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1

2013.08.19

지상에 없는 잠

  • 최문자

    입력2013-08-16 16: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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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에 없는 잠
    어젯밤 꽃나무 가지에서 한숨 잤네

    외로울 필요가 있었네

    우주에 가득 찬비를 맞으며

    꽃잎 옆에서 자고 깨보니

    흰 손수건이 젖어 있었네



    지상에서 없어진 한 꽃이 되어 있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서로 찢으며

    지상의 입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네

    저물녘 마른 껍질 같아서 들을 수 없는 말

    나무 위로 올라오지 못한 꽃들은

    짐승 냄새를 풍겼네

    내가 보았던 모든 것과 닿지 않는 침대

    세상에 닿지 않는 꽃가지가 좋았네

    하늘을 데려다가 허공의 아랫도리를 덮었네

    어젯밤 꽃나무에서 꽃가지를 베고 잤네

    세상과 닿지 않을 필요가 있었네

    지상에 없는 꽃잎으로 잤네

    폭염 속에서 이 시를 읽었다. 한 장의 꽃잎을 상상하며 나뭇잎을 본다. 무심한 구름을 본다. 녹음 짙은 나뭇잎엔 은행이 무성하다. 아, 저것들, 저 무심한 것들. 저것이 결국은 우주의 한 알이 된다. 외로울 필요가 있다는 시인의 말이 이 여름, 이 폭염에 익어가는 한 알의 열매다. 언어는 결국 지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 ─ 원재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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