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3

2012.09.03

토종 로펌들 죽느냐, 사느냐

시장 개방 이후 지식재산권 분야 집단소송 예상…“견딜 만하다” 의견도

  •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김민지 인턴기자 이화여대 경영학과 4학년 kimminzi4@naver.com

    입력2012-09-03 09: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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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종 로펌들 죽느냐, 사느냐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에서 외국인 고객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는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들.

    8월 1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재미있는 판결이 나왔다. 프랑스 유명 패션브랜드 ‘샤넬’의 대표가 경기 성남에 있는 유흥주점 ‘샤넬 비즈니스 클럽’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판결이었다. 결과는 샤넬 승리.

    재판부는 “유흥주점이 영업이나 광고를 통해 ‘CHANEL’과 ‘샤넬’ 상표를 무단 사용한 것은 명성을 손상한 행위에 해당한다”며 1000만 원 배상결정을 내렸다. 2010년 8월 대전에서도 명품업체 버버리 리미티드가 ‘버버리 노래방’ 업주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 소송에서도 250만 원 배상판결이 나왔다.

    재미있어 보이지만, 이런 소송을 접하는 법조계 분위기는 무겁다. 4~5년 후 우리 법률시장을 완전 개방하고 나면, 이와 같은 소송이 줄을 이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 대형 로펌 소속 중견 변호사는 “물론 극단적인 예다. 그러나 한국에 진출하는 외국 로펌들이 이런 식의 법률시장을 만들 가능성은 충분하다. 로스쿨 도입으로 변호사 수가 많아진 데다 외국 변호사들까지 들어와 무한경쟁에 접어들면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서는 ‘사냥꾼 로펌(변호사)’이 나올 게 분명하다. 앞선 사례 같은 상표권 말고도 사진, 영상, 활자 저작물 등에 대해서도 대규모 지식재산권 소송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징벌적 배상소송 늘어날 것

    미국, 영국 등 선진국에선 특허 등 지식재산권을 앞세운 소송이 이미 일상이 됐다. 수천억 원대 배상금을 요구하는 담배소송, 식품회사를 상대로 한 집단소송도 끊이질 않는다. 이런 소송이 국내에서도 시작된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후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우리 법률시장 상황은 이런 우려에 걱정을 더한다. 성재호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의 얘기다.



    “법률시장 개방은 일반 국민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겁니다. 특허와 같은 지식재산권 시장의 경우 특히 그렇죠. 요즘 같은 디지털시대에 IT(정보기술) 혜택을 안 받고 사는 국민이 어디 있나요? 외국 로펌들은 이런 분야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특히 징벌적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소송을 감당해낼 만한 능력이 우리 법조계(사회)에 있는가’인데,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국내 대형 로펌 소속 한 변호사도 “이미 외국 로펌이 국내에서 특허에 기반을 둔 집단소송이나 지식재산권 소송을 준비 중이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담배소송 같은 것도 더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라고 걱정했다.

    물론 이런 전망이 불필요한 걱정이라는 의견도 있다. 우리 법체계와 법률문화에서는 그런 식의 법률시장이 만들어지기 어렵고, 국내에 진출하는 대형 외국 로펌이 그런 시장에 매달리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법무법인 화우 윤호일 대표변호사는 “우리나라 법은 아직 징벌적 배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에서와 같은 천문학적인 집단소송은 벌어지기 힘들다”고 말했다.

    법률시장 개방이 가져올 변화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곳은 역시 국내 토종 로펌이다. 이미 수년전부터 법률시장 개방을 준비하면서 몸집을 불리고 체질을 개선해왔다지만, 변화하는 현실에 긴장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김앤장 소속 권오창 변호사는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외국 로펌들이 변호사 빼가기에 나설 가능성도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다. 특히 김앤장은 외국 로펌의 제1 경쟁상대가 될 것이다. 인력 영입 문제, 각종 자문과 소송 문제 등에서 김앤장과의 경쟁이 심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토종 로펌들 죽느냐, 사느냐

    김앤장 법률 사무소(왼쪽)와 법무법인 세종 사무실.

    국내외 법률 전문가 대부분은 국내 법률시장의 경우 토종 로펌이 상당 부분 지켜내리라고 본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해외 시장, 즉 우리 기업과 국가가 해외에서 수행하는 자문과 소송시장에서는 토종 로펌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데 입을 모은다. 100년 넘게 특허 등 지식재산권 분야에서 경험과 노하우를 쌓은 외국 로펌을 상대하기는 역시 벅차다는 것이다.

    최원목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는 “전통적인 국내 재판에서는 한국 로펌이 이미 상당한 수준의 경험과 노하우를 지녔다. 그러나 자본서비스 시장이나 국제거래, 지식재산권 시장에서는 우리 로펌의 경쟁력이 약하다. 치열한 경쟁과 도전이 전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재호 성균관대 교수도 “외국 로펌이 주로 관심을 갖는 분야는 지식재산권, 국제거래, 통상, 스포츠법, 엔터테인먼트법 같은 시장이다. 이런 건 시장규모가 건당 몇백억 원이 넘는다. 우리가 그동안 해온 민형사 소송과는 비교가 안 된다. 우리나라 로펌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봐야 할 때다. 대형 로펌들이 영입하는 판검사 출신 변호사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미국,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법률시장 개방을 5년간 유예했다.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 유예기간이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외국 대형 로펌들이 한국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사실상 한국법 시장에 이미 진출해 있다는 주장이다. 취재 중 만난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이런 얘기도 들려줬다.

    “2년쯤 전인가, 국내에서 진행한 대형 인수합병(M·A)건으로 협상테이블에 나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상대편에서 개인 변호사를 내세웠더라고요. 그래서 알아보니 외국 대형 로펌의 대리인이었어요. 사실상 무늬만 한국변호사였던 거죠. 요즘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사실상 법률시장이 완전 개방된 것이나 다름없죠.”

    외국 로펌, 2년 전부터 M·A 시장 진출

    법률시장 개방에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전문가는 우리 법률시장이 선진화하고 서비스 질이 획기적으로 높아지는 기회가 되리라고 전망한다. 위기가 곧 기회가 된다는 얘기다. 법무법인 세종의 김두식 대표변호사도 우려보다는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국내 로펌도 이미 국제화됐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할 정도의 법률서비스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기회가 될 겁니다. 해외 시장을 빼앗기리라고 우려하는 분이 많은데, 사실 법률시장이 개방되기 전부터 상당수 한국 기업은 외국 로펌과 일을 해왔습니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죠. 그렇다고 해외 부분을 우리 국내 로펌이 다 손 놓고 있는 건 아닙니다. 법무법인 세종을 포함한 많은 국내 로펌이 이미 네트워크를 갖추고 아시아, 유럽 등 세계 곳곳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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