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7

2013.03.04

경제민주화 벌써 퇴색하는가

박근혜 정부 일자리·안정된 성장 선결조건…아래로부터 요구도 필요

  •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jyou@kdischool.ac.kr

    입력2013-03-04 10: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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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민주화 벌써 퇴색하는가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2월 25일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다. 대다수 국민과 더불어 필자도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간절히 기원한다.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어쨌든 앞으로 5년간 국정을 담당할 정부가 잘해야 민생이 개선되고 나라가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기댈 구석 하나 없는 서민 처지에서는 정부가 잘해주기를 더욱 간절히 원할 수밖에 없다.

    새 대통령도 국민 염원에 부응하고자 다짐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비장한 각오와 헌신적 노력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인식과 시대에 부합하는 효과적 리더십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안타깝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인으로서 보여준 인식과 리더십에는 문제가 많았다. ‘깜깜이’ 인사와 소통 부재로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으며, 5대 국정목표에서 경제민주화가 제외되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 취임을 계기로 심기일전해 국정운영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양극화 해소 시대적 과제

    특히 박근혜 정부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국정과제는 경제민주화다. 지난해 총선과 대통령선거(대선)를 치르면서 새누리당을 포함한 모든 주요 정치세력,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주요 대선후보가 최우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이 바로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는 국민적 합의가 이뤄졌다. 성장지상주의에 지치고 양극화에 시달린 국민 사이에서 성장도 좋지만 공평한 경제를 만드는 것이 먼저라는 거대한 인식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나아가 경제민주화는 정파적 과제가 아닌, 역사적 과제라는 점을 필자는 항상 강조해왔다. 한국 근대화 역사가 산업화와 시장화 단계를 거쳐 경제민주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얘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국가 주도 경제발전을 추진해 급속한 산업화와 고도성장을 이룬 것이 산업화 단계인데, 물론 성과가 컸지만 문제도 많았다. 정경유착과 관치경제, 재벌 독점과 노동 탄압, 지역간·계층간 불균형 등 심각한 경제 왜곡 및 모순을 만들어냈으며, 만성적 인플레이션과 경상수지 적자로 반복해서 경제위기를 맞기도 했다. 정치적 억압과 더불어 경제적 모순의 심화가 개발독재의 종언을 불러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는 직선제 민주주의 시대가 개막했다. 이 시대 경제정책 사조에서는 개발독재하의 국가 주도 관치경제를 민간 주도 시장경제로 개혁하는 것이 대세를 이뤘다. 이는 분명 필요한 개혁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시장 한계를 인식하고, 재벌 같은 경제 권력을 규제하며, 노동자 같은 경제 약자를 보호하는 제도 장치를 마련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직선제 민주주의에서 재벌개혁, 노동권 강화, 복지와 재분배 등 경제민주화 요구는 힘을 받지 못했고, 시장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만능주의 정책이 득세했다.

    그동안 시장화 길을 내달린 한국 경제는 근본적 모순에 봉착하게 됐다. 재벌은 문어발식 확장에 열을 올리는 데 반해 골목상권은 붕괴되고, 대기업 이익은 급증하는 데 반해 근로자 임금과 중산층 이하 가계소득은 뒷걸음질치며, 경제는 성장하는 데 반해 대다수 국민 삶은 팍팍해지는 모순 말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극도로 불행하고 청년은 희망을 잃은 나라, 중·장년층은 장시간 노동에 허리가 휘면서도 고용 및 노후 불안에 시달리는 나라, 노인의 압도적 빈곤율과 자살률 통계가 보여주듯 노인은 삶을 지탱하기조차 힘든 나라, 비정규직과 저임금 근로자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고 행복지수와 사회통합지수는 밑바닥을 맴도는 나라, 이것이 대한민국 현실이 됐다.

    그래서 국민 인식에 대전환이 왔다. 이제는 제발 성장에만 ‘올인’하지 말고 분배도 좀 하고 복지도 좀 하자는 것이고, 1% 특권층을 위한 경제가 아닌 99%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경제로 전환하자는 것이며, 시장만능주의를 넘어서 시장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적절한 민주적 통제를 가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 벌써 퇴색하는가

    2월 21일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브리핑룸에서 김용준 인수위원장(왼쪽에서 세번째)과 각 분과 간사들이 국정 비전 및 과제를 발표하고 있다.

    성장주의 관료 인선 유감

    이렇게 한국 현대사는 개발독재하에서 산업화, 직선제 민주주의하에서 시장화 단계를 거쳐 바야흐로 경제민주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사실 필자가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면 무슨 경제에 정치 논리를 끌어들이느냐고 반문하던 것이 불과 수년 전 우리 사회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젠 누구나 경제민주화를 얘기한다. 역사 전환점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고 보수정당 지도자로서 과감하게 경제민주화를 앞세운 것이 박근혜 대통령 탄생의 주요 요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의지에 의문이 일고 있다. 박근혜 캠프 경제민주화 공약의 상징이던 김종인 박사를 더는 볼 수 없게 됐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가 제시한 국정 목표에서 경제민주화가 빠졌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 경제팀 면면을 보면 경제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인사들이다. 이러니 경제민주화는 한낱 선거용 구호였고, 정권을 잡았으니 용도 폐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경제민주화 관련 세부 정책을 추진 과제에 포함했으니 상관없다”는 인수위 측 주장은 매우 안이한 인식을 드러낸다. 경제민주화는 재벌 등 거대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 싸우며 추진해나가야 하고, 오랫동안 형성된 관행과 의식을 혁파하면서 이뤄나가야 하는 지난한 과제다. 또한 입법 과정에서 각종 로비는 물론, 성장우선론과 시장주의, 경제위기론, 속도조절론 등 수많은 반론을 뚫고 나가야 한다. 추진 의지가 강하지 않으면 시행 과정에서 정책이 유명무실화되는 일도 다반사다. 과거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가 정권 초기 재벌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내 후퇴하고 재벌 힘이 더 세졌던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정부가 국정 최우선 목표로 천명해 힘을 싣지 않는다면 경제민주화 정책은 제대로 실현하기 힘들다.

    경제민주화 벌써 퇴색하는가

    조원동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사실 역대 정부에서 경제 관료들은 재계 등 기득권 세력의 지원을 등에 업고 경제민주화나 복지국가를 향한 개혁 정책에 저항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왔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추진하려면 경제 관료를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려면 강력한 경제민주화 사령부를 창설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지난 대선 기간 중에 ‘민주경제원’ 창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과거 경제개발이 국정 최고 목표이던 시기에 경제기획원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중심으로 각 부처를 통솔했던 것처럼, 예산권과 정책조정권을 가진 강력한 ‘민주경제원’이 경제민주화 5개년 계획을 추진해나가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인수위가 준비한 정부조직 개편안에는 물론, 경제팀 인사에서도 이러한 문제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경제팀을 이끌어나갈 현오석 경제부총리 후보자와 조원동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은 경제 관료 출신으로, 경제민주화와는 배치되는 시장주의, 성장 우선 경제관을 가진 인물들이다. 예를 들어, 현 후보자는 서비스산업 선진화를 위한 규제 완화를 매우 강조하는데, 대형마트에 대한 영업규제를 반대하기도 하고 영리병원 확대를 주장하기도 했다. 조 수석의 경우, 부자 증세에 반대하고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는 뜻의 줄임말) 실천을 주장했다.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래서 ‘인사가 만사’라 하지 않는가. 이런 인물에게 경제 정책을 맡기고 어떻게 경제민주화를 하겠다는 것인지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이런 비판을 염두에 뒀는지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경제민주화를 다시 꺼내들었다. 경제민주화를 잊지 않고 명시적으로 거론한 것은 참 다행이다. 그런데 취임사에 나타난 경제민주화에 대한 인식은 너무 미흡했다. “경제부흥을 위해 창조경제와 경제민주화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해 경제민주화를 경제부흥 수단으로 설정하더니, 또 “창조경제가 꽃을 피우려면 경제민주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해 경제민주화를 창조경제 수단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경제민주화를 이뤄야 경제부흥도, 창조경제도 가능하다는 인식은 올바르다. 일각에서는 경제민주화가 마치 일자리 창출이나 경제성장과 배치되는 양 얘기하고, 경제민주화보다 성장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렇게 경제민주화와 성장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시각이다. 경제민주화는 무조건적 성장지상주의를 반대하는 것이지, 성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력 집중과 마구잡이식 규제 완화는 언제나 경제위기를 초래했다.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안정된 성장을 이루려면 경제민주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박 대통령은 경제부흥이나 창조경제를 최고 공약으로 내세우고 당선된 것이 아니다. 경제민주화를 내세워 당선된 것이다. 그만큼 국민에게는 경제민주화가 절박한 관심사였다. 무엇을 위한 수단이기 이전에 그 자체가 가진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朴 대통령, 국정 목표로 확인해야

    취임사와 관련해 더 아쉬운 점은 경제민주화 내용에 관한 협소한 인식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공정한 시장질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불공정행위 근절 등을 언급했다. 이런 것이 경제민주화의 주요 부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이미 고도로 진행된 경제력 집중을 해소하려는 노력이나 불공정행위를 유발하는 왜곡된 경제구조를 개혁하려는 시각이 결여됐다. 이런 정도의 정책 목표는 과거 정부에서도 항상 내세웠으며, 구조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행위 규제만으론 정책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과거 경험이 이미 말해주고 있다. 나아가 금융민주화와 노동민주화에 관한 인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점도 문제다. 무엇보다 경제민주화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사회구조 변화를 요구하는 역사적 과제라는 인식이 아쉽다.

    박근혜표 경제민주화는 벌써부터 좌초될 위험해 처한 듯하다. 더 늦기 전에 대통령이 경제민주화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경제민주화가 여전히 국정 최고 목표임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 얼마 전 필자는 국민경제자문회의를 경제민주화추진위원회로 개편하고, 김종인 박사를 의장에 임명하는 것을 한 가지 방안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가 절실한 국민 처지에서 대통령의 인식 전환만 기다릴 수는 없다. 정치민주화와 마찬가지로, 경제민주화 역시 궁극적으로는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의해 이뤄진다. 경제민주화 시대를 열게 한 것도 국민 요구였으며, 이를 진척시켜 나갈 힘도 국민 요구와 참여에서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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