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7

2013.10.07

소비는 가깝고 노후는 멀다?

사람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분리… 제한된 자유가 노후엔 더 유익

  • 이상건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상무 sg.lee@miraeasset.com

    입력2013-10-07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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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는 가깝고 노후는 멀다?

    9월 12일 경기 고양시 대화동 킨텍스에서 열린 ‘2013 중장년 채용한마당’을 찾은 구직자들이 각 기업의 채용 정보를 담은 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 13년 뒤인 2026년에는 65세 인구가 5명 가운데 1명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이는 거꾸로 현재 40~50대 인구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지 선진국에 산다면 모를까, 국민연금을 받아 봤자 퇴직 전 소득의 30~40%에 불과한 현실에서 노후를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은 희망보다 공포나 두려움에 더 가깝다. 40~50대가 모인 자리에 가보면, 대화의 끝은 대개 노후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의 비합리-비이성

    노후 불안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예방 백신은 오래 일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65세, 더 나아가 70세까지 일자리가 있다면 현재의 불안은 사그라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돈’이다. 받아들이기는 싫지만 노인에게 돈은 효(孝)의 다른 이름이다.

    일자리 문제는 사실 개인의 노력만으론 어렵다. 사회 시스템이 어느 정도 뒷받침돼야 한다. 돈 문제도 복지 시스템이 잘 설계돼 있으면 해결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희망과 거리가 있다. 어쩔 수 없이 노후자금의 다소(多少)를 떠나 스스로 준비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논리적으로는 젊어서부터 차근차근 저축과 투자를 해 노후 준비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많은 전문가가 이렇게 얘기하고, 금융회사들도 이런 논리를 전파하며 연금상품을 판매한다. 그리고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쯤은 대부분의 사람이 다 안다.

    그런데 왜 노후에 대비해 투자하는 사람은 적은 것일까. 이유는 많다. 집에 물려 하우스 푸어가 된 사람도 있고, 자녀 교육에 올인하다 보니 저축할 여력이 없거나 자녀 결혼으로 그나마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집을 구해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 모두 타당한 이유들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에 추가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인간의 근본적 속성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이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아니다. 경제적 의사결정에서 때때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마치 금연이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실천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미래에 얻게 될 혜택이나 이익에 대해 그리 대단하게 생각지 않는다. 미국 뉴욕대 사회심리학자 할 허시필드는 사람들의 이런 경향을 노후 준비에 적용한 실험을 했다. 실험 참가자들의 사진을 찍은 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턱 아래 살과 눈 밑 살이 늘어지고 머리카락도 허옇게 센 ‘늙은 나’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특수 안경을 쓰고 거울에 나타나는 ‘현재의 나’ 또는 ‘늙은 나’를 보게 한 뒤 1000달러를 나눠주고, 4가지(특별한 사람에게 줄 선물 구매, 노후자금 마련을 위한 연금펀드 가입, 재미있는 활동, 당좌예금 계좌에 저축)에 자산을 배분하게 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늙은 나’를 본 사람들이 ‘현재의 나’ 사진을 본 사람들보다 2배나 많은 금액을 노후자금 마련에 배분한 것이다.

    허시필드 교수는 제한적 환경이 아닌 일반적 환경에서도 실험을 했다. 이번에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늙은 나’를 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더 많은 자금을 배분했다.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분리하는 경향과 유사한 편향 가운데 하나가 ‘근시안적 소비 법칙(myopic consumption rule)’이다. 이 개념은 먼 훗날의 일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중시해 소비하는 사람의 성향을 뜻한다. 근시안적 소비 법칙의 개념을 빌리면, 자녀 교육비 및 대출금과 노후 준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자녀 교육비와 대출금은 지금 당장의 일이다.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반면 노후 준비는 지금이 아니라 나중을 위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머릿속으로는 노후 준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녀 교육비와 대출금에 우선순위를 둔다.

    시각과 프레임 설정의 효과

    소비는 가깝고 노후는 멀다?

    인간을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는 기존 전통 경제학과 달리,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한 심층 분석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인간은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노후자금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적 약점을 제어하면서 노후자금 저축이나 투자를 늘릴 방안은 없는 것일까.

    먼저 선택권을 제한하는 방법이다. 사람은 선택권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너무 많은 선택권이 있으면 실제 행동으로 옮기질 않는다. 미국 캘리포니아 한 마트에서 잼을 24종류 진열해놓았다. 그러고는 시간 흐름에 따라 점차 잼 종류를 줄여 나갔다. 잼 종류가 많을수록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들었지만 구매로 연결되진 않았다. 24종류가 있을 때 구매율은 3%에 불과했다. 그러나 6종류로 줄었을 때는 30%나 잼을 사갔다. 이 실험의 메시지는 ‘많은 선택권이 오히려 구매 결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노후자금 저축과 관련해서도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 저축률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1990년대 중반 행동금융학의 창시자인 리처드 탈러 교수 등은 퇴직연금 제도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모르는 미국인에게 해마다 연봉 인상분을 연금계좌로 자동이체하라고 조언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급여가 증가함에 따라 인상분이 자동으로 퇴직연금 계좌로 이체되지만 미국인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선택권을 제한한 결과, 1998년 이후 자동이체를 선택한 근로자 50%의 평균 저축액이 2년 만에 소득의 3.5%에서 11.5%로 크게 증가했다. 경험적으로 보더라도 퇴직금을 중간정산하거나 일시금으로 받은 사람은 투자 대상에 대해 100% 선택권을 갖지만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는 거의 없다. 노후자금 마련을 위한 상품으로는 선택권이 제한되거나 세제 혜택 상품처럼 강제 저축할 수 있는 상품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기준 없는 자유보다 제한된 자유가 우리 노후에는 더 유익하다.

    제시되는 시각이나 방식인 프레임(frame)을 잘 설정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은퇴자금을 계획할 때 대별되는 프레임은 노후 필요 자금을 마련하는 데 집중할 것이냐, 아니면 생활비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 이 두 가지다. 사실 이 두 가지는 같다. 사람은 대부분 주로 필요 자금에 초점을 맞춰 생각한다. 그러나 은퇴 계획과 프레임에 대한 연구를 한 학자들은 반대로 생활비, 즉 소비금액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얘기한다. 다시 말해 원금에 이자가 얼마가 나오느냐에 대한 프레임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생활비를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 자산운용을 하는 게 낫다는 뜻이다.

    생각이나 프레임을 바꾼다고 자신이 원하는 노후자금을 모두 마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인간으로서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보완하려는 방향으로 선택권을 제한하고 프레임을 설정한다면, 노후에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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