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9

2012.08.06

상대 견제, 금메달 부담감에 죽을 맛

런던에서 고개 숙인 한국팀 에이스들

  • 영국 런던=유재영 채널A 스포츠부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12-08-06 10: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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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스들이 떨고 있다. 각 종목에 나선 에이스에게 연달아 불운이 겹치고 있다. 이들이 해내야 ‘금메달 10개, 종합순위 10위(텐텐)’ 그림이 완성되는데, 걱정이다. 상대의 집중 견제,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압박감과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실력을 떠나 심리적 부담감이 발목을 잡는다. 불안감은 곧 부상을 몰고 오기도 한다. 앞으로도 장담할 수 없다. 런던에 있는 에이스들이 위험하다.

    한국 남자 양궁의 대들보 임동현(26·청주시청). 남자 양궁 개인 세계기록을 보유한 세계 최강자다. 세계랭킹 2위지만 최근 2년간 페이스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양궁계가 남자 단체뿐 아니라 그간 올림픽에서 무관에 그쳤던 남자 개인전까지 휩쓸 것으로 기대한 이유는 바로 임동현이 있어서다.

    개막식 당일 7월 27일. 남자 양궁 개인전 64강과 단체전 16강을 가리는 랭킹라운드에서 임동현은 진가를 발휘했다. 70m 거리 과녁에 72발을 쏜 그의 점수는 699점. 자신이 5월 국제양궁연맹(IAF) 2차 월드컵에서 세운 세계기록 696점을 2개월 만에 경신했다.

    임동현의 페이스는 최상이었다. 초반 36발에서 10점 만점을 23발이나 명중시킬 정도였다. 경기가 벌어진 로드스 크리켓 그라운드 보조경기장에 있던 외신 기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한국 선수단 뒤편에서 취재하고 있던 기자에게도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우크라이나의 한 기자는 “임동현이 특수 렌즈를 끼고 있는 게 아니냐”며 제품명을 알려달라고도 했다. 이날 컨디션이라면 다음 날 벌어지는 남자 단체전 금메달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현장에 있던 몇몇 한국 기자는 “결선에 앞서 컨디션이 너무 좋은 것이 아니냐”며 우려하기도 했다.

    상대 견제, 금메달 부담감에 죽을 맛

    한국 남자 양궁팀. 왼쪽부터 김법민, 오진혁, 임동현.

    # 임동현, 어제와 다른 컨디션



    다음 날 단체전 결승. 불길하던 예감이 맞았다. 16강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남자 대표팀은 8강에서 우크라이나를 여유 있게 따돌렸다. 임동현, 김법민, 오진혁 세 선수가 8발씩 4라운드를 쏘는 단체전에서 227점을 쐈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문제는 8강전이었다. 임동현의 컨디션은 어제와 달랐다. 10점 과녁에서 조금씩 상하좌우로 흔들렸다. 미국과의 4강전. 첫 발을 김법민이 다소 불안하게 9점을 쏘자 임동현도 8점. 초반 감을 잡는 데 실패한 임동현은 2라운드 첫 발에서도 8점을 쏘며 추격에 빌미를 제공했다.

    초반 점수차를 벌리지 못한 한국팀의 예상치 못한 패배. 걱정하던 바람은 괴롭히지 않았지만 임동현은 심리적으로 흔들렸다. 임동현은 3, 4위전이 끝난 뒤 전날의 감각을 유지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어제까진 느낌이 좋았는데 오늘은 확실히 감이 오지 않았다.”

    랭킹라운드를 마치고 국내외 언론은 앞다퉈 임동현의 금메달 가능성을 100%로 점쳤다.

    보는 사람들이야 신이 났지만 정작 그는 더 흔들렸다. 불안감은 경기력으로 이어졌다.

    “선배 (임)진혁이 형과 후배 법민이한테 미안한 생각뿐이다. 처음 올림픽에 출전한 두 사람에게 금메달을 안겨줬어야 하는데 나 때문에 아쉽게 됐다.”

    남자 양궁 단체전의 올림픽 3회 연속 금메달을 이어가지 못해 가슴 아프다는 임동현. 개인전을 앞두고 마음의 짐은 여전히 무거워 보인다.

    # 박태환, 보이지 않는 손에 당했다

    수영의 에이스 박태환(23·SK텔레콤)에게도 7월 28일 뜻하지 않은 불운이 찾아왔다. 그의 높은 지명도가 ‘화’가 됐다. 전혀 이상이 없는 스타트 동작으로 실격 처리된 일을 사실상 ‘보이지 않는 손’의 의도적 견제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결정이 번복되긴 했으나 이미 결승전에 맞춰놓은 리듬은 완전히 깨졌다. 박태환이 초반에 승부를 건 이유다. 하지만 250m 이후 체력 저하로 자신의 장기인 막판 스퍼트를 보여주지 못하고 은메달에 그쳤다.

    4년의 기다림은 허무했다. 판정도 경기 일부인 것은 분명하나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억울한 점이 많았다.

    박태환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두 번의 부정 출발로 경기도 해보지 못하고 수영장을 떠난 악몽이 있다. 되살아난 고통의 순간은 참아내기 어려웠다. 한국 선수단 전체 사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그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값진 은메달을 따내고서도 취재진 앞에서 흘린 눈물이 그의 마음을 충분히 대변한다.

    남자 유도 간판 왕기춘의 꿈도 무너졌다. 금메달 가능성 99%. 한국 선수단 금메달 후보 중에서도 가장 가능성이 높다던 왕기춘은 메달 획득에 실패하고 4위에 그쳤다.

    징조는 있었다. 7월 20일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만난 왕기춘은 싱글벙글하면서도 적잖은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은메달에 머물렀기 때문에 스스로도 금메달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고 했다.

    세계랭킹 1위이자 한국팀 에이스인 그를 각국 상대들은 철저히 분석했다. 연속 한판승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정반대로 왕기춘은 7월 30일 유도 73kg 이하 체급 경기에서 8강까지 모두 연장전을 치렀다.

    기술과 스타일이 모두 노출된 것이다. 그러자 급해졌다. 당황스러워했다. 결국 4강에서 한 수 아래 상대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고 3, 4위전에서도 허무하게 패했다. 두 차례 올림픽에서의 실패.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적잖이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우생순’ 신화의 주인공인 여자 핸드볼 대표팀의 에이스에게도 7월 28일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축구로 따지면 대표팀 박지성 같은 존재, 김온아(24·인천시체육회)다.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7월 28일 예선 B조 첫 경기에서 ‘난적’ 스페인을 31대 27로 격파했다. 기쁨도 잠시, 승리가 확정된 경기 막판 김온아는 돌파를 시도하다 무릎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근육이 찢어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그 순간 경기장 전광판에 강재원 대표팀 감독의 얼굴이 비쳤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는 망연자실한 표정이 클로즈업됐다. 동료 선후배 선수들도 할 말을 잃었다.

    대표팀은 런던으로 떠나기 전, 스페인전에 ‘올인’했다. 지난해 세계선수권에서 패한 스페인을 잡아야 메달권 진입을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온아, 근육 찢어지는 큰 부상

    강재원 감독은 성균관대 남자 핸드볼 선수들을 가상의 스페인 선수로 가정해 2주간 피나는 적응 훈련을 했다. 남자 선수들에게 스페인 주력 3인방의 모습을 비디오로 보여주고, 연습 경기 때 유사하게 플레이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스페인전에서의 해법을 찾았다. 패스 속도를 높이고, 강력한 압박 수비로 상대를 밀어내는 맞춤 전략이었다.

    그 전략의 중심은 김온아였다. 모든 공격과 수비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사실상 팀의 ‘절반’이었다. 그런 김온아를 첫 경기에서 잃었다. 마지막 몇 분을 남기고 5~6점 차로 앞선 상황에서 강 감독은 잠깐 망설였다.

    다음 경기를 위해 김온아를 쉬게 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러나 현재 대표팀 내에서 김온아를 대체할 자원이 많지 않다. 순식간에 2~3점을 실점할 수도 있는 종목이 핸드볼. 강 감독은 김온아를 투입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강 감독은 경기 후 취재진 앞에서 자책했지만, 따지고 보면 김온아 역시 경기를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남은 예선 경기를 위해 동료들과 더 점검해야 할 부분도 있었고, 개인적 욕심도 있었다. 컨디션도 상당히 좋았다. 결과적으로 에이스로서의 책임과 자부심은 ‘비애’로 변했다.

    김온아가 들것에 실려 나갈 때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어린 선수들은 안절부절못했다. 21세 막내 레프트윙 조효비는 눈물을 보였다. 기둥의 부재를 실감한 것이다. 강 감독은 선수들이 김온아의 응급치료 장면을 보지 못하게 했다. 부상으로 고통받는 에이스가 그 상황에서도 수만 가지 부담을 갖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에이스에게 ‘끝나지 않은 올림픽’이 됐으면 하는 감독 마음이었다.

    여자 펜싱의 에이스 남현희(31·성남시청)도 같은 날 고개를 숙였다. 그 앞에 4년 전 악몽이 재현됐다. 3, 4위전 상대가 다름 아닌 숙적 이탈리아 베잘리였기 때문이다. 베잘리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여자 플뢰레 결승에서 남현희를 제압하고 금메달을 땄던 장본인이다.

    국제대회마다 남현희의 발목을 잡은 세계적인 펜싱 스타. 남현희는 베잘리와의 승부를 4년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승부를 펼쳤다. 그러나 상대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독이 됐다. 마지막 1초를 남기고 베잘리의 장기 기술을 경계하다 다른 기술로 결승 포인트를 허용했다. 한국 펜싱 스타에겐 ‘베잘리 징크스’가 ‘에이스의 비애’였다.

    에이스는 화려하지만 그 대신 고통이 따른다. 에이스가 된 것이 운명이라면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운명이다. 심판이 아니라 설령 운명이 장난을 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게 순리고 에이스의 자격이다.

    그렇다면 두려워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한국 에이스들이여, 다시 일어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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