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9

2012.08.06

“농업, 농촌, 농민이 살아야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

  • 한상진 기자 greenfish@donga.com

    입력2012-08-06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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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업, 농촌, 농민이 살아야 진정한 자주독립국가다”
    명함에서 꽃향기가 진동했다. 소모품인 명함을 비닐로 곱게 싼 것도 특이했다.

    “야생화인 옥잠화와 원추리에서 뽑은 향기예요. 전남 구례에 있는 어떤 양반이 이걸 개발했지. 지갑에 넣고 다니면 돈에서도 향기가 나요. 향기 때문에 나갔던 돈도 다시 돌아온다니까.”

    김성훈(73) 전 농림부 장관은 농사를 짓는다. 서울 강남 한복판, 빌라 옥상에 그럴듯한 밭을 가꿔놨다. 그는 자신을 도시농부라고 소개한다.

    김 전 장관의 밭에는 크고 작은 화분이 67개나 있다. 화분 종류와 크기가 다양한 만큼 심어놓은 먹을거리도 여러 가지다. 고추, 방울토마토, 상추, 부추, 들깨, 파프리카, 가지, 오이…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김 전 장관은 “‘내 꼬붕’이 운영하는 충북 괴산의 흙산림연구소에서 유기농 흙을 직접 공수해왔다”고 자랑했다.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학자인 김 전 장관은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했고 김대중 정부의 절반 동안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지금은 환경단체 ‘환경정의’에서 이사장을 맡아 유기농업을 설파하며 전국을 누빈다.



    친환경 유기농업만이 최선의 방법

    “2009년 상지대 총장을 그만둔 뒤 공직을 일절 맡지 않기로 했어요. 그만두면서 ‘더 먹고 싶을 때 그만두거라’라는 책도 냈고(웃음). 총장 시절에도 유기농업을 실천하느라 정신없었어요. 학교 식당을 아예 유기농 식당으로 바꿨지.”

    장관 시절에도 그는 농민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농업 문제에 매달렸다. ‘이동장관실’이란 걸 만들어 전국을 다녔고, 농민과 대화하고 토론하며 부대꼈다.

    “1998년 초인가 경북 봉화에 갔을 때가 생각나네. 담배농사 짓는 농민들이 수매가 올려달라면서 나를 가둬놓고 따졌거든. 근데 외환위기 뒤끝에 뭔 돈이 있어.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하나는 약속하마. 수매가는 못 올려주는 대신 내가 죽을 때까지 담배를 피우겠다’고. 농민들이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힌지 나를 풀어줬어요. 그 후로 내가 어딜 가든 농민들이 담배를 들고 찾아와요. 그래서 내가 아직 담배를 못 끊고 있지(웃음).”

    전남 목포가 고향인 그는 농부 아들이다. 그의 부친은 목포에서 농사를 지으며 협동조합장까지 지냈다. 그도 농민 지도자가 되겠다는 각오로 서울대 농대에 들어갔다.

    “리트머스 시험지 알아요? 산성도 측정할 때 쓰는 거. 내가 고등학생 때 그걸 가지고 우리 동네 토양을 검사했다고. 1953년부터 농업, 환경, 생명운동인 ‘4-H’운동도 했고. 그 공로로 2007년 제1회 자랑스러운 4-H인상을 받았죠. (가슴에 단 배지를 가리키며) 이게 그때 받은 건데, 참 자랑스러워.”

    농대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한얼’과 ‘농사단’이라는 농민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 방학 때마다 전남 진도군 작은 마을에서 농촌봉사활동을 했는데, 신승남 전 검찰총장 같은 후배를 데리고 다녔다. 1998년 장관이 된 뒤 그가 다시 이 마을을 찾았을 때 마을 어귀에 이런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40년 전 학생이 장관 되어 돌아왔네.’

    “거기가 용산마을인데요. 그때 찍은 사진을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가면 내가 만든 ‘용산마을의 노래’가 적힌 노래비도 있다고. ‘여~귀산 기슭에 아늑한 마~을’ 이렇게 시작하는 노랜데, 내가 만들었지. 내가 농촌봉사활동 다닐 때 초등학생이었던 사람이 지금 동네 이장이거든.”

    참고로 흔히 농민가라고 부르는 노래,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던 날~”로 시작하는 노래의 가사를 만든 사람도 김 전 장관이다. 그에 따르면 이 노래는 원래 그가 대학 시절 내내 몸담았던 ‘농사단’의 단가였다.

    자나 깨나 농촌 문제를 고민하는 그가 생각하는 우리 농업, 농촌 활로는 크게 세 가지다.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농업, 친환경 유기농업, 지방자치 분권제 시행. 그는 이 세 가지를 달성해야 먹을거리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다. 그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후변화 원인이 되는 이산화탄소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대안이 바로 친환경 유기농업입니다. 유기농업을 하는 토양은 대기 중에 포함된 이산화탄소 함량을 ha당 7.8t가량 땅속으로 포집하고 그만큼의 산소를 배출해요. 그리고 농약으로 범벅된 농산물에 소비자들이 감동하진 않잖아요.”

    ▼ 농업 문제와 지방자치 분권제는 무슨 관계인가.

    “우리 사회는 무늬만 지방자치다. 세금 20%만 지방에 내려가고 80%는 중앙정부가 쓴다. 기형적 구조다. 지방정부가 기획, 예산집행권을 가져야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방정부가 중앙정부 눈치를 보지 않고 정책을 입안, 집행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김 전 장관은 유기농업을 위한 몇 가지 실천과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유기농산물 소비를 생활화하자거나 유기농산물을 도회지 가정과 주변에서 각자 기르자거나, 남은 음식으로 퇴비를 만들자거나, 숲을 지키자는 것 등이다. 그에게는 종교나 다름없는 과제라고 했다.

    식량자급률 26%…남북교류 필요

    ▼ 친환경 유기농업을 특히 강조하는 이유는.

    “먹을거리 문제니까 당연하다. 게다가 식량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현재 우리 식량자급률은 26%도 안 된다. 예컨대 사료는 미국 의존도가 95%를 넘는다. 농산물 가격이 갑자기 오르면 경제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돈이 있어도 식량을 못 구하는 시대가 조만간 온다. 어떤 면에서는 식량자급률이 65%에 달하는 북한보다도 못하다. 그래서 나는 식량을 매개로 한 남북교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 식량을 통한 남북교류?

    “지금 우리나라는 쌀이 남아돈다. 미국에서 들여오는 의무수입량만으로도 창고가 터져 나간다. 현재 소비되는 밀가루의 10%만 쌀가루로 대체해도 큰 도움이 될 텐데, 쉬운 일이 아니다. 의무수입량을 북한에 지원하고 그 대신 북한에서 많이 나는 녹두나 콩을 받아오는 것도 방법이다. 연간 8조~9조 원에 이르는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로 만들어서 북한에 지원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도 방법이다. 퇴비는 우리가 대고 생산은 북한이 하고, 생산물은 나눠 갖고. 얼마나 좋은가.”

    ▼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데.

    “먹고사는 문제로 남북관계에 접근하면 관계가 훨씬 수월해질 수 있다. 물론 신뢰관계 구축이 중요하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상식 문제라고 생각한다.”

    ▼ 농협의 임무와 문제점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해왔다.

    “농촌에서의 경제사업은 사실 농협 몫이다. 그런데 잘 안 된다. 그래서 내가 싫은 소리를 많이 한다. 이제는 지주회사를 만들어 경제사업을 강화한다고 하는데, 잘되면 좋겠다. 농민을 위해서는 먼저 품목별 생산판매조합 육성이 절실한데, 여기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그래야 생산자와 소비자 간 신뢰관계를 쌓을 수 있다.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

    ▼ 마지막으로 농업과 농촌은 김 전 장관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 평생의 업이다. 세상이 뒤집어져도 꼭 필요한 일이고. 나는 농업이 없는 나라, 농촌이 없는 도시, 농민이 없는 국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이것이 없이는 결코 자주독립국가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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