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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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와 슈트의 마리아주 챙길 줄 알아야

남자를 위한 물건

  • 남훈 The Alan Company 대표 alann1971@gmail.com

    입력2014-01-13 1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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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계와 슈트의 마리아주 챙길 줄 알아야
    패션이나 문화 트렌드를 예측해달라는 부탁을 종종 받는다. 그러면 내 나름의 경험과 판단을 시장 상황에 접목해 특정 카테고리나 컬러군, 스타일과 가격대를 조언한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렇다. 우리나라에서 트렌드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것에 대한 창조를 목적으로 하기보다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뒤처질지 모른다는 어떤 강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여성복은 글로벌 패션 트렌드와 실시간으로 맞닿아 있어, 어떤 스타일이 유행을 타면(이를테면 요즘의 치마레깅스) 서울 청담동과 동대문, 삼청동, 경남 삼천포에서도 동시에 출몰해 마치 전 국민이 그 스타일에 열광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패션 발상지는 아니지만 적극적인 소비자로서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이 작은 나라의 엄청난 스피드가 새삼 신비롭다.

    가짓수가 아니라 질이 문제

    스피드가 빠른 것은 물론이고, 관심을 갖는 대상도 자주 바뀐다. 치마레깅스 다음에는 전혀 다른 지점에 있는 모피와 사랑에 빠질지도 모르고, 전통적으로 여성이 사랑해온 핸드백이나 구두에 대한 지지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혹은 그 모든 것을 순차적으로 향유한 후 보석으로 상큼하게 마무리할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시선을 흡인하고 소유욕을 폭발시키며 은행 잔고를 마르게 하는 물건은 시대마다 풍부했고, 브랜드는 미처 다 외우지 못할 정도로 다양했다. 요컨대 여성이 패션이라는 우주에서 마음먹고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신용카드 한도는 있을지언정 적어도 제한은 없다.

    이에 비해 남성이 자신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위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패션 아이템은 슈트와 시계 두 가지가 핵심이다. 알고 보면 질 좋은 이집트산 면으로 만든 셔츠, 환상적인 날씨만큼 아름다운 스페인산 소가죽구두, 동물 뿔로 만든 수동 면도기에서 양말용 가터벨트까지 남성 아이템 스토리도 풍성하지만, 남성은 대부분 그런 것에 무심한 현실 속 비즈니스맨으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남성에게 슈트와 시계는 거의 매일 함께하면서 외모만 변화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삶과 타인과 사회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는 상징이라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물론 남성을 위한 물건이 대부분 가짓수가 아닌 질이 문제지만, 그렇다고 슈트나 시계 브랜드 선택이 남성 계급을 그대로 드러내는 건 아니다. 점점 더 높은 수준의 것을 탐하는 식으로 접근하면 곤란하다. 장인 정신이 담긴 무언가를 가져보는 건 많은 남자가 마음에 품는 꿈이지만, 페라리나 요트, 샤토 라투르 와인이나 셰빌로의 맞춤 양복만이 삶을 업그레이드하는 건 아니다. 자기 삶의 규모를 반영한, 그러면서도 아주 조금 나아가는 정도면 된다.

    시계는 꼭 필요하고 소중하지만 그것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시계 역사와 메커니즘을 줄줄이 꿰차고, 브랜드별 특성을 비교 분석하는 건 시계 브랜드 매니저나 잡지 에디터가 할 일이지 우리 지향점은 아니니까. 시계라는 세계의 폭과 깊이는 우주처럼 드넓지만, 시계 자체보다 함께 착용하는 옷과 연관 지어 바라보면 오히려 시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1년 내내 슈트만 입는 건 바람직하지 않고,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 캐주얼의 정답도 아니다. 그러므로 비즈니스 차림에 어울리는 시계와 캐주얼이나 레저에 부합하는 시계를 일단 구별하고, 그것을 자기 취향에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 미국의 경우 기업 고위 간부가 때로 슈트 차림에 티멕스(TIMEX)나 카시오(CASIO)처럼 디지털 고무밴드 시계를 착용하지만, 그건 실용적인 문화가 강한 그 나라 얘기지 굳이 참고할 만한 옵션은 아니다. 반면 역사적 가치가 높고 철학 있는 브랜드라 해도 보석이 너무 번쩍이거나 디자인만 요란한 시계는 자칫 열등감 해소 방법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

    시계는 친구 같은 존재여야

    이때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평소 어떤 복장을 추구하는가. 어떤 옷을 입을 때 나는 편안한가. 유행보다 나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지, 브랜드에 상관없이 시계 가치에 매료되는지, 혹은 개성과 캐릭터를 마음껏 발산하고 싶은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예컨대 짙은 회색 클래식 슈트를 즐기는 남자는 분명 정중한 흰색 드레스셔츠에 오래된 가구처럼 은은한 갈색 가죽구두를 신을 것이다. 이 차림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선택은 갈색 가죽구두의 존재감과 연결되는 심플한 브라운 가죽 스트랩(strap·줄) 시계다. 같은 논리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감색 슈트에는 와인색 가죽구두와 브라운 가죽 스트랩 시계를, 그리고 특별히 격식 있는 느낌을 강조할 때는 검은색 옥스퍼드 구두와 블랙 가죽 스트랩 시계를 선택하면 된다.

    굳이 슈트나 재킷을 입지 않아도 되는 직업이라면, 캐주얼 점퍼나 사파리, 니트와 베스트에 어울리는 지름이 크고 별도 기능이 더해진 준정장용 시계도 좋다. 기본적인 정장용 시계를 갖춘 뒤 여유가 된다면 캐주얼 느낌의 시계를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유연하게 착용해보는 것도 멋들어질 것이다.

    게다가 모든 시계는 그 나름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슈트를 잘 차려입은 신사가 시계에 얽힌 일화나 그것을 소장하게 된 계기 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얼마나 멋스러운가. 그런 시계라면 아들이나 손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충분히 매력적인 투자가 될 것이다.

    대부분 시계를 결혼예물로만 생각하고, 그 의미보다는 과시용으로 취급하는 시대다. 심지어 최고급 미술작품처럼 고고한 취향이나 부의 상징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처럼 시계의 일면적 의미만 부각되는 시대는 어서 마감돼야 한다. 점점 요란해지는 최근 시계 트렌드와 달리 남자의 시계는 특정한 브랜드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그의 손목 위에서 빛을 발하는 친구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아야 한다.

    정중한 슈트 차림에 지나치게 화려한 넥타이를 매는 건 난센스다. 마찬가지로 제 기능을 다하는 복장이란 드러나지 않으면서 사람 이미지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슈트와 화학적으로 융합하는 시계의 구실 역시 그렇다. 그래서 현명한 시계 소비자는 과시용 패션 브랜드보다 시계만 우직하게 제작해온 전문 브랜드, 가벼운 디지털보다 호흡이 긴 아날로그를 선호한다. 시계는 보석이 아니라 남자의 성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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