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0

2013.06.03

‘빚’에 짓눌린 나날 이젠 ‘희망’만 보고 살고파

국민행복기금 접수창구 중산층의 ‘눈물과 한숨’ 넘쳐나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3-05-31 17: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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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빚’에 짓눌린 나날 이젠 ‘희망’만 보고 살고파

    서울 강남구 캠코 본사 3층에 마련한 국민행복지원센터 모습.

    10년 전 집 근처에 슈퍼마켓을 차린 뒤 별걱정 없이 살던 김모(52·남) 씨에게 어려움이 닥친 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주변에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부터다. 가게 매출이 형편없이 줄어들면서 지병인 간염까지 악화돼 결국 슈퍼마켓을 처분해야 했던 그에게 남은 건 카드사와 은행에 진 빚뿐이었다. 그 일로 아내와 이혼한 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두 아들을 키우고 빚도 갚아나가야 했지만 건강이 좋지 못한 그에겐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김씨는 결국 카드빚 700만 원을 갚지 못해 장기 연체의 늪에 빠졌다.

    하루아침에 빈곤층으로 추락

    부동산과 무역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승승장구하던 김모(50·여) 씨는 외환위기와 함께 사업이 부도나 살던 집을 날리고 남편, 두 자녀와 함께 길거리로 내몰렸다. 지인들이 마련해준 500만 원을 보증금으로 해 어렵게 월세 단칸방을 구한 김씨는 그 길로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집을 나왔다. 시도 때도 없이 채권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치고 남편이 그들에게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1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에게 남은 빚은 원금만 800만 원에 달한다.

    ‘건국 이후 최대 위기’로 불리던 외환위기에 이어 찾아온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렇듯 중산층에게도 깊은 상처와 그늘을 남겼다. 기업 부도, 자영업자 몰락, 구조조정으로 인한 대규모 강제퇴직 등으로 하루아침에 빈곤층으로 추락한 사람이 속출한 것. 문제는 이들이 다시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통계청이 2월 발표한 ‘2012년 가계동향’ 조사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인 1분위 가구 월소득은 135만2000원, 상위 20%인 5분위 가구 월소득은 774만7000원으로 나타났다. 전국 단위 가계소득 조사를 처음 실시한 2003년과 비교하면 1분위 가구 월소득은 46% 늘어난 반면 5분위 가구는 58% 증가했다. 지난해 두 계층 간 빈부격차가 9년 전보다 더 벌어진 것이다. 좀처럼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소득 양극화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부터 3년간 OECD 33개 회원국의 소득 불평등이 심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7년에는 33개국 가운데 소득 상위 10%의 부(富)가 하위 10%에 비해 9배 높았지만 3년 뒤인 2010년에는 이 수치가 9.5배로 늘어났다.



    나라 안팎의 경제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업이 부도나거나 생계비 마련 등의 이유로 빚을 진 사람이 적게는 수년간, 길게는 10여 년간 뼈 빠지게 일해도 저축은커녕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 못 해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점점 깊어지는 빚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금융채무 불이행자(신용불량자)의 재활을 도우려고 정부가 도입한 ‘국민행복기금 채무조정’ 제도에 따라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가 4월 22일부터 가접수(5월 1일부터 본접수 시작)를 시작한 지 한 달 만인 5월 22일 현재 총 11만4312명이 접수를 했다.

    5월 22일 오후 3시경, 캠코 서울 강남 본사 3층에 마련된 국민행복지원센터(센터)에 들어서자 평일 대낮임에도 채무조정을 상담, 신청하려고 들른 사람들로 북적였다. 입구에서 대기번호표를 뽑아 오전 9시부터 이곳을 찾은 사람 수를 확인하자 315명에 달했다. 각각 칸막이가 설치된 40개 접수창구는 직원과 방문자로 빈자리가 없었고, 센터 중앙에 마련한 대기의자에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성부터 노인까지 10여 명이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쑥한 양복차림의 중년 남성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학자금대출금 수천만 원을 연체한 딸 대신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는 조만간 자신도 채무조정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했다. 통신판매업을 하다 외환위기와 함께 부도를 맞은 김모(58·남) 씨였다. 그는 11억7000만 원에 달하는 빚 때문에 살던 집과 보유 건물을 경매로 내놓아야 했다. 김씨는 “한창 외환위기 때라 경매에서 여러 번 유찰되는 바람에 헐값에 집과 건물을 넘겨야 했다. 그 탓에 남은 빚이 아직 있는데 지금 정확한 원금과 이자를 파악 중”이라고 했다.

    500만 원 미만 소액채무자 27.4%

    ‘빚’에 짓눌린 나날 이젠 ‘희망’만 보고 살고파

    5월 22일 국민행복지원센터에서 한 직원이 채무조정 상담을 해 주고 있다.

    그는 집을 잃은 뒤 주소지를 실거주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놓아 채무독촉장 등 빚 관련 서류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그는 “혹시 남은 빚 원금이 1억 원이 넘어 채무조정 신청 대상에서 제외될까 봐 걱정”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민행복기금 채무조정 신청대상 자격은 2013년 2월 28일 기준 6개월 이상 연체, 총채무금액 1억 원 미만이어야 한다. 이미 개인회생과 파산, 강제집행 절차가 진행 중인 사람은 제외된다.

    연신 접수창구 번호판 불빛을 확인하며 자기 순서를 기다리던 정철수(65) 씨는 “수십억 원 재산을 다 날리고 아내가 장사로 버는 돈으로 가까스로 생활한다”고 했다. 그가 털어놓은 굴곡진 사연 역시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됐다. 다니던 건설회사가 부도나면서 정씨는 21년간 근무한 회사에서 단 한 푼의 퇴직금도 받지 못한 채 빈손으로 쫓겨났다. 설상가상 은퇴 후 노후준비 목적으로 직접 건설했던 모텔마저 부동산값 폭락으로 헐값에 넘겨야 했다. 그의 하소연이다.

    “아파트담보대출금 1억5000만 원, 아버지가 준 돈, 제2금융권에서 빌린 3억 원을 모텔 짓는 데 몽땅 쏟아부었는데 그게 헐값에 넘어가면서 연 20% 이자로 제2금융권에서 빌린 대출금을 다 갚지 못했다. 그 때문에 보유했던 단독주택과 토지, 살던 아파트까지 경매에 넘어갔고 시골에서 농사짓던 아버지 땅까지 팔았다. 재산을 모두 처분해 ‘빚잔치’를 벌인 후에도 다 갚지 못한 채무원금이 6000만 원에 달한다. 원금에 연 45% 연체이자까지 붙어 지금 형편으론 도저히 갚을 엄두조차 낼 수 없다.”

    캠코에 따르면 김씨(남)와 정씨처럼 채무 원금이 5000만 원 이상 고액인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채무조정 가접수 현황을 잠정 분석한 결과 신청 건수는 9만4036건이며, 이 가운데 남성이 66.6%, 여성이 33.4%를 차지했다. 연령대는 40대가 35.8%로 가장 많고 50대와 30대가 각각 29.5%, 21.7%였다. 그 외 60대 이상이 7.9%, 20대가 5.1%였다. 총채무액은 1000만 원 미만인 경우가 48.8%로 신청자의 절반에 육박했으며, 500만 원 미만인 소액 채무자도 전체의 27.4%에 달했다.

    국민행복기금이 출범하면서 사회 일각에선 불성실 채무자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는 시각이 확산하고 있다. 심지어 “무슨 일을 하든 맘만 먹으면 한 달에 얼마씩 갚을 수 있고, 몇백만 원 정도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센터에서 만난 사람들 처지는 절박했다.

    ‘빚’에 짓눌린 나날 이젠 ‘희망’만 보고 살고파

    서울 강남구 캠코 본사 1층에 마련한 국민행복기금 바꿔드림론 상담 센터. 고금리 대출에 시달리는 사람을 위해 저금리 대출로 바꿔준다.

    “빚 갚고 사업하고 싶다”

    이모(56·남) 씨는 10년 전 가까운 지인 소개로 만난 사람에게 대출사기를 당해 현재 남은 빚 원금만 1200만 원에 달한다. “이자까지 합치면 빚이 3000만 원이 넘을 것”이라는 그는 인터뷰 도중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이씨는 “대출 사기꾼들에게 속아 억울하게 교도소까지 다녀왔다. 출소 후 고시원에서 살며 일용직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지만 도저히 빚을 갚을 형편이 못됐고 이자만 눈덩이처럼 불었다. 백내장에 허리 부상까지 겹쳐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 시도도 여러 번 했지만 죽지 못했다”고 했다. 채무원금의 70%를 탕감받아 원금 350만 원과 그에 따른 이자를 5년 동안 나눠 낼 수 있게 된 그는 “매달 6~7만 원씩 갚으면 되니까 이젠 살 것 같다. 가족과는 일찍이 헤어져 소식이 끊겼고 그동안 친구와 친척들한테 사람 대접 못 받고 홀로 외롭게 살았는데 이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며 눈물을 훔쳤다.

    1990년대 중반까지 영어학원 강사로 활발히 활동하며 안정된 생활을 누리던 한모(77·남) 씨는 강사 일을 그만두고 영어교재를 만드는 출판사를 차려 독립했다가 외환위기와 함께 어려움에 빠졌다. 한씨는 “출판사가 어려움을 겪던 차에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병원비 3000만 원을 내려고 대출을 받았는데 그 빚 가운데 원금 500만 원을 갚지 못했다”고 했다. 반신불수로 3년을 투병생활하던 아내는 빚만 남긴 채 몇 년 전 그의 곁을 떠났다. 한씨는 “아직 출판사를 없애지는 않았지만 수입이 신통치 않다. 빚만이라도 어떻게 해결되면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지 않겠느냐”며 신청서를 내고 돌아섰다.

    앞서 소개한 김모(여) 씨가 접수창구에서 나와 함께 온 전남편과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채무조정 신청이 안 됐느냐”고 묻자 김씨는 “200만 원에 달하는 채무 한 건이 해결이 안 됐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그에 따르면 외환위기 전 시중은행에서 대출받은 200만 원이 은행 합병과 함께 부실채권으로 처리돼 자신도 모르게 대부업체로 넘어가면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 이에 대해 캠코 측 관계자는 “국민행복기금에서 효과적으로 채무조정을 실행하려고 금융회사와 대부업체 간 ‘신용회복 지원협약’을 체결하고 있다. 협약 가입이 체결된 대부업체 빚은 채무조정 신청 대상이 되지만 김씨처럼 가입이 안 된 곳에 물린 빚은 신청 대상에서 제외된다. 현재 협약 가입 대부업체가 4000여 곳에 달하는데 영세 업체를 중심으로 아직 가입을 안 한 곳이 많다. 김씨 같은 사람을 구제하려고 지금도 협약 가입을 계속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같은 건물 1층에 위치한 또 다른 센터는 고금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국민행복기금 바꿔드림론’(바꿔드림론)을 이용하려고 찾았다. 바꿔드림론은 신용도가 낮은 서민이 대부업체나 캐피털사 등에서 대출받은 연 20% 이상의 고금리 대출을 국민행복기금에서 보증해 시중은행의 저금리 대출로 바꿔주는 서민금융지원 제도다. 기존의 ‘신용회복기금 바꿔드림론’ 제도에서 지원 대상 자격 요건을 완화해 4월 1일 새롭게 출범한 뒤 현재까지 신청자 수가 1만6794명에 달한다. 캠코 측에 따르면 새 제도 출범 전인 1~3월 대비 신청자 수가 64% 증가했고, 하루 평균 140명 안팎이 센터를 찾는다고 한다.

    앞서 만난 정철수 씨는 동업자와 함께 온라인 판매 사업을 준비 중이다. 그는 “일단 빚을 파악한 뒤 채무조정 신청을 무사히 마치면 본격적으로 사업에 몰두하고 싶다”고 희망을 내비쳤다.

    이렇듯 센터 문을 두드리는 수많은 사람의 사연과 처지는 제각각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빚에 억눌려 지내온 고통과 삶의 무게는 대부분 비슷해 보였다. 그들의 심경을 교도소까지 다녀온 이씨의 복받치는 눈물이 대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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