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5

2013.02.18

“장애는 날 옭맸지만 삶을 풍요롭게 한 원동력”

201번째 책 낸 고정욱 아동문학가

  • 이윤진 객원기자 nestra@naver.com

    입력2013-02-18 0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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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는 날 옭맸지만 삶을 풍요롭게 한 원동력”
    “나에게 장애는 말한테 가해지는 박차 같은 구실을 한다고 생각해. 계속 나를 뛰게 만드는 박차. 나를 자극하는 박차.”

    ‘열정의 근원’을 묻는 질문에 대뜸 장애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1년에 동화책 20여 권을 펴내는 다작 작가, 통산 300만 부 이상 판매 기록을 지닌 베스트셀러 작가, (사)한국장애인문화진흥회 이사직을 필두로 각종 장애인단체에서 일하는 장애인 활동가, 성균관대에서 강의하는 문학박사, 지난 한 해 전국을 누비며 200여 건 이상 강연회를 가진 인기 강사. 팔색조 같은 활동을 펼치는 고정욱(53) 작가는 자신의 두 다리를 부자유스럽게 옭아매는 ‘장애’를 삶의 자극이자 원동력이라고 규정하며 인터뷰 포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을 이루는 세 가지 정체성을 “아동문학가라는 가장 사랑스러운 직함과 아빠라는 가장 자랑스러운 이름, 그리고 인간 고정욱 본연의 모습인 남성 장애인”이라고 짚어냈다.

    “수많은 활동을 하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직함은 ‘아빠’라는 이름이야. 내가 해온 모든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없는 사람 세 명, 우리 애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았다는 사실만은 변할 수 없거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바뀌지 않는 내 마지막 보루이자 자랑이야.”

    가장 소중한 직함은 ‘아빠 고정욱’



    그래서 자식에게 “공부도 가르치고 먹여살리면서 좋은 영향도 주려고” 일을 한단다.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단다. 자식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단다. 신춘문예 등단 소설가에서 아동문학가로 영역을 바꾼 이유도 아이들 때문이라고.

    “우리 애들이 읽을 만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그래서 어떤 얘기를 쓸까 고민하다가 얻은 답이 ‘장애’야. 나 역시 장애를 겪는 사람이잖아. 장애에 대한 글을 쓰자고 결정한 다음 ‘어떤 장애에 대해 쓸까’를 고민했어. 주위에 ‘가장 장애인 같은 장애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뇌성마비 장애인’이라는 답이 나왔지. 그래서 첫 동화책 ‘아주 특별한 우리 형’(대교출판) 속 뇌성마비 장애인 종식이 등장한 거야.”

    한 살도 채 되기 전 앓았던 소아마비는 그에게 걷는 자유를 앗아가고 평생토록 지녀야 하는 1급 장애인 증명서를 안겨줬지만 아동문학가로 성공할 수 있는 계기도 제공한 셈이다. 첫 동화책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뒀다. 발간 후 6개월간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머물면서 화제 중심에 섰다.

    “잘될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대박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그는 곧이어 두 번째 책을 준비했다. 맹인안내견 얘기를 담은 ‘안내견 탄실이’(대교출판)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처음 책과 더해지면서 그의 인기는 높아져 갔다. 그리고 명실상부한 ‘베스트셀러 동화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대교출판) 주인공 이희아와 만나게 됐다.

    “하루는 서울 서대문종합사회복지관의 이청자 관장님이 나를 찾아와 ‘손가락이 네 개 있는 애가 피아노를 쳐요’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하면서도 가봤지. 그랬더니 정말이더라고.”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는 그를 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 제조기’로 각인시켰을 뿐 아니라 인세로 기부한다는 그의 나눔 철학을 실천하는 계기도 됐다. 출판사, 작가, 그림작가는 책이 팔릴 때마다 인세 수입을 받지만 정작 주인공 희아에겐 얼마 안 되는 아이디어비밖에 돌아가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다 생각해낸 방법이다. ‘인세 기부’는 그 후 다른 책에서도 이어져 그에게 ‘기부하는 동화작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베스트셀러 제조기의 행운은 계속됐다. 2004년 MBC TV ‘느낌표-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에 ‘가방 들어 주는 아이’(사계절)가 선정된 것. 휠체어를 탄 그의 모습을 방송으로 접한 이들이 ‘고정욱’이란 이름에 관심을 갖고 그의 책을 찾기 시작했다. 연타석 홈런을 날린 셈이다.

    “장애에 관한 얘기를 쓰면서 그동안 장애인으로 살아오며 쌓아뒀던 울분과 설움이 다 쏟아져 나온 거야. 어렸을 땐 내 유일한 흠이 장애라고 생각했거든. ‘걸을 수만 있다면…’ 하고 억울해했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지나가는 사람마다 나를 보면서 혀를 차고, 수학여행도 못 가고, 가고 싶은 의대도 못 가고, 군대도 못 가고, 취직도 못 하고, 결혼할 때도 반대에 부딪혔던 게 너무 억울했거든.”

    하지만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동화를 쓰면서 억울함과 안타까움이 해소되는 경험을 하게 됐다.

    “내 재주를 아까워하면서 장애를 원망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깨달은 거야. 장애 때문에 인생이 거지 같아진 것이 아니라, 장애 아픔을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다른 재능이 옵션으로 주어진 것이라 생각하게 됐지. 예전엔 성경을 읽으면서 기적을 바랐어. 예수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일어나 걸어라’고 말씀하시는 기적을 바랐는데, 지금은 아니야. 그런 얘기를 들어도 ‘그냥 냅둬유. 딴 사람이나 걷게 만들어유. 그냥 이렇게 소명을 다하고 갈 거예유’ 하고 말이야.”

    고난과 역경 극복 모두가 감동

    “장애는 날 옭맸지만 삶을 풍요롭게 한 원동력”

    자신의 201번째 책을 들고 활짝 웃는 고정욱 작가.

    그는 얼마 전 201번째 책 ‘나 집에 가야 해’(BF북스)를 펴냈다. 1969년 국내 최초 점자도서관인 한국점자도서관을 설립한 고(故) 육병일 관장의 삶을 어린이 시각에서 쉽게 풀어 쓴 책이다. 201번째라는 숫자는 그가 다작 작가임을 알리는 의미도 있지만, 그만큼 그의 책을 내고자 하는 출판사가, 그의 글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외 20여 개국에서 번역·출간돼 국경을 넘어선 인기를 누리는 비결을 물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장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해.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삶을 포기하는 대신 장애를 딛고 일어나 보람과 기쁨을 만들어내는 얘기는 남녀노소가 좋아하는 인류 보편적 내용이라는 거야. 누구나 자기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들고 싶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지.”

    그를 아동문학가 길로 이끌었던 자녀들은 지금 고등학생, 대학생으로 자랐다. 자녀들의, 그리고 그의 책을 즐겨 읽던 독자의 성장에 따라 그의 관심도 ‘청소년 문제’로 옮겨갔다. 2009년 발표한 첫 성장소설 ‘까칠한 재석이가 사라졌다’와 그 후속작인 ‘까칠한 재석이가 돌아왔다’(이상 애플북스)는 그 성과다. ‘가장 한국적인 청소년 소설’이라는 호평을 받은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는 앞으로도 더욱 재미있고 다양한 주제로 계속 전개될 예정이다. 또한 지천명을 넘어선 그는 동년배 아버지를 위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밝혔다.

    “남편, 아버지로 살아가기가 참 힘들거든. 기회가 되면 힘들게 살아가는 50대 아버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얘기를 풀어보고 싶어.”

    50여 년에 걸친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통해 전 세계 독자에게 공감을 얻는 수많은 주인공을 만들어낸 그라면, 20여 년 동안 쌓아 올린 ‘아버지 고정욱’의 경험을 통해 세상 아버지들을 울리고 웃길 기막힌 아버지 상(像)을 그려낼 수 있으리란 기대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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