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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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법고시 난민 12년 외로운 난민 심정 잘 알죠”

아산사회복지재단 사회봉사상 수상 이호택 피난처 대표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12-11-26 1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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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사법고시 난민 12년 외로운 난민 심정 잘 알죠”
    이호택(52) ‘피난처’ 대표의 첫인상은 까칠했다. ‘피난처’는 전쟁이나 박해 등의 위험 때문에 우리나라로 피난 온 외국인, 즉 난민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난민인정 신청, 행정소송 등을 지원하는 기독교 비영리단체다. 3년 전 취재 차 그를 만났는데, 난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대뜸 “정부과천종합청사 앞에서 난민집회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그곳에 가서 난민들을 직접 만나본 뒤에야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덕에 난민 상황을 알게 됐다.

    말보다‘행동’을 중시하는 그가 최근 부인 조명숙 여명학교(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 교감과 함께 아산사회복지재단에서 주는 사회봉사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받을 사람이 받는구나’ 싶으면서도 서울대 법학과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에 새삼 눈길이 갔다. 그는 왜 인권운동가가 됐을까.

    11월 2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피난처’를 찾았다. 사무실에는 간사와 대학생인턴 10여 명이 있었다. 사무실 벽면엔 난민을 도와주겠다는 문구와 난민 인정자 관련 기사가 붙어 있다. 인턴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낡은 와이셔츠 차림의 이 대표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소탈하게 잘 웃기도 했지만 이야기 도중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기도 했다.

    ▼ (3년 전) 기사를 쓴 뒤 “난민까지 포용하면 나라가 혼란스러워진다” “정부에서 난민을 지원하기엔 경제적으로 부담스럽다”는 비판을 들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부가 그 사람들에게 밥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생명에 위협을 받으면 어디든 피난할 수 있는 것이 인간 권리이므로, 그걸 인정해주자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 땅에서 일하는 게 마음에 안 들면 그 사람들이 번 만큼 세금을 거두면 됩니다. 난민이 노동시장을 침해한다고 생각되면 그 나라 언어학당, 식당 같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면 되고요. 우리나라에 없던 문화가 생기면 사회가 더 풍요로워지지 않겠어요. 우리나라에서 도움 받은 난민들 나라에서 자원개발이나 경제 개발이 이뤄질 경우 아무래도 도와준 우리나라가 참여하는 데도 유리할 테고요. 또 우리가 언제 어느 순간 그 사람들처럼 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잖습니까.”



    # 피난 가능한 인간 권리

    ▼ 대표님이 예전에 “난민 신청자가 일할 수 있는 법적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살길이 막막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최근 난민법이 통과돼 상황이 좀 나아졌습니까.

    “개정 난민법이 통과해 내년 7월 1일부터 시행됩니다. 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난민 신청자 범위가 확대됐죠. 정부가 난민을 위해 의료, 교육, 주거 등을 지원할 수 있다는 ‘근거조항’도 마련했고요. 아무래도 난민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지 않을까요.”

    ▼ 정부가 접근성이 떨어지는 영종도에 난민지원센터를 세운다고 해서 논란이 있었는데요.

    “내년 6월 완공될 예정인데, 난민 관련 예산 대부분을 거기에 투입했죠. 일단 이렇게라도 난민 100여 명이 3~6개월 체류할 수 있는 시설이 만들어진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앞으로 난민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 더 나은 단계로 발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 난민이 아닌데도 체류 연장이나 취업을 하려고 난민 지위를 신청하는 사람이 급증해서 문제입니다. 난민신청자가 2010년 423명에 불과했는데 2011년에는 1000명에 육박했어요.”

    ▼ 대표님 학창 시절이 궁금한데요. 법대는 왜 갔나요.

    “그냥 사회정의를 위해서 갔어요(웃음). 아버지가 말단 경찰이어서 그랬는지, 어릴 때부터 판검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성격이 순한 편이고 노력하면 성적도 좋게 나오니까, (성적을) 떨어뜨리긴 싫더라고요.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사실 아버지 한풀이 같은 거였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법대 들어가면 동네 사람들이 다 축하해줄 거라고, 아마 화환 보내주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런 사람은 없더군요(웃음). 입시 위주로 산 세대라 다른 건 못 하고 자랐습니다. 다만 고등학생 때 전주남문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에서 한상렬 목사 지도로 해방신학을 접했습니다. 그때 좌우명을 ‘험한 길을 따르리라’고 정해서 지금까지 바꾸지 않고 있죠.”

    ▼ 감당하기 어려운 좌우명 아닌가요.

    “소수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분들은 그렇게 사시더군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지하서클’에서 활동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학생회 대의원으로 열성적으로 일했는데, 당시 회장이 유시민 전 복지부 장관이었어요. 집에서 반대가 심했죠. 아버지가 정보과 형사였거든요. 그나마 다행인 건 전주에서 전근 온 아버지는 서초경찰서에 계셨고 저를 관할하는 곳은 관악경찰서였습니다. 그러다 경찰 감시가 너무 심해 활동이 어려워진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어요. 79학번으로 94년까지 공부했는데 잘 안 됐습니다.”

    ▼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오른손으로 글씨를 삐뚤빼뚤 써 보이며) 제가 원래 글씨를 반듯반듯 잘 쓰던 사람인데 심리적으로 부담이 돼 그런지 손이 떨리고 땀이 나서 시험을 볼 수 없었어요. 그럼 왼손으로라도 쓰는 연습을 하면 되는데 그건 또 싫더군요. 사법시험이란 것이 어렵긴 해도 열심히 하면 되거든요. 서울대 공대 다니던 동생도 사법시험 합격해서 지금 변호사로 활동하니까요. 근데 서울대 법학대학원에서 노동법을 공부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공부했는데도 안 되더군요. 당시 부모님한테 손 벌리기가 어려워 친구들이 준 돈으로 생활했습니다.”

    ▼ 친구들이 돈을 왜 줬나요.

    “제 눈빛이 맑잖아요(웃음). 친구가 사회정의를 실현하려 노력하는데 잘 안 되는 것 같으니까 어떤 녀석은 3만 원도 주고 또 어떤 녀석은 10만 원도 주더군요. 10년 이상 그렇게 난민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내하는 것만이 미덕은 아니고 오히려 용기가 없어서 다른 길로 못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공부를 접었죠.”

    ▼ 그 이후 밥벌이는 어떻게 했나요.

    “친구가 하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조수로 일했습니다. 나이가 많으니 취직이 잘 안 되더군요. 일을 하긴 하는데 기분은 영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사람과 나는 사명이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열정을 불태울 곳을 찾았고 외국인노동자에 주목했습니다.”

    # 친구에게 생활비 받으며 산 ‘고시 난민’

    ▼ 인권에도 여러 분야가 있는데 외국인노동자에 주목한 이유는 뭔가요.

    “나도 사법고시 난민 12년 외로운 난민 심정 잘 알죠”

    전쟁이나 박해 등의 위험 때문에 한국으로 피난온 ‘난민’들이 생존권을 위한 취업허용을 주장하고 있다.

    “대학 때 봉제공장에 위장취업했는데, 노동자 대부분이 소망 없이 어렵게 살더군요. 그래서 노동자를 지원하는 일을 하자 싶어서 봤는데, 한국 노동자가 있던 자리에 외국인노동자들이 있더라고요. 1994년부터 2006년까지 법률사무소에 다니며 생활비는 해결하고 (외국인노동자들을) 도와줬습니다. 그러다 일이 커지면서 법률사무소에서 나와 백의종군한 거죠(웃음). 저는 주도면밀한 사람이 못됩니다. 외국인노동자를 돕다 거기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조선족에 눈길이 갔고, 조선족을 도우려고 중국에 갔다 탈북자들을 만났죠. 결국 그들을 돕기로 작정하고 국경을 넘다 베트남 경찰에게 고문도 당했습니다. 그러다 탈북자 말고 외국인 난민도 많다는 걸 전해 듣곤 가장 험한 길을 가는 난민을 지원하기로 한 겁니다. 그 덕분에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난민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은 2009년 말 세계에 난민 4200만여 명이 있다고 추산했다. 우리나라는 2012년 6월 현재 291명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동안 그가 난민 신청을 도와준 1500여 명 중 난민 지위를 받은 사람은 100여 명이다.

    갑자기 그가 “미안하지만 할 일은 해야 한다”며 사무실에 딸린 방으로 들어가더니 기타를 가지고 나왔다. 퇴근 준비를 하던 간사, 대학생인턴들이 인터뷰가 진행되는 테이블에 모여 찬송가를 불렀다. 하루 일과를 끝내면 이렇게 ‘피난처’만의 방식으로 하루를 마감한단다.

    ▼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요.

    “이 이야기는 잘 안 하지만 이 일을 하는 건 신앙 때문입니다.”

    ▼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는 없었나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볼 때 좀 그랬습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누추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거든요. 여자를 더듬는 사람도 있고, 숨겨둔 돈으로 오입질하는 사람도 있고, 먹여주고 재워주면 왜 더 안 주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고…. 한 번은 탈북자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는데, 한 탈북자가 자신의 생일을 안 챙겨준다고 불평하더군요. 참, 힘도 빠지고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 속성이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넘기죠.”

    ▼ 결혼을 늦게 한 것 같은데.

    “사람들을 돕다 보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일부러 안 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은 이유로 결혼을 안 한 여자가 있더군요. 여자 쪽에서 결혼 제안을 하기에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는데 자꾸 하자고 해서 결혼했죠(웃음). 그때 저는 서른아홉, 아내는 스물여덟이었어요. 결혼한 뒤 4년 동안은 활동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까 싶어 아이 낳을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러다 인생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고, 제가 난민을 돕듯이 누군가 내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겠나 싶어 낳았는데, 아이들이 지금 초등학교 4학년, 6학년입니다(웃음).”

    ▼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나요.

    “한 달에 세후 130만 원 정도 받아 그럭저럭 삽니다. 어머니가 일흔여섯 살인데 제가 어머니를 모시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아직도 저를 돌봐주세요. 가끔 어머니가 웃으며 푸념도 하시지만, 일정 수준 이상 갖추고 살려면 정작 하고 싶은 일은 못 하잖아요. 생각해보면 뭔가를 놓을 때 느끼는 기쁨도 큽니다.”

    # 상금으로 난민 커뮤니티센터 추진

    ▼ 경제적으로 성공한 친구들을 보면 자격지심이 생기진 않나요.

    “다 똑같이 생겼는데 비교할 것도 없죠. 친구들은 ‘우리는 성공한 것 같지만 공허하다, 우리 대신 진실한 삶을 살아줘 고맙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렇고(웃음).”

    ▼ 난민 활동과 관련해 계획한 게 있나요. 의식주를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잠잘 곳 주고, 먹을 것 준다고 해도 마음의 상처는 회복이 안 되더군요. 미래를 꿈꾸는 장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이번에 받은 상금으로 난민들을 위한 커뮤니티센터를 만들 생각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들어온 난민들은 에디오피아, 나이지리아, 미얀마, 콩고, 라이베리아, 우간다, 파키스탄, 이란 등 10여 개 나라 출신이에요. 그들에게 의미 있는 삶을 찾아주는 게 가장 시급한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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