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0

2013.08.12

섹시함 버리고 ‘전자오락실 코드’로 승부

걸그룹 크레용팝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3-08-12 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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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시함 버리고 ‘전자오락실 코드’로 승부
    걸그룹 크레용팝의 인기가 예사롭지 않다. 뮤직비디오 ‘빠빠빠’에서 보여준 그들의 콘셉트는 걸그룹의 통념을 깨뜨린다. 몸매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현란한 군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음악이 세련된 것도 아니며, 화려한 랩이 들어가지도 않는다. 패션도 티셔츠에 짧은 바지를 단체로 입고 거기에 오토바이 헬멧으로 마무리한다. 기승전결의 멜로디는커녕, 처음부터 끝까지 몇 안 되는 음을 사용한 후크로 이어진다.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단순한 안무의 절정은 멤버가 번갈아가면서 뛰는 것이다.

    KBS 2TV ‘유희열의 스케치북’ 등 방송에서 들려오는 관객의 함성도 소프라노가 아니다. 바리톤과 테너, 즉 젊은 남성의 웅장한 함성이 방송무대를 ‘우정의 무대’ 녹화현장으로 만든다. 여태껏 이런 걸그룹은 없었다.

    한국을 제외한 일반 국가에서 아이돌은 서브 컬처다. 10대가 주요 소비 대상이고, 음악을 적극적으로 듣지 않는 계층을 타깃으로 하며, 음악보다 엔터테인먼트 기능에 충실하다. 한국에서도 아이돌이 주류가 된 건 최근 일이다. 2007년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빅뱅이 아이돌 르네상스를 만들었다. 특히 수요가 꾸준한 보이밴드와 달리, 대중문화 소비에 소극적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걸그룹의 약진은 1990년대 이후에나 처음 나타난 현상이었다.

    당시 붐을 주도한 걸그룹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1980년대 후반 태어난 세대로, 신체 구조가 그전 세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우월한 신체 비율만 보면 새 인종의 출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효리 이후 섹시 여가수와 대비되는 청순하고 귀여운 콘셉트는 남성의 욕망에 노골적으로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판타지를 자극했다. 또한 그들은 디지털음원 시대에 맞는 직관적인 후크와 대중에게 보편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멜로디의 노래를 불렀다. 거기에 직관적인 안무까지 어우러져, 그들 노래는 10대 소년뿐 아니라 ‘삼촌’들을 대거 팬클럽에 가입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화무십일홍이라, 깨지지 않을 것 같던 걸그룹 신화는 올해 급격한 퇴조 조짐을 보였다. 1월 1일 전격적으로 공개된 소녀시대의 ‘The Boys’는 그 야심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히트곡을 만들 수 있는 작곡가가 한정된 상태에서 콘셉트와 음악의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여자 연예인이 택할 수 있는 전략은 단 하나, 섹시 콘셉트다. 어느 순간 그들의 음악보다 꿀벅지, 아찔한 뒤태 같은 섹시함이 이슈가 됐다. 달샤벳의 ‘내 다리를 봐’는 성적 판타지를 제외하고는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한 걸그룹의 현재를 보여줬다. 2000년대 초·중반의 섹시 여가수 시대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반면 크레용팝은 이런 흐름을 거꾸로 탄다. 기존 걸그룹을 관전하던 이들을 행사장과 공개방송현장으로 이끌어내고, 나아가 걸그룹에 관심 없던 계층을 팬으로 만드는 기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쇠락한 놀이공원, 헬멧, 심플함을 넘어서 조악하기까지 한 멜로디와 사운드,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댄스. 이 모든 것은 1980~90년대 전자오락실(아케이드 센터) 코드다. 기술적 한계 때문에 만들어진 단순함과 반복 코드가 한국 대중문화에 적극적으로 응용된 적은 없다. 복고 영역에 속해 있되 조명받지 못한 코드를 크레용팝은 시각과 청각으로 보여준다.

    이는 아케이드 문화에 익숙한 남성에게 친숙하되, 신선한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지점이다. 그리고 한국 걸그룹이 ‘일반’이 아닌 ‘특정 대상’을 타깃으로 하는 산업임을 보여주는 징후이기도 하다. 그들은 포화상태인 시장에서 새로운 틈새를 만드는 구실을 하게 될까, 아니면 시장 퇴행의 기수가 될까. 걸그룹 판도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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