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7

2013.03.04

빨라졌다, 흥행 속도 변했다, 오락 장르로

한국 영화 흥행 패턴 변화와 실체 분석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corp.com

    입력2013-03-04 13: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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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미도’는 정말 꾸역꾸역 오래갔죠. 12월 개봉해 다음 해 4월까지 상영됐으니. 지난해 여름부터는 흥행 판이 많이 달라졌어요. 시장 크기가 커진다 커진다 했는데, 정말 많이 커졌죠. 주중, 주말 개념도 사라지고, 비수기와 성수기도 이제 의미 없어요. 내 주변에서 영화 뭐 봤다, 영화 뭐 보러 가자고 얘기하는 50~60대가 정말 많아요. 옛날에는 40대만 돼도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했는데, 가히 ‘중년 혁명’이라고 할 수 있죠.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도 많이 늘어났잖아요. 게다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때문에 하루에도 입소문이 엄청나게 쏟아지고요. 흥행 조건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셈이죠.”

    지난 10년간 멀티플렉스 증가

    공식 ‘1000만 한국 영화’ 1호인 ‘실미도’를 연출한 강우석 감독의 말이다. 2003년 12월 24일 개봉한 ‘실미도’가 다음 해 2월 19일 1000만 번째 관객을 맞은 지 9년, ‘실미도’ 개봉을 기준으로 삼으면 꼭 10년 만에 한국 영화는 관객 1000만 명 이상을 동원한 작품을 8편이나 보유하게 됐다. 더구나 지난 반년여 동안 3편이 잇달아 탄생했다. 강 감독은 “거의 한꺼번에 쏟아진 최근 ‘1000만 영화’ 3편은 과거와 많이 달라진 흥행 조건과 상업적 환경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 사이 한국 영화는 급변하는 사회상만큼이나 끊임없이 달라지는 흥행 흐름을 보였다. 산업적으로는 흥행 규모와 속도 증가가 가장 눈에 띄고, 작품 자체의 문화적 맥락에서는 역사에서 오락으로 변화 추세가 감지된다.

    역대 1000만 영화 8편의 흥행일지를 나란히 놓고 봤을 때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갈수록 빨라진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띈다. ‘실미도’가 개봉 후 1000만 번째 관객을 맞기까지는 58일이 걸렸다. ‘괴물’은 개봉 21일째 1000만 명을 넘었고, 지난해 ‘도둑들’은 22일을 기록했으며, ‘7번방의 선물’(‘7번방’)은 기록을 세우는 데 한 달여(32일)가 걸렸다. 지난 10년간 멀티플렉스 증가와 한국 극장영화 시장 증대가 1000만 영화의 흥행 속도를 높인 것으로 분석된다.



    ‘실미도’ 개봉 당시와 비교해 전국 상영관(스크린) 수는 1461개에서 2081개로 늘어났으며, 국민 1인당 연간 영화관람 횟수도 2.78회에서 3.83회로 증가했다. 여기에 더해 40대 이상 중년 관객 증가와 SNS를 통한 입소문이 흥행 속도를 높인 요인으로 꼽힌다. 결국 흥행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는 것은 한국 영화 시장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관객 동원이 개봉 규모와 마케팅 전략, 입소문에 좌우될 소지가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빨라졌다, 흥행 속도 변했다, 오락 장르로
    빨라졌다, 흥행 속도 변했다, 오락 장르로

    자료 영화진흥위원회

    ‘도둑들’, 엄숙주의 종말 선언

    흥행 트렌드에선 ‘역사’에서 ‘오락’으로, ‘현실’에서 ‘판타지’로 변화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그 기점으로 지난해 ‘도둑들’을 꼽을 수 있다. ‘도둑들’은 한국 영화의 전형적인 흥행 공식을 깼다. 순전히 영화적 쾌감과 오락적 가치에만 집중한 작품이 1000만 명을 넘은 것은 ‘도둑들’이 처음이다. 한국 영화계에서 오랫동안 흥행 불패 소재로 여기던 것이 ‘분단’이었으며,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1968년 창설한 실미도 북파부대(684부대)를 소재로 한 ‘실미도’는 한국 현대사의 금기 ‘봉인’을 뜯어낸 작품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전쟁 당시 남북한 군으로 운명이 엇갈린 비운의 형제 얘기를 담았다.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는 조선 연산군 시대 한 광대를 통해 권력과 민중 삶을 풍자했다는 점에서 사회성이 짙었다. ‘괴물’은 주한미군의 독극물 방사 사건을 소재로 한 괴수영화로, 극장 상영 당시 ‘반미주의’ 논쟁까지 일으킨 작품이었다. ‘해운대’는 기상 이변 때문에 일어난 쓰나미가 부산을 덮친다는 아이디어를 담은 재난영화였다.

    그런데 ‘도둑들’은 다르다. 도둑들이 모여 서로 속고 속이며 ‘한탕’하는 이 영화에는 역사적 주제 의식도, 당면한 사회 이슈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도둑들’은 한국 영화계에서 ‘계몽주의’와 대중문화의 ‘엄숙주의’가 끝났음을 증명하는 작품이었고, 그런 점에선 싸이 ‘강남스타일’ 신드롬과 일맥상통한다. ‘7번방’ 역시 휴먼코미디라는 장르적 쾌감에 충실한 작품으로, 사회성이나 역사성을 특별히 내세운 작품이 아니다.

    대형 흥행작에서 ‘판타지’ 성격도 점차 짙어지고 있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괴물’은 실화나 실제 역사에서 소재를 취했으나, ‘해운대’ ‘도둑들’ ‘광해, 왕이 된 남자’(‘광해’)로 갈수록 직접적인 현실 반영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해’에서 역사는 배경일 뿐이며, 미국 영화 ‘데이브’와 일본 영화 ‘카게무샤’, 동화 ‘왕자와 거지’ 속 모티프를 활용해 기획한 작품이다. ‘7번방’ 역시 현실 반영보다 동화나 우화적 ‘판타지’ 성격이 강하다.

    감독의 작가주의 지향보다 흥행을 위한 기획이 더 중요해졌다는 점 역시 변화된 흥행 경향으로 짚어볼 수 있다. 이른바 흥행 경향의 할리우드화다. ‘도둑들’은 할리우드 영화 ‘오션스 일레븐’처럼 당대 톱스타를 대거 동원해 흥행에 성공한 경우이고, ‘광해’는 아예 투자배급사인 CJ E·M이 시나리오를 개발한 뒤 외주제작사와 감독을 기용해 만든 기획 영화다.

    규모보다 내용 자체가 흡인력

    마지막으로 규모에서 내용으로의 중심 이동 또한 변화된 흥행 경향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7번방’은 관객 1000만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휴먼코미디 영화이며, 총제작비가 역대 최소인 58억 원에 불과하다. 앞선 1000만 영화들은 액션, 전쟁, 괴수, 재난, 사극 등을 앞세운, 제작비 100억 원대 작품이 대부분이다. ‘스펙터클’과 ‘할리우드 이상의 규모’를 내세운 사례도 많았다. 하지만 ‘7번방’은 규모보다 내용 자체가 가진 흡인력이 흥행 동력이 됐다.

    한국 영화가 기술 측면에서 대단한 성취를 이루고, 세계적으로도 높이 평가받는 마당에 과거처럼 ‘웰메이드 영화’임을 내세우거나 ‘할리우드 버금가는 스펙터클’만을 강조해서는 관객에게 호소력을 전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1000만 흥행 영화 공식 네 가지

    신파…희생자…비극…새로운 시도


    빨라졌다, 흥행 속도 변했다, 오락 장르로

    영화 ‘7번방의 선물’을 촬영중인 이환경 감독(오른쪽)과 배우 류승룡 씨.

    시대와 현실에 따라 흥행 패턴이나 흐름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좀처럼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공식도 있게 마련이다. 흥행 산업이란 사람 마음을 홀리고 빼앗는 것인 만큼 꼭 짚어 법칙으로 만들긴 어렵지만, 다양한 현상을 관통하는 원리는 있을 법하다. 1000만 영화 8편. 그 속에는 어떤 흥행 공식이 숨었을까.

    먼저 1000만 영화 모든 작품엔 예외 없이 신파가 들어 있다. 그것도 ‘남자의 신파’다. 멜로드라마 정서는 모든 대중문화 콘텐츠의 바탕이나 뼈대를 이루지만, 1000만 영화의 경우엔 ‘남자의 신파’가 더 강세를 보인다.

    ‘실미도’는 시대가 버리고 권력이 짓뭉갠 남성들의 비극을 다뤘다. 남성 간 경쟁과 갈등, 연대와 우정을 얘기하면서 드라마는 끝내 시대가 용납하지 않는 주인공들에게 장렬한 최후를 선사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형제 신파였고, ‘왕의 남자’는 남성 간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삼각관계 멜로드라마였으며, ‘괴물’은 변희봉에서 송강호로 이어지는 ‘아빠의 신파’였다. ‘아빠의 신파’는 ‘해운대’와 ‘7번방의 선물’(‘7번방’)에서도 이어진다. ‘도둑들’엔 다양한 드라마가 숨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김윤석과 김혜수의 멜로였다.

    두 번째 흥행 공식도 예외를 찾기 어렵다. 바로 주인공이 ‘희생자’라는 사실이다. 할리우드 대형 흥행작 속 주인공은 영웅이지만, 1000만 동원 한국 영화 속 주인공은 늘 약자이면서 희생자다.

    ‘7번방’의 주인공은 태어나면부터 장애를 지녀 지능이 6세에 멈춘 중년 남자다. 그는 천형 같은 장애로도 모자라 세상으로부터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가고, 결국 억울한 죽음을 맞는다. ‘광해, 왕이 된 남자’(‘광해’)는 가짜 왕이 된 천한 광대가 주인공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성군 모습으로 영웅적 면모를 드러내지만, 근본적으로는 권력 희생자이자 시대적 약자다. 할리우드 영웅처럼 천하를 구원하지 못한 채 결국 밀려서 떠난다. 권력에 부당하게 희생당하는 인물은 한국 영화가 가장 즐겨 쓰는 카드다. ‘실미도’ ‘왕의 남자’가 대표적이다. ‘괴물’에선 괴물 대신 국민을 잡는 부당한 권력이 묘사된다. 단 한 작품 예외가 있다면 ‘도둑들’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들은 영웅도, 희생자도 아니다. ‘반(反)영웅’에 가까운 캐릭터들이다.

    약자와 희생자 삶을 다룬 작품이 많은 만큼, 대부분 주인공의 비극, 패배담으로 영화가 끝난다는 점도 많은 한국 영화 흥행작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실미도’ 속 주인공들은 ‘김일성 목을 따고 사형에서 풀려난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태극기 휘날리며’에선 결국 형이 동생을 구하지 못한다. ‘괴물’ 속 아빠는 딸을 살리지 못했으며, ‘광해’ 가짜 왕은 왕위에서 물러난다.

    1000만 흥행작 속 주연 배우는 ‘남자, 40대 이상, 연극배우 출신’이 다수다. ‘실미도’와 ‘해운대’ 설경구, ‘괴물’ 송강호, ‘도둑들’ 김윤석, ‘왕의 남자’ 정진영 등이 그렇고, ‘7번방’ 류승룡이 이 흥행 법칙 계보를 이었다.

    마지막으로 1000만 이상 관객이 보는 흥행작이 되려면 과거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시도를 담아야 한다. ‘실미도’는 북파공작원을 다룬 첫 작품이었고, ‘태극기 휘날리며’는 할리우드 영상 수준에 근접한 첫 전쟁영화였다. ‘괴물’은 본격 괴수영화로는 첫 작품이며, ‘해운대’도 물을 다룬 본격 재난영화로는 사실상 1호다. ‘7번방’은 류승룡의 첫 단독 주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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