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6

2012.09.24

중고명품에 빈티지 느낌 팍!

불황 깊을수록 국내 중고명품시장 지속적인 성장

  • 글 | 이윤진 객원기자 nestra@naver.com

    입력2012-09-24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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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명품에 빈티지 느낌 팍!
    외국계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이경남 씨는 회사 내에서도 소문난 명품족이다. 계절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트렌드에 맞춰 늘 ‘신상’을 선보이는 그의 알뜰 쇼핑 비법은 바로 중고명품매장 이용. 중고명품시장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기 전인 2000년대 초반부터 서울 청담동에 자리한 중고명품매장 G숍 단골이었다는 이씨는 “아무리 명품이라도 오래 쓰면 질리게 마련이라 미련 없이 처분하는 편”이라면서 “물론 살 때 가격을 생각하면 아깝지만 집에 쌓아놓는 것보다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처분한 돈으로 신상이나 중고명품을 구입하면 그만큼 알뜰한 쇼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씨처럼 좀 더 알뜰한 방법으로 명품을 구입하기를 원하는 여성이 늘면서 중고명품시장은 한 해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국내 중고명품시장은 전체 5조 원 규모의 명품시장에서 25%인 1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역, 논현동, 청담동 등 강남 일대에만 30여 곳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치동 사모님’이 밀집한 은마아파트 상가에 중고명품매장 7개가 자리한다. 중고명품 거래가 대부분 온라인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다.

    신상의 50~70% 가격에 거래

    중고명품매장을 이용하는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신상’보다 50~70% 저렴한 가격이다. 그것도 몇십 년에 걸쳐 사랑받는 스테디셀러가 많은 명품 특성상 ‘신상’과 디자인 차이가 별로 없다. 운이 좋으면 가격표도 떼지 않은 신상품을 만날 수도 있다. 뉴욕명품 강남본점의 이재영 대표는 “한 번도 쓰지 않은 새것이라도 소비자 손을 거치면 중고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선 시세의 50~70% 되는 중고가로 거래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반값으로 신상 백을 장만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똑같이 명품을 다룬다고 해도 명품매장과 중고명품매장의 차이는 크다. 당연하겠지만, 신상품만 다루는 명품매장과 달리 중고명품매장에는 신상품과 중고품이 병존한다. 명품매장은 자기 브랜드만 취급하지만 중고명품매장에선 국내외 명품 브랜드를 모두 다룬다. 각기 다른 브랜드에서 각기 다른 시기에 만든 다양한 제품을 망라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명품 만물상’과도 같은 개념이다.



    손님과 주인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도 중고명품매장의 특징이다. 매장에서 상품을 구매할 때는 ‘손님’이 되지만, 직접 물건을 들고 와 매장에 판매하거나 위탁판매를 맡길 때는 매장 측이 ‘손님’ 처지가 된다.

    중고품 매입 과정에서 생기는 은근한 ‘밀당’도 중고명품매장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감정사 판정에 따라 정하는 중고 매입가에 만족하지 못한 손님과 매장 주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신경전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쳐주세요”라는 손님의 애원이 통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업계 불문율에 따라 정해진 가격이 있기 때문에 매장 주인 맘대로 중고 매입가를 조정할 수 없다. G숍 관계자는 “매장마다 다른 중고 매입가를 적용하면 중고명품시장 전체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정해진 가격대를 벗어난 거래는 하지 않는다”면서 “원하는 가격을 받을 수는 없어도 그 대신 ‘후려치기’를 당할 우려도 없으니 고객 처지에선 오히려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운영하는 중고명품매장에서 만난 감정사는 “중고명품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에는 좋은 물건을 더 많이 확보하려고 중고 매입가 경쟁을 하거나, 반대로 고객을 속여 터무니없는 가격을 붙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시장이 안정기에 들어선 이후부턴 일정한 시세가 형성됐다”고 말한다. 또 “중고명품은 대부분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매매가 이뤄지기 때문에 시세를 무시하고 싸게 매입한다거나, 반대로 다른 매장보다 비싸게 매입하면 금세 게시판을 타고 입소문이 돌아 결국 매장의 신뢰를 깎는 결과로 돌아온다”고 전하면서 ‘공정가’가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격은 브랜드와 모델명, 제품 출시년도, 상태, 색상, 크기, 부속품 여부 등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 등 이른바 ‘톱3’를 제외한 브랜드는 해당 모델을 출시한 지 1년 단위로 매입가가 큰 폭으로 떨어지고, 같은 모델이라도 색상과 디자인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식이다. 신상품 시세도 중요하다. 매장뿐 아니라 아웃렛과 병행수입업체의 가격도 중고품 매입가 시세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감정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역시 물건 상태다. 중고인 만큼 다소 구김이 있는 것은 상관없지만, 가죽이 벗겨졌다거나 눈에 띄는 스크래치라도 있으면 ‘B급’으로 감정 결과가 떨어지면서 10~15% 가격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보다 한발 앞서 중고명품시장을 형성한 일본에선 쇼핑하는 순간부터 중고명품시장에 팔 것을 염두에 두고 포장 박스와 가격표 등을 보관하면서 행여 상하기라도 할까 봐 고이 ‘모셔두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일부 상품은 2년 이상 대기

    중고명품에 빈티지 느낌 팍!

    한 중고명품 가게.

    중고품이 신상품 이상의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다. 에르메스 대표 상품인 버킨백의 경우,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도 2년 이상 기다려야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신상품에 가까운 중고품이라면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기도 한다. 물론 인기가 높은 색상과 사이즈에 한해서다. 하지만 그 외에는 같은 에르메스라도 중고품이 신상품을 넘어서는 가격을 받기란 불가능하다. 명품관에서 사서 곧장 중고명품매장으로 들고 온다고 해도 중고는 중고일 뿐인 것이다.

    ‘C사의 백은 사두면 돈이 된다’는 이른바 ‘샤테크’ 같은 재테크 개념도 통하지 않는다. 중고 매입가 책정 기준은 제조년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아무리 요즘 나오는 것과 똑같은 모델이라 해도 ‘몇 년도 제품인지’를 살핀 후 당시 시세 기준으로 중고 매입가가 책정된다. 그러니 아무리 상태가 좋아도 본전 이상을 받기는 어렵다. 외양이 중시되는 직거래라면 모를까, 전문가 감정으론 구매 당시 시세 이상으로 가격을 받기는 어렵다. 결국 ‘샤테크’로 돈을 버는 건 C사밖에 없다는 얘기다.

    시장이 커졌다곤 하지만 아직까지 중고명품이라고 하면 ‘남이 쓰던 걸 비싼 돈 주고 산다’는 인식이 강하다. 판매가보다 50~70% 저렴하다고 해도 기준이 되는 판매가가 워낙 높다보니 분명 ‘비싼 쇼핑’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다 보니 수십, 수백만 원을 들여 중고명품을 구입하는 것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중고명품시장은 해를 거듭하면서 성장하는 걸까.

    이 대표는 “가격 때문에 중고명품을 선호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예전에 단종돼 정규매장에선 구매할 수 없는 모델을 찾거나 중고에서 느껴지는 사용감이 좋다며 찾아오는 빈티지 마니아도 많다”고 전한다.

    명품 가방은 최고급 가죽으로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가죽 손상은 적고, 오히려 세월 흐름에 따라 변하는 가죽의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러다 보니 신상품에선 찾아보기 힘든 부드러움과 편안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태닝’이라고 하는 색변화가 이뤄지면서 자연스러운 멋이 배어나며, 사용 환경에 따라 색감에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명품 본고장인 유럽에선 길이 제대로 들지 않아 뻣뻣한 신상품보다 사용감이 묻어나는 빈티지 가방으로 스타일을 내는 쪽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대를 이어 사용한다’는 명품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저렴한 가격과 선택의 다양성, 거기에 빈티지의 멋까지 더해진 중고명품. 적은 돈으로 큰 효과를 보기에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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