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5

2013.09.16

시장, 너 여전히 매력 있구나

먹고 보고 살 수 있는 특화된 관광지, 늘 사람과 정이 북적

  • 전정희 민주당 국회의원

    입력2013-09-16 0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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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 너 여전히 매력 있구나

    1 정선 5일장에서 신토불이 산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의 얼굴에 때 묻지 않은 순박한 미소가 넘친다. 2 전정희 민주당 의원은 전통시장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4~8월 전국 전통시장을 돌며 체험한 기록을 10월 말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20년쯤 전으로 기억한다. 한 잡지사에서 사라지는 직업에 얽힌 사연을 책으로 묶어낸 적이 있다. 이 책에는 내가 기억하던 어릴 적 추억 속 인물이 거의 모두 등장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잡다한 물건을 갖고 다니며 팔던 방물장수, 집에 있는 냄비나 고무신, 놋그릇 등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을 엿이나 돈으로 바꿔주던 고물장수, 추운 겨울날 저녁 골목길에서 목청을 드높이던 찹쌀떡, 메밀묵 장수, 황순원 소설 ‘독짓는 늙은이’에 등장하는 옹기장이, 학생 모자를 쓰고 다니며 “아이스케키~”를 외쳐대던 청년이 그들이다.

    # 사라진 직업의 부활

    1970~80년대 현대화 물결 속에서도 생계를 꾸려오던 이런 직업군은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우리 일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흘러간 영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인물이 돼버렸다. 이렇게 사라져가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가슴 한쪽이 아릿했다. 내 아이들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아련한 슬픔이었다. 내 경험과 기억을 현실에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데 대한 아쉬움이 일었다.

    그런데 올여름 나는 전국의 유명 전통시장을 돌면서 잊히고 사라졌던 직업과 일자리를 다시 만났다. 그것도 뒷골목의 초라한 모습이 아닌, 사람으로 북적이는 시장 한가운데에서 최고 인기 직업군으로 부활하고 있음을 봤다.

    지난 한 해 국회에서는 기업형 슈퍼마켓(SSM)으로부터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거세게 일었다. 그 결과 대형 유통마트를 규제해 전통시장을 살리는 입법이 추진됐다. ‘대중소기업의 상생’이라는 이름으로 대형 유통마트에게 한 달에 두 번 의무적으로 휴업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규제를 둘러싸고 각 지역마다 크고 작은 소송이 잇따랐고, 아직까지 분쟁은 끝나지 않았다.



    # SSM 규제의 효능

    자본 논리에 따르면, 거대 자본의 시장 잠식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재벌기업이 무차별적으로 프랜차이즈를 늘려가며 골목 빵집과 순대, 떡볶이 상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기업의 이 같은 문어발식 확장에 대해 소상공인과 선량한 시민들은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런데 이윤추구가 목표인 기업에게‘도덕과 양심’은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 잠시 여론에 밀려 ‘상생’을 도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속성이 없을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정치권과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달래려고 SSM 강제 휴무라는 규제의 칼을 뽑아들었다.

    그런데 SSM에 대한 규제가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을 언제까지 지켜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그래서 나는 전국의 유명 전통시장을 찾아가 현장에서 답을 구해보기로 했다. 4월부터 시작한 전국 재래시장 투어는 폭염이 극성을 부리던 8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찌는 듯한 더위와 비바람에 노출된 한여름의 재래시장은 최악의 비수기로 인식되는 곳이었다.

    텅 빈 장터에 축 늘어져 있을 상인들을 떠올렸던 나는 뜻밖에 사람들이 줄지어 장을 볼 정도로 북적대는 ‘살아 있는’ 시장을 경험했다. 도시의 아스팔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피해 산과 바다를 찾아온 관광객들이 전통시장을 점령하고 있었다. 전통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전통 먹을거리를 유통하는 재래시장이 관광명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 신토불이 정선 5일장

    시장, 너 여전히 매력 있구나

    전남 담양군 창평면 삼지내마을은 고택과 마을 돌담길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전통방식의 먹을거리를 즐긴다. 인근 창평시장에 장이 서면 삼지내마을은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강원도 정선선은 석탄합리화사업으로 역세권 인구와 유동인구가 급속히 줄면서 역 대부분이 무인화된 상태다. 그런데 아우라지, 아라리촌, 화암동굴, 폐철로를 이용한 레일바이크, 동강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집와이어(Zip Wire) 등이 관광명소로 떠오르면서 폐광지역을 전국 최고의 관광지역으로 바꿔놓았다. 게다가 정선 5일장에는 전국 최대 인파가 몰리고 있다. 정선 5일장은 지난해 관광객 35만 명을 유치해 한국관광공사의 ‘한국 관광의 별’ 쇼핑 부문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정선 5일장이 서는 날은 오전 8시 10분 무궁화열차가 서울 청량리역에서 정선역까지 환승 없이 운행되며, 1인 근무역인 정선역은 관광객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장터에 들어서면 동네잔치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강릉 실버음악단이 장터 한복판에서 음악회를 연다. 클래식부터 추억의 가요 메들리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연주 실력에 관광객들의 박수가 절로 터져 나온다. 장날이면 정선의 대표 문화재인 아리랑극 ‘신들의 소리’가 장터에서 상설 공연된다. 시장 곳곳에선 정선의 대표 먹을거리들이 풍년을 이룬다. 막국수, 메밀전병, 메밀국죽은 물론 골목마다 메밀부추전을 지지는 소리까지 어우러져 시끌벅적한 잔칫집을 방불케 한다.

    난전에는 시골 할머니들이 손수 캐들고 나온 취나물, 고사리, 쑥, 산더덕, 도라지, 곤드레 등 각종 나물류가 지천이다. 목 좋은 사거리 한복판에 자리 잡은 할머니 장터는 정선 5일장의 꽃이다. 정선군과 상인회에서 내준 신토불이증 명찰을 목에 건 할머니들은 연신 싱글벙글댄다. 푸근하고 소탈한 할머니들 웃음이 손님의 발걸음을 머물게 하는 비결처럼 보였다.

    # 추억의 열차여행과 시골장

    시장, 너 여전히 매력 있구나

    이중섭 거리, 올레 6코스와 바로 연결되는 제주 올레시장 안에는 친수구역을 만들어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전남 곡성군은 1999년 전라선 복선화 공사로 운영이 중단된 옛 곡성역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3량짜리 증기기관차를 운영하면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녹슨 철로가 될 뻔한 기찻길을 증기기관차가 하루 5회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달린다. 증기기관차에 올라타는 순간 30~40년 전으로 돌아간다.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은 채 쫀득이, 뽀빠이 과자, 아이스케키 등 추억의 먹을거리를 파는 아저씨를 만났다. 이 아저씨가 바로 1시간 반 동안 달리는 추억여행 열차의 안내자가 된다. 노랫가락을 구성지게 뽑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 약장수 모습이다.

    증기기관차를 타고 추억여행을 떠난 관광객은 곡성역 인근에 위치한 전통시장에서 다시 옛 기억들과 만난다. ‘몸뻬’바지를 입고 얼굴에 광대 분장을 한 채소가게 아저씨가 곡성장터를 찾은 외지인에게 큰 웃음보따리를 선사한다. 장옥 한가운데 마련된 무대에서는 온종일 상인들과 손님들의 흥겨운 노래자랑과 공연이 펼쳐진다. 시장 곳곳에는 곡성 특산물에 이야기를 입힌 먹을거리들이 손님 입맛을 자극한다. 국내 최대 멜론 주산지인 곡성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멜론 효소주스, 효(孝)의 고장이라는 이미지를 살린 ‘심청이 김밥’, 기차마을을 상징하는 기차모양 붕어빵‘뛰뛰빵’ 등을 만들어냈다. 장옥 안에는 또 참깨와 들깨로 기름을 짜주는 방앗간, 벌건 불에 달군 쇠를 두드려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도 있다. 도시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우리의 옛 모습이 시골 장터에서는 살아 있었다.

    # 관광객이 시장을 점령하다

    경남 통영은 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수려한 경관 덕에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도심 재개발로 역사 속에 묻힐 뻔한 동피랑 마을에 예술의 힘이 입혀지면서 젊은이의 데이트 코스로 자리 잡았다. 평일에도 하루 평균 3000명 이상이 이곳을 찾는다. 통영 제일의 수산시장인 중앙시장에서는 동피랑 마을로 올라가는 길이 여러 개다. 그래서 벽화 마을 동피랑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자연스레 중앙시장으로 이어졌다. 그 덕에 중앙시장을 이용하는 고객층도 한층 젊어졌다. 시장 이용 고객의 80% 이상이 외지에서 온 관광객일 정도로 중앙시장은 관광명소가 됐다. 해수를 끌어와 대야에 놓고 생선을 파는 활어시장이 가장 인기다. 광어, 우럭, 전복, 멍게 등 해산물(4~5kg)을 3만~4만 원이라는 ‘착한’ 가격에 사먹을 수 있다.

    전남 장흥의 정남진 전통시장은 국내에서 처음 토요시장으로 개장했다. 2005년 당시 장흥 군수가 주5일제 근무 시대를 내다보며 주말장을 개장한 것이 대박을 터뜨렸다. 장흥 특산물인 표고버섯, 키조개, 한우를 결합한 ‘한우삼합’도 만들어냈다. 장흥군과 시장상인회는 ‘한우삼합’을 장흥의 대표 음식으로 브랜드화하면서 시장에 정육점 식당을 적극 유치했다. 8년 전 토요시장 개장 당시 3.3㎡당 30만 원 하던 땅값이 현재 1000만 원을 호가하는 ‘황금 시장’으로 변했다. 시장상인회는 매주 토요일 예산 300만 원을 들여 각종 문화행사를 연다. 장흥 토요시장은 관광 3요소인 ‘먹을거리, 볼거리, 살거리’를 모두 갖춘 관광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 밖에 경기 양평 5일장, 제주 서귀포 올레시장, 동문시장, 전남 보성 향토시장 같은 전국의 유명 전통시장도 지역의 자연환경 및 문화유적지 등 관광지와 연결돼 관광명소로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거대 자본에 밀려 점차 빛을 잃어가는 전통시장을 지켜내려고 정부는 지난 10년간 3조1000억 원을 지원했다. 전국 1000여 개 시장에 시설·경영 현대화 사업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정부 지원으로 경쟁력을 갖추고 다시 잘나가는 시장, 살아 있는 시장으로 변모한 곳은 전체의 2%에도 못 미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시장의 경쟁력은 현장에 있다

    전통시장을 찾는 소비자의 욕구를 정확히 읽은 뒤 특화된 상품과 서비스로 시장을 운영하는 경영전략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전통시장은 대형마트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다. 대형마트의 거대 자본을 쫓아갈 수도 없다. 전통시장이 살아나려면 대형마트와는 다른 차별화된 경영전략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맛집으로 소문나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 대형마트가 들어선다고 해도 전통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번 투어에서 내가 본 ‘살아 있는 시장’은 그곳에 가야만 먹고, 보고, 살 수 있는 특화된 무엇인가를 갖춘 관광시장이었다. 볼거리가 많은 관광지는 늘 사람으로 북적댄다. 시장도 마찬가지다. 먹을거리와 살거리가 있는 시장은 북적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볼거리, 먹을거리, 살거리를 관광의 3요소로 꼽는 것이다. 지역 특성을 살린 3가지 관광요소에 넉넉한 인심과 상냥하고 친절한 서비스가 보태진다면 전통시장은 그 어떤 외부의 힘에도 결코 밀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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