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6

2013.02.25

‘千金勿傳’(천금을 줘도 팔지 마라) 도장 꾹…컬렉터 스타일 아니거든

자신이 아꼈던 서화작품 후손이 영원히 간직하길 바라는 마음 왜곡

  •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입력2013-02-25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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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金勿傳’(천금을 줘도 팔지 마라) 도장 꾹…컬렉터 스타일 아니거든

    그림1 장경의 가짜 ‘장포산진적첩’에 수록된 ‘운산소사’. 그림2 장경의 ‘산수’.

    ‘뻐카충’ ‘넘사벽’ ‘불금’은 어느 나라 말일까. 모두 인터넷 신조어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같은 연령대가 아니면 소통이 어렵다. 미술 작품에도 세대 차이나 시대 차이가 분명히 있다. 얼핏 완벽해 보이는 가짜도 원작자에 대해, 그리고 원작자가 살던 시대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위조한 게 많다.

    2010년 10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열린 ‘명청시대 회화’전에서 필자는 위조자의 기만전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을 발견했다. 위조자는 교활하게 컬렉터 생각이나 가치관을 모르는 사람에게 서슴없이 거짓된 정보를 전달했다. 청나라 화가이며 ‘국조화징록’ 저자로 이름난 장경(張庚·1685∼1760)이 1750년 그린 ‘장포산진적첩’이 그렇다. 이 전시에 나왔거나 도록에 실린 ‘장포산진적첩’ 작품은 모두 가짜다(그림1).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원이 소장한 장경의 1746년 작품 ‘산수’(그림2)와 비교하면 바로 알 수 있다.

    거듭 위조된 ‘장포산진적첩’

    ‘장포산진적첩’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거듭 위조됐다. 중국 가짜 작품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 미술시장에 맞게 다시 위조된 것이다. 위조자는 가짜 ‘장포산진적첩’을 진짜로 속이려고 남은 페이지에 김정희(1786∼1856) 글을 위조해 첨가했다. 김정희 글은 그가 제주에서 귀양살이할 때와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뒤인 1849년 두 번에 걸쳐 쓴 것처럼 위조됐다. 여기서 위조자는 글 내용이 김정희 생애와 어느 정도 부합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병든 그가 가족에게 이 작품들을 ‘천금을 줘도 팔지 마라(千金勿傳)’고 당부한 것처럼 꾸몄다. 글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는 원나라 대(大)화가인 예찬과 황공망 이후 최고 명품으로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마라. 또 그런 사람이 아니면 천금을 줘도 팔지 마라. 동해낭현(김정희의 별호)이 평생 보배로 여기며 즐겼다” “이는 내가 제주도에서 병이 심했을 때 가족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제 돌아와 죽을 고비 끝에 다시 보게 됐다. 옛날 달빛은 여전해 나무에 걸린 달은 평소와 다름없다. 지금 다시 병든 몸 하루살이처럼 기댈 곳 없어 한탄스러운데 마음에 와 닿는 그림이 있어 다시 여기에 몇 자 쓴다. 설령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지 않더라도 권돈인에게만큼은 한 번 보여줘도 괜찮다. 내 동생과 아들은 알아둬라. 1849년 음력 4월 20일에 완당이 용산의 선산제실에서 몇 자 쓴다”(그림3).



    ‘그림3’ 글씨를 김정희의 ‘묵지당선첩발’(그림4)과 자세히 비교해보면, ‘그림3’은 들어가는 필획에서 붓을 눌렀다 앞으로 튕기는 김정희 필법을 전혀 구사하지 못했다. ‘그림3’은 추사체의 겉멋만 따라한 가짜다.

    ‘千金勿傳’(천금을 줘도 팔지 마라) 도장 꾹…컬렉터 스타일 아니거든

    그림3 김정희의 가짜 ‘장포산진적첩’ 발문. 그림4 김정희의 ‘묵지당선첩발’.

    김정희는 담계 옹방강(翁方綱·1733∼1818)을 통해 소식(蘇軾·1037∼1101)을 제대로 배웠다. 소식을 보배로 여겼던 옹방강은 자신의 호를 ‘소재(蘇齋)’라고 했고, 사는 집을 ‘보소실(寶蘇室)’이라고 불렀으며 이를 도장으로 찍었다(그림5). 김정희 또한 옹방강을 보배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집을 ‘보담재(寶覃齋)’라 했다. 사람들은 김정희를 소식에 비유했고, 김정희 또한 자신을 소식에 빗댔다. 김정희의 서화작품 수집에 대한 생각은 분명 소식과 옹방강의 영향을 받았을 터. 그러니 ‘천금을 줘도 팔지 마라’고 했을 리 없다.

    소식은 친구인 북송 화가이며 대(大)컬렉터였던 왕선(王詵·1036~?)에게 써준 ‘보회당기’에서 서화작품 수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당시 내가 어렸을 때 서화작품을 좋아해 내 집에 있는 것은 잃을 것을 두려워했고, 남의 손에 있는 것은 나한테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두려워했다. 나중에 스스로 웃으며 ‘내가 부귀영화는 사소하게 여기면서 글씨는 중시했고 죽고 사는 것은 가벼이 여기면서 그림은 중하게 여겼으니, 이 어찌 거꾸로 되고 어긋나서 그 본심을 잃은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좋은 것이 있으면 때때로 또 그것들을 수집했지만 남이 가져가더라도 다시는 애석해하지 않았다. 비유컨대 연기와 구름을 본 것이고, 온갖 새 소리를 들은 것이다. 어찌 내가 서화작품을 쾌히 받아들이지 않을까마는, 잃어도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화작품은 나의 즐거움일 뿐 근심은 되지 않았다.”

    ‘千金勿傳’(천금을 줘도 팔지 마라) 도장 꾹…컬렉터 스타일 아니거든

    그림5 옹방강의 도장 ‘소재’와 ‘보소실’. 그림6 옹방강의 도장 ‘자손보지’와 ‘영보용지’.

    생명처럼 여겼지만 집착하지 않아

    ‘千金勿傳’(천금을 줘도 팔지 마라) 도장 꾹…컬렉터 스타일 아니거든

    그림7 ‘천금물전’ 도장이 찍힌 정선의 가짜 ‘척재제시’.

    소식 이후 컬렉터들은 서화작품 수집을 ‘연기와 구름을 본 것이다(煙雲過眼)’라고 했다. 서화작품을 때로 생명처럼 여겼지만 집착하지는 않은 것이다. 나아가 서화작품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도 초연했다. 안평대군(1418~1453)은 10여 년간 수집을 통해 “물건이 이뤄지고 훼손되는 데 때가 있고, 모이고 흩어짐에 운명이 있다. 오늘 이뤄지고 다시 후일에 훼손되는 것을 어찌 알겠으며, 그 모이고 흩어짐 또한 어찌 될지 모른다”고 탄식했다.

    한편 옹방강의 도장에는 자손들이 영원히 간직하길 바라는 의미의 ‘자손보지(子孫保之)’와 ‘영보용지(永保用之)’가 있다(그림6). 또한 컬렉터들에겐 ‘연운과안(煙雲過眼)’과 함께 ‘자손보지’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들은 서화작품을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면서도 집착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자손들이 영원히 지켜주길 소망했다.

    ‘천금을 줘도 팔지 마라’는 건 기본적으로 컬렉터 정서가 아니다. 컬렉터는 자신이 아꼈던 서화작품을 자손이 영원히 간직하길 바랐지, 천금에도 절대 팔지 마라는 뜻을 가졌던 건 아니다. 속담에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고 했다. 비슷한 듯해도 절대 같지 않은 게 품격이다. 흥미로운 것은 ‘천금물전(千金勿傳)’이 도장으로도 새겨졌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봤던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정선의 그림 가운데 ‘천금물전’ 도장이 찍힌 것은 모두 가짜다(그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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