생에게는 더 부담이다” “제2외국어 교사들이 수업을 열심히 하면 왜 학생들에게 자습시간으로 내주지 않느냐는 교장의 지적을 받게 된다” “교사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부심과 자긍심마저 빼앗긴 기분이다” 등의 불만을 토로했다.

    ‘제2외국어’ 푸대접, 해도 너무해
    세계와 소통하는 데 반드시 필요

    지난해 6월 제2외국어교육 정상화추진연합과 전국 한문교육과 한문학과 교수협의회는 성명을 통해 2009 개정 교육과정이 “본래 취지와 다르게 국·영·수 몰입 교육을 심화하고 ‘생활교양’ 영역에 편입된 교과의 파행을 가속화했으며, 교원 수급의 불균형과 갈등을 야기하고, 꿈을 잃은 학생들의 좌절과 폭력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 또 “제2외국어 교육은 글로벌·다문화 시대를 이해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인재 육성의 발로가 될 수 있고, 한문 역시 인성 함양, 동아시아 국가 간 이해와 교류 증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선진국에서는 대부분 제2외국어 교육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스위스, 스웨덴, 핀란드, 네덜란드 등 제2외국어는 물론 제3외국어 교육까지 폭넓게 시행하는 국가도 적잖다. 심지어 자국어에 대한 자긍심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조차 제3외국어 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2003년 7~9월 제2외국어교육정상화추진위원회가 전국 55개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90% 이상이 영어와 제2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고 답했으며, 89%가 경력사원 선발 시 제2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재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제2외국어 교육은 여전히 입시제도에 떼밀려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황규호 국가교육과정개정연구위원(이화여대 교수)은 현 개정안에 대해 “절대 제2외국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취지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모든 교과과정이 학생에게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배우고 익히라고 강요할 수도 없으니 학생에게 선택권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해나가는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교과과정을 영역별로 묶은 데는 그 안에서 학생들이 선택적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는 취지를 포함한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는 또 “수업단위 배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교과과정 간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려면 입시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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