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1

2014.03.31

“덜 주세요” 비싸게 사는 게 진짜 인심

재래시장

  •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 trendhitchhiking@gmail.com

    입력2014-03-31 1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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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 주세요” 비싸게 사는 게 진짜 인심

    영국 런던 시민과 여행객 사이에서 질 좋은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시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런던 버러마켓.

    재래시장에서 사치라니, 말이 되는 소린가 싶을 거다. 우리에게 재래시장은 값싼 마켓의 대명사 아니던가. 어차피 여기서 말하는 사치 또한 작은 사치다. 비싸지 않은 재래시장에서 크지 않은 사치를 해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겠나.

    처음부터 밝히면 나는 재래시장 예찬론자다. 재래시장을 서민의 값싼 시장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만 가다 선거철만 되면 재래시장을 찾는 이도 솔직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가 오히려 재래시장 이미지를 망친다.

    나는 1년에 40~50번은 재래시장에 간다. 5년 전부터 그랬다. 재래시장이 힘없이 사라지는 걸 두고만 보지 않으려고, 2030이 넘치는 재래시장을 꿈꾸며 나부터 실천해보자고 시작했다. 재래시장에 대한 어릴 적 향수가 커서이기도 하고, 재래시장이 살아야 지역 상권과 서민의 경제 자립 기반이 확보된다는 이유도 컸다. 그렇게 익숙하던 대형마트를 버리고 재래시장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단골 재래시장은 서울 영천시장과 남대문시장이고, 가끔 통인시장에도 간다. 남대문시장은 걸어서도 갈 거리고, 독립문에 있는 영천시장도 산책 삼아 가면 걸어서도 가지만 장보러 갈 때는 차를 가져간다. 요즘 주차가 불편한 재래시장은 거의 없다.

    재래시장에만 있는 것들



    그렇다면 어떻게 재래시장에서 작은 사치를 누릴까. 먼저 재래시장에 대한 오해부터 풀고 넘어가자. 재래시장은 왜 서민 시장으로 각인됐을까. 대형마트처럼 재래시장에도 천막을 쳐 지붕 만들고 주차장 만들고 카트 가져다놓으면 경쟁력이 살아날까. 우리가 유독 현대화한 마켓 형태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재래시장 가치를 폄하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1276년 문을 연 영국 런던의 대표적 식자재시장 버러마켓은 미식가의 필수 코스다. 현지인은 물론, 여행객에게도 사랑받아 소위 ‘미어터진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아주 깨끗한 이미지는 아니고, 물건이 싸지도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싸구려를 파는 재래시장이 아니다. 사실 서구에서 재래시장이 갖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좋은 먹을거리, 전통 있는 수제품을 파는 곳이라는 것이다.

    미국 뉴욕 첼시마켓도 비싸고 좋은 먹을거리를 파는 곳으로 빠지지 않는다. 오레오로 유명한 과자공장 건물 1층을 동굴처럼 길게 터서 만든 첼시마켓은 뉴욕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형 식자재 시장이다. 지금 건물 주인은 구글이고, 다양한 회사가 입주한 오피스빌딩이 됐지만 1층은 흥미롭게도 재래시장 형태를 띠고 있다. 이곳의 특정 가게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백화점과 고급 식품매장에 비싼 브랜드로 진출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프랑스 파리, 스페인 바르셀로나, 일본 도쿄 등 세계적 도시 한복판에는 젊은 사람도 많이 찾는, 장사가 잘되는 오래된 시장이 있다. 재래시장이 싸구려 공산품이 아닌 좋은 먹을거리와 수제품 위주로 재편한다면 대형마트나 백화점과 차별화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증거다. 그렇게 된다면 재래시장에서 작은 사치를 누리는 일이 아주 당연해질 것이다.

    대형마트에는 없고 재래시장에만 있는 것들도 있다. 가까운 지역에서 재배한 지역 농산물과 제철 산나물을 구하기엔 재래시장이 제격이다. 대형마트나 백화점의 경우 안정적인 납품이 필요해 좀 더 예쁘게 생기고 많은 양을 재배할 수 있는 물건이 들어간다. 할머니가 소일거리 삼아 뜯은 봄나물은 재래시장에만 있는 셈이다. 대형마트에 있는 봄나물은 봄나물이어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냉이와 달래 같은, 자연이 아닌 사람이 키운 것들이다. 농수산물의 경우 소량화, 지역화한 물건이라고 해서 결코 품질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재래시장에 가려면 우리 안목부터 다듬어야 한다. 번듯한 건물과 화려한 조명, 편리한 현대식 시설이 아닌, 그 안에서 파는 물건 자체를 판단할 안목이 필요한 셈이다.

    아울러 재래시장에서는 좀 더 신선하고 풍부한 물건을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노량진 수산시장과 마장동 축산물시장이다. 마장동 축산물시장은 수도권 육류 공급의 60~70%를 담당하는데, 3000개 넘는 점포에 1만 명 이상이 종사한다. 연간 유동인구는 200만 명으로 단일 육류시장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렇게 크고 흥미로운 공간이 또 어디 있으랴. 해외여행 가도 못 보는 공간이다.

    싼값에 좋은 식재료 구매

    “덜 주세요” 비싸게 사는 게 진짜 인심

    재래시장은 가까운 지역에서 재배한 농산물과 제철 산나물을 사기에 좋은 장소다.

    그곳에 가면 싼값에 좋은 식재료를 구하기 좋다. 좋은 재료를 구하는 건 식탁의 사치 정도를 가늠하는 핵심이다. 참고로 나는 요리를 꽤 잘한다. 그만큼 식재료에 대한 이해도도 높다. 재래시장을 좋아하면서 신세계의 SSG 푸드마켓처럼 프리미엄 식자재 마켓도 좋아한다. 그러니 감정적으로 재래시장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가끔은 일부러 재래시장과 대형마트, 백화점에서 같은 식재료를 사와 비교도 해본다. 재래시장 상품이 질 측면에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같은 물건이 어떤 장소에서 팔리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재래시장에 가서 호기롭게 제일 비싼 것을 사보자. 그래봤자 백화점 물건 값에 못 미친다. 재래시장에서 최고 물건을 사도 백화점을 기준으로 보자면 좋은 물건을 아주 싸게 산 경우가 된다.

    내가 재래시장에서 하는 가장 호기로운 사치는 ‘덜 주세요’이다. 덤을 달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덜 달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는 시장 상인으로부터 나는 최대한 비싸게 물건을 사려 애쓴다. 그래봤자 대형마트나 백화점에서 장보는 것에 비하면 턱없이 싸다.

    대개 재래시장에 가면 물건 값 깎는 걸 당연한 일로 여긴다. 백화점에서 수백만 원짜리 물건을 살 때는 전혀 덤을 달라거나 깎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재래시장에만 가면 알뜰살뜰 신이 내리는지 깎아대곤 한다.

    나는 재래시장 인심, 농촌 인심이니 하는 말을 싫어한다. 왜 그런 인심은 가난한 서민만 일방적으로 해야 하는 것처럼 강요하는지 고약하다. 반대라면 어떨까. 재래시장 상인과 농촌 사람에게 우리가 좀 손해보면서 져주는 게 진짜 인심 아닐까. 재래시장에서 우리가 일부러 좀 비싸게 사는 호기로운 사치를 감행하면 재래시장 상인에겐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진짜 사치는 돈 액수가 아닌 마음으로 하는 거다. 미세먼지와 황사가 봄기운을 빼앗아간 데다 경기까지 안 좋아 우울한 재래시장에서 나를 위한 작은 사치가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온기가 되는 경험을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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