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0

2013.03.25

‘표’와 ‘총’으로 인종차별 역사 고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 vs 퀜틴 타란티노 감독의‘장고 : 분노의 추적자’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3-03-25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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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 아닌 ‘노예’다. 공교롭게도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두 거물 영화감독이 비슷한 시대의 미국 인종차별을 소재로 한 영화를 나란히 선보였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과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 분노의 추적자’(‘장고’)다. 흑인 최초 미국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해 백악관 주인 자리를 꿰찬 마당이라 사뭇 의미심장한 작품들이다.

    ‘링컨’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전기 영화이고, ‘장고’는 허구적 상상력으로 창조한 액션 영화다. 장르와 주인공 피부색만큼이나 역사를 해석하는 시선과 온도에 차이를 드러낸다. ‘링컨’에서 인종차별은 만인 평등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뎌온 인류 진보의 역사적 과정 중 하나다. 인종차별은 제도나 역사라는 맥락에 놓였으며, 당연히 협상과 타협을 통해 폐지하고 개혁해야 할 대상이다. 그것을 이룬 영웅은 백인 지도자 링컨이다.

    반면 타란티노에게 인종차별이란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살육의 역사다. 링컨이 선한 미국, 진보한 백인에 대한 ‘알리바이’라면, 장고는 백인과 미국이 갖고 있는 본원적 사악함에 대한 증거다. ‘장고’ 속 노예제는 미국이 여전히 씻지 못한 원죄다. 여기에서 링컨은 ‘표’로 역사를 만들고, 장고는 ‘총’으로 복수를 이룬다.

    전기 영화 vs 허구적 상상력

    ‘표’와 ‘총’으로 인종차별 역사 고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 ‘링컨’의 한 장면.

    ‘링컨’은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재임 중 완전한 노예제 철폐를 이루기까지 1년여 기간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남북전쟁이 4년째 접어들면서 국민 사이에 종전에 대한 요구가 드높던 1865년 재선에 성공한 링컨 대통령(대니얼 데이루이스 분)은 ‘종전이냐, 노예 해방이냐’는 중대한 선택 기로에 선다. 링컨은 전쟁이 끝나기 전 노예제 철폐를 실현하고자 이를 골자로 한 헌법 수정안을 의회에 제출한다. 하지만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조차 의견이 갈리고, 민주당은 “정부는 노예제에 대한 정치 논쟁을 끝내고 당장 종전을 위한 협상에 나서라”며 반대 목소리를 높인다. 영화는 정치적 난관에 봉착한 링컨이 인류 진보에 대한 신념을 끝까지 지키며 협상과 타협을 통해 반대파를 설득하고 마침내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켜 노예제를 철폐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장고’는 남북전쟁 직전인 1859년 미국 남부가 배경이다. 흑인 노예 장고(제이미 폭스 분)가 주인공이다. 그는 아내를 백인 노리개로 빼앗기고, 자신은 무거운 쇠사슬에 묶여 이리저리 팔려다니는 신세다. 그러던 중 수배 중인 무법자들을 퇴치하고 그 현상금으로 살아가는 바운티 헌터(현상금 사냥꾼) 닥터 킹(크리스토프 왈츠 분)을 만난다. 장고는 그에게 도움을 주고, 이를 계기로 자유 몸이 된다. 장고는 닥터 킹과 짝을 이뤄 무법자 사냥에 나선다. 둘은 손발이 척척 맞는 환상의 복식조를 이뤄 현상금 사냥에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허물없이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마침내 두 사람은 장고 아내를 백인 손아귀에서 빼오려고 의기투합한다. 그들은 장고의 아름다운 아내가 끌려간 미시시피 대농장 캔디랜드로 향한다. 이곳 주인 캔디(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분)는 백인 노예주 가운데서도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인물이다. 가혹한 노동은 물론이고 흑인 노예에 대한 폭력과 살해, 성적 학대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노예들을 끌어다가 누구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움을 시키는 쇼를 벌이기도 한다. 캔디에게는 하수인 구실을 하는 충실한 흑인 집사 스티븐(새뮤얼 잭슨 분)이 있는데, 자신도 노예 처지면서 흑인에게 백인보다 더 끔찍한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장고와 닥터 킹은 노예를 사고파는 사업가로 위장해 캔디랜드에 들어가 장고 아내를 구출하려다 스티븐에게 음모가 발각돼 죽음을 맞을 위기에 처한다.

    흑백이 짝을 이룬 인물 구도

    ‘표’와 ‘총’으로 인종차별 역사 고발
    ‘장고’는 원래 1960~70년대 유행하던 ‘스파게티 웨스턴’을 대표하는 유명한 영화이자 그 주인공 이름이다. 미국 정통 서부극은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야만 인디언과 싸우는 영웅적인 백인 총잡이를 통해 원주민에 대한 폭력으로 얼룩진 미국 개척사를 정당화하는 등 지극히 미국적 가치를 설파한 액션 영화 장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기가 시들해지자 뚜렷한 권선징악 구도가 해체되고 총잡이 간 난투극을 그리는 폭력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이렇게 변형된 웨스턴을 수정주의 서부극이라고 부르며, 그중에서도 이탈리아계 감독이 주로 멕시코와 변경지대를 무대로 총잡이 간 사투를 그린 작품을 ‘스파게티 웨스턴’이라고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무법자’ 시리즈나 ‘와일드 번치’(1969)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며, 이와 함께 또 한 축을 이룬 것이 세르조 코부치 감독의 ‘장고’(1966)다. 당시 프랑코 네로가 연기한 장고는 일약 서부극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떠올라 70년대까지 장고를 주인공으로 한 아류작이 30편 이상 탄생했다.

    타란티노는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정통 서부극은 물론, 스파게티 웨스턴 공식마저 뒤집어버림으로써 죽은 것으로 취급되던 장르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여기에 더해 할리우드 악동답게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 원형을 결합했다. 영화에서 닥터 킹은 장고에게 “유럽에서 내려오는 전설”이라며 괴물에 잡혀간 아름다운 공주를 구하는 영웅담을 들려주는데, 이 영화 자체가 그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반복한다. 또한 ‘장고’는 모든 서사의 영원한 주제인 복수극 얼개를 띠고 있기도 하다.

    흑백이 짝을 이룬 인물 구도도 재미있다. 이 영화에서 장고와 닥터 킹은 ‘좋은 편’이고 캔디와 스티븐은 ‘나쁜 편’이다. 장고와 닥터 킹은 서로 평등한 파트너이지만, 캔디와 스티븐은 철저한 주인과 노예 관계다.

    크리스토퍼 왈츠는 이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가 연기한 닥터 킹은 노예 해방론자이자 유머러스하면서 자유주의적인 인물로, ‘미국에 건너온 독일인’이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타란티노 감독은 “미국인에게 면죄부를 주기 싫어 긍정적인 백인 캐릭터를 독일계로 정했다”고 말했다.

    ‘표’와 ‘총’으로 인종차별 역사 고발

    서부영화 장르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퀜틴 타란티노 감독 영화 ‘장고’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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