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9

2013.05.27

성(聖)과 속(俗), 다른 삶 같은 꿈

이창재 감독의 ‘길 위에서’와 강석필 감독의 ‘춤추는 숲’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3-05-27 11: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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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다른 삶을 꿈꾸는가.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고 나선 출근길에 가족의 ‘밥줄’을 달고, ‘몇십m2’ 아파트 한 켠에 옛 시절 꿈을 뉘여 놓으며, 학원에 가는 아이의 뒤통수에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딸려 보내는 당신. 코스를 이탈하면 곧 실격이고 낙오인, 길고 지루한 장거리달리기와도 같은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삶으로부터 한 번이라도 탈주를 꿈꿔본 적 있는지.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서’(감독 이창재)와 ‘춤추는 숲’(감독 강석필)은 아마도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와는 약간 다른 삶의 풍경 속으로 안내하는 작품일 것이다.

    ‘길 위에서’는 여승, 즉 비구니의 세계를 담은 작품으로 일반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경북 영천시 청통면 팔공산 자락 백흥암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백흥암은 비구니들의 수행 도량이다. ‘길 위에서’가 성(聖)의 세계에서 꿈꾸는 다른 삶이라면, ‘춤추는 숲’은 세속에서 모색하는 대안공동체다. 즉 경쟁과 개발 논리에서 벗어나 주민들이 함께 먹고, 놀고, 나누며 아이들을 키워가는 마을공동체 이야기다. 서울 마포 성미산마을의 몇 년간 모습을 스크린에 담았다.

    ‘길 위에서’는 남성이면서 비종교인인 외부자의 시선으로 우리를 백흥암의 풍광 좋은 사계로 인도한다. 직접 화자(내레이터)로 나선 이창재 감독은 “한 절에서 들은 여성 행자의 대성통곡이 나를 백흥암으로 들어서게 했다”고 입을 뗀 뒤 “(촬영 허락을 구하니) 한 비구니가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고 왔는데 왜 감독님과 촬영을 해야 하나요’라고 거부했다”며 어렵게 수행 도량의 문을 연 사연으로부터 영화를 시작한다.

    오전 3시 잠든 경내를 깨우는 도량석 목탁 소리부터 오후 9시까지 이어지는 예불과 명상, 설법 등 수행 정진 과정과 밥 짓고 청소하며 밭을 일구는 비구니의 일상을 때로는 산사에 이는 바람 소리에도 깨어질 듯한 고요와 긴장 속에서, 때로는 사춘기 소녀 같은 왁자지껄한 웃음 속에서 스크린에 담았다. 말과 표정, 개성이 다 제각각인 비구니들의 다양한 사연도 전한다.



    백흥암 비구니의 숨겨진 세계

    성(聖)과 속(俗), 다른 삶 같은 꿈

    이창재 감독 영화 ‘길 위에서’한 장면.

    30대쯤 된 상욱 행자는 명문대 졸업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교수 임용 면접을 앞두고 출가했다. 가족에게 설득당할 것 같아 편지 한 장 써놓고 머리를 깎았다는 상욱 행자지만, 부모가 몇 번이고 도량을 찾아와 울고 매달릴 때는 끝내 눈물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어린 시절 부모도 모른 채 절에 버려져 숙명처럼 계를 받은 20대쯤 된 선우 스님도 있다.

    세속과 인연을 맺지 않은 이가 부처에 귀의하는 경우를 일컫는 ‘동진출가(童眞出家)’의 운명을 모든 승려가 선망하지만, 정작 선우 스님은 가족을 만날 수 있는 다른 행자와 스님을 부러워하며 부모 얼굴도 모른 채 자란 자신의 삶에 회한을 내비친다. 말괄량이에 마치 개구쟁이 소년 같은 민재 행자는 인터넷으로 기독교, 천주교 등 종교를 검색하다 출가를 결심한 신세대다. 마지막으로 영운 스님은 17세에 출가해 매일 100배씩 약 3년간 100만 배를 한 후 40년 동안 하루같이 선방을 지키며 수행을 해왔다.

    ‘길 위에서’의 주인공은 사람과 산사이며, 그들이 이루는 풍경은 인간의 길과 신의 길 사이에 난 오솔길로 이어진다. 카메라를 들고 찾아간 이 감독에게 백흥암 큰스님은 “여기서 무엇을 보고 싶으신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이 감독은 마지막에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라고 자문한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업(業)을 이고 사는 행자들의 번뇌였을까, 수년간 오직 방 한 칸(무문관)에 들어앉아 정진하는 스님의 ‘수양’이었을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장난치는 행자 스님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이었을까, “정말 나는 밥값을 했나”라는 큰스님의 물음이었을까.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다.

    정이 흐르는 성미산마을

    ‘길 위에서’의 산은 산에 있지만 ‘춤추는 숲’의 산은 도시에 있고, 속의 세계에 있으며, 감독 또한 그 안에 있다. 12년 전 “누구나 그렇겠지만, 미처 부모 될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아이를 맞았던” 강석필 감독은 역시 다큐멘터리 감독인 아내 홍형숙 씨와 함께 성미산마을로 들어간다. 이미 그곳에 터 잡은 뒤 자녀들과 조금은 다른 미래를 꿈꾸며 공동육아를 하던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서다. 성미산마을은 서울 마포구 성산동과 서교동, 망원동 등에 거주하는 주민 1000여 명이 공동육아, 대안교육, 문화활동, 생활협동조합운동 등을 하면서 이룬 공동체로 1994년 시작했다.

    성(聖)과 속(俗), 다른 삶 같은 꿈

    강석필 감독 영화 ‘춤추는 숲’ 한 장면.

    마을주민인 강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마을 어귀를 돌 때마다 아이고 어른이고 모두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의 가족과 집안까지 챙겨가며 안부를 묻는 모습은 이제는 시골에서조차 낯설고 드문 풍경이다. 학원과 성적표에 시달리는 대신 산에 오르고 들꽃에 말을 걸며 노는 아이들, 서로 모여 춤추고 노래 부르며 문화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는 주민 등 도시의 여느 곳과는 다른 ‘마을의 일상’이 펼쳐진다.

    성미산마을은 2010년 새로운 시련에 부딪친다. 성미산 전체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마을 주민 의사와 상관없이, 오세훈 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가 한 사학재단에 학교 설립 인가를 내준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산림을 훼손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사업이라며 굴삭기에 몸을 던지고, 나무에 매달리며, 철근구조물 위에 올라서면서까지 1년여간 서울시와 교육청, 재단을 상대로 치열하고 고단한 싸움을 벌였다. 영화는 이 싸움 과정과 함께 마을 주민들이 ‘100인 합창공연’을 준비하고 무대에 올리기까지의 시간도 보여준다. 결국 이 영화는 경쟁과 효율, 속도, 이윤의 논리가 아닌 연대와 나눔, 협력, 공생의 새로운 가치가 가능하냐고 묻는다.

    300여 일간 잠행에 가까운 촬영에 의해 만들어진 ‘길 위에서’와 기획부터 완성까지 4~5년간 한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춤추는 숲’. 모두 제작 기간만큼이나 공력이 든 웰메이드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상이 뛰어나고 사람 냄새가 풍기며 관객과의 ‘재미있고 훌륭한 대화법’을 가졌다. 스크린을 응시할수록 자명해지는 하나의 사실은 꿈꾼다는 것은 곧 싸운다는 것이다. ‘춤추는 숲’의 주인공들은 ‘낡은 가치’와 싸우고, ‘길 위에서’의 주인공들은 ‘자신’과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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