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4

2012.07.02

레임덕은 없다

17회 세종시

  • 입력2012-07-02 13: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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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서 군은 거대 집단으로 통치자의 세력 기반이다. 통치자는 당과 군 양축을 지배하면서 적절히 운용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과거 국방부 장관이 초선 국회의원에게 꼼짝 못한 채 온갖 수모를 당하고 군 장교가 반정부 시위대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았던 한국이 정상이 아니었다면, 인구 2천 몇백만 명에 현역과 예비병력을 합해 600만 명 가까운 군대를 거느린 북한도 비정상이다. 제아무리 김정일이 철권통치로 군을 장악했다지만 한계가 있는 법이다. 총살을 하고 박격포를 쏘아 폭사시킨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거대한 군 집단은 김정일 몸에 부착된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통치용 도구인 반면, 언제 덤벼들지 모르는 개떼인 것이다. 김정일이 호전적으로 나올수록 군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다는 증거로 생각할 수도 있다. 총구를 밖으로 돌려 개떼의 관심을 돌리려는 의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해봅시다.”

    김정일이 김대중의 제의에 그렇게 대답하는 것으로 만찬에서의 밀담은 끝났다.



    # 다음 날 오전 10시, 북한 국영방송은 남조선 특사에 관한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어젯밤부터 예고했던 터라 한국의 모든 방송국이 화면을 받아 생중계했다. 면 소재지 5일장 안내원처럼 보이는 북한 아줌마 아나운서가 등장했을 때 한국 시청자의 대부분은 한숨을 쉬거나 쓴 입맛을 다셨다. 눈을 치켜뜬 아줌마가 소리치듯 말한다.

    “어제 위대하신 김정일 장군 동지를 만난 남조선 사죄 특사인 전임 대통령 김대중은 남조선 대통령 이명박의 사죄서를 전달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서울역 대합실에 모인 사람들은 다시 제각기 한숨을 뱉거나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었고 일부는 투덜거렸다. 아줌마가 말을 이었다.

    “위대하신 김정일 장군 동지께서는 바다와 같은 관용을 보이시어 사죄 특사를 보낸 이명박을 용서하시고, 적당한 시기에 남조선을 방문하실 것을 통보하셨습니다.”

    # “저것이군.”

    KBS에서도 서울역 대합실과 동시에 아줌마의 연설을 듣고 있다. 보도국장 임명수가 크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포인트는 김정일의 서울 방문이다. 저것 때문에 DJ가 평양에 간 거야.”

    “사죄 특사는 구라겠군요.”

    오늘도 국장실에 들어와 있는 박동민이 말하자 임명수가 코웃음을 쳤다.

    “사죄는 개뿔. 그 말을 믿는 대한민국 사람은 없어.”

    “DJ가 결국 한 건 해냈습니다. 그렇지요?”

    “살신성인이지.”

    금방 눈물이 글썽해진 눈으로 박동민을 보며 임명수가 말을 잇는다.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야. 아니, 저렇게 사죄 특사라고 수모를 당하면서 김정일을 서울로 데려오는 거야. DJ가 마무리를 하려는 것 같다.”

    “몸도 시원찮은 것 같더구먼요.”

    이제 임명수는 심호흡만 했다. 그에게 DJ는 마음의 고향이다. 전설의 고향이 아니다.

    # 오후 3시, 김대중과 이재오는 2박3일간의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갈 채비를 하느라 아줌마의 방송은 보지 못했다. 아니, 초대소에 TV는 켜져 있었지만 그 방송이 안 나왔다.

    “위원장께서 오셨습니다.”

    밖에 있던 최길중이 황급히 응접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오후 4시에 출발할 예정이었고 배웅은 김영남이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둘은 서둘러 일어섰다. 그들이 응접실을 나왔을 때 김정일이 일행과 함께 로비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김영남, 그리고 대장 계급장을 붙인 장성과 매제 장성택이 따르고 있다.

    “어,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김정일이 김대중에게 말하더니 먼저 응접실로 들어선다. 김대중과 이재오는 따르는 수밖에 없다. 곧 응접실에는 다시 김대중과 김정일을 중심으로 이재오, 최길중, 장성택과 인민군 총참모장 이영호가 둘러앉았다. 오늘 리용호는 수행하지 않았다. 김정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핵을 폐기한다는 발표는 못 합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폐기할 것입니다.”

    김대중의 시선을 받은 김정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조건도 다 받아들이지요.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합니다.”

    천천히 머리를 끄덕인 김대중이 말을 잇는다.

    “돌아가 이명박 대통령하고 상의한 후에 말씀드리지요.”

    “6자회담에서 공론화해서도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서울 방문 일정은 곧 알려드리지요.”

    그러고는 김정일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김대중에게 손을 내밀었다. 입가에 쓴웃음이 번진다.

    “김 대통령님, 건강하십시오.”

    “위원장님께서도.”

    그렇게 비밀회담은 끝이 났다.

    # 돌아오는 길도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김대중과 이재오는 창밖 풍경만 내다본 채 제각기 감회에 젖어 있었다. 그러다 개성공단에서 한국 측이 마련한 승용차로 갈아타고 출발하자 이재오가 옆자리의 김대중에게 묻는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아무리 비밀로 한다고 해도 금방 알려질 텐데요.”

    그러자 김대중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군의 반발 때문이오. 그러니 우리는 실리만 챙기면 됩니다.”

    이재오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소득인 것이다. 김정일로부터 실질적인 핵 폐기와 서울 방문 약속을 받아냈다.

    # 북한은 김대중을 사죄 특사라면서 아줌마를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한국 측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김대중의 인기가 치솟은 것이다. 노구를 이끌고 국가 안녕을 위해 적지(敵地)로 사죄하러 들어간 김대중은 애국자요, 살신성인의 원조가 되었다. 개울대학 한국 교수는 TV 방송 ‘50분 토론’에 초청되었을 때 김대중을 6·25 때의 ‘육탄 3용사’에 비유했다. 3용사에 이재오와 최길중이 덤으로 끼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니까.”

    여론조사기관에서 조사한 김대중의 인기도를 읽다 만 국무총리 이회창이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이 양반이 이렇게 다시 뜰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전임 대통령의 인기도를 조사한 결과로 김대중은 박정희, 이승만 다음으로 3위가 되었다. 노무현도 상위권이다. 주목할 것은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건국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교육, 연구, 학습을 실시했고 특히 세대결연을 통해 필수 연수 과정으로 채택해 이승만의 국부(國父) 위치가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무는 뿌리가 깊어야 바람에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는 법이다. 그때 집무실 안으로 사무차장 이병근이 들어섰으므로 이회창과 국무차장 김영곤은 머리를 들었다.

    “총리님,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병근이 말하자 이회창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접견실에서 기다리는 손님은 ‘세종시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 양상문과 고문 유영복이다.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이회창이 밝은 표정으로 둘을 맞는다. 선진당 당원인 둘과는 안면이 있는 것이다. 국무차장 김영곤도 합석한 터라 인사를 나눈 넷은 소파에 둘러앉았다. 오전 11시다. 먼저 양상문이 테이블에 30cm쯤 높이로 쌓인 서류뭉치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총리님, 세종시 건설을 촉진하자는 국민의 서명서를 가져왔습니다. 현재까지 전국에서 47만5728명이 서명했습니다.”

    숨을 돌린 양상문이 말을 잇는다.

    “저희는 총리님과 청와대 비서실장님께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세종시에 대한 충청도민의 염원을 꼭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회창이 머리만 끄덕였으므로 이번에는 유영복이 나섰다.

    “이제 시급한 국내의 현안이 끝났으니 세종시 건설이 국가사업으로 공식 추진돼야 할 차례가 됐다고 믿습니다.”

    “알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이회창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두 분의 애향심에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 “세종시 문제를 결정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청와대 비서실장 조순형이 말한 순간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2009년 2월 6일, 대통령 주재의 수석비서관 회의가 열리고 있다. 회의를 마치려는데 조순형이 의제를 꺼낸 것이다. 의제라기보다 건의다. 회의 내용에 없었기 때문에 멈칫하던 이명박의 시선이 수석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 이명박도 대선 공약으로 세종시 건설을 내세웠다. 노무현 정권 때 추진했던 세종시는 당시부터 말이 많았다. 수도 이전이냐 아니냐에서부터 정부청사만 옮기기로 한 것까지 지금도 논란이 진행 중이다. 세종시 건설은 국가 균형발전 등의 이유보다 충청도 표를 의식한 정치적 동기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이제 세종시는 전·현직 대통령 두 명의 ‘약속’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책임이 현직 이명박의 어깨에 얹혔다. 이윽고 이명박이 입을 열었다.

    “세종시 건설 못 합니다.”

    그 순간 회의실은 대낮에 전기가 끊긴 것처럼 조용해졌고 다시 이명박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군요. 내가 표를 얻으려고 거짓말을 했다고 발표하겠습니다. 따라서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이명박의 시선이 조순형에게로 옮겨졌다.

    “국회에서도 이 일을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조순형이 심호흡을 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곧 개운해졌다. 군더더기 없이 표현하고 지시하는 이명박의 행동 때문일 것이다.

    # 민주당 대표 정세균 의원실에 모인 의원은 일곱 명. 분위기가 무겁다.

    “이건 탄핵감이야.”

    하고 누군가 말했다가 호응이 없자 입을 다물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때 천정배가 입을 열었다.

    “이 정보, 확실한 겁니까?”

    “예, 내가 직접 들었습니다.”

    강봉균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쓴웃음을 지은 강봉균이 말을 잇는다.

    “박재완 정무수석이 오늘 오전에 나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세종시, 대통령이 무효로 하겠다고 발표를 한답니다.”

    “안하무인이군.”

    또 누군가 담 너머에서 말하고는 들어갔다.

    “나도 전화 받았어요.”

    이용섭이 입맛을 다시면서 말을 잇는다.

    “나한테는 교과수석 이주호 씨가 했던데.”

    “이거 또 국회에서 마무리를 지을 것 같은데.”

    하고 김진표가 말하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겠지요.”

    정세균이 긴 숨을 뱉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선진당까지 싹 몰아가버려서 세종시는 진작 물 건너갔습니다.”

    그러자 천정배가 말을 받았다.

    “이회창 총리, 조순형 청와대 비서실장 카드가 바로 세종시 없애기 위한 작전이었어요.”

    딱 들어맞는 퍼즐 같았지만 방 안의 아무도 맞장구치지 않았다. 이명박이 인기가 없었다면 여럿이 맞장구쳤을 것이다.

    # “국민과의 약속 아닙니까?”

    정색한 박근혜가 묻자 둘러앉은 당정 관계자는 입을 다물었다. 세우리당 소회의실 안에는 원내대표 정몽준과 총무 김무성, 그리고 최고위원 다섯에 행정안전부 장관 원세훈, 국토해양부 장관 정종환까지 둘러앉았다. 말석에서 정무수석 박재완이 펜을 들고 앉은 모습이 속기사 같다. 박근혜가 말을 잇는다.

    “국민과의 약속을 가볍게 어기면 정부가 신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충청도민의 반발이 클 겁니다.”

    참석자의 시선이 슬슬 박재완을 스치기 시작했다. 정종환은 자꾸 엉덩이를 비틀고 있다. 박근혜가 머리를 돌려 박재완을 보았다.

    “대통령께선 국회에서 어떻게 처리되기를 바라시지요?”

    “예.”

    상반신을 세운 박재완이 정색하고 말했다.

    “대통령께선 세종시 건설을 무효로 하고 그 책임을 지시겠지만, 만일 당이 거부하면 당 결정에 따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박재완의 시선을 받은 박근혜가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은 이미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 “옳지.”

    2009년 2월 14일, 민주당 의원 이강래가 씩 웃었다. 의원회관 안이다. 그가 앞에 선 보좌관 김인배에게 묻는다.

    “박근혜는 반대 입장을 굳혔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표결은 언제야?”

    “오늘 오후 4시입니다.”

    이강래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전 11시 반이다. 앞으로 5시간 후에는 세우리당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다. 변혁이라기보다 내분(內紛)이다. 세종시 건설에 대한 세우리당 의원들의 찬반투표가 오후 4시에 끝나고 나면 당은 양분(兩分)된다. 이명박과 박근혜, 즉 지는 해와 뜨는 해 세력으로 나뉘는 것이다. 그러면 당력이 약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명박의 무소불위, 안하무인 통치는 끝이다.

    “좋아. 이제 다음 순서는 분당(分黨)이다.”

    이강래가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세계 어느 민주국가에서도 상대 당이 잘되기를 바라는 정치인은 없다. 그런 자가 있다면 배신자가 아니면 미친놈이다.

    레임덕은 없다
    # 소파에 앉은 김무성이 정색하고 박근혜를 보았다. 오전 12시 10분, 박근혜 세우리당 대표실 안이다. 점심 약속 때문에 막 외출하려던 박근혜는 갑작스럽게 김무성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대표님, 우리가 집니다.”

    김무성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퍼뜩 눈을 치켜뜬 박근혜의 귓속에 김무성의 ‘우리’라는 단어가 메아리로 남았다. ‘우리’란 세종시 건설 찬성 세력, 즉 반(反)이명박 세력이 되겠다. 김무성의 말이 이어졌다.

    “선진당 출신 의원 중에서도 서너 명만 제외하고 찬성 쪽으로 붙었습니다. 투표하면 135대 50 정도로 우리가 밀립니다.”

    “….”

    “그동안 정 대표가 우리 표를 많이 잠식했습니다.”

    정 대표란 정몽준 원내대표다. 김무성이 말을 이었다.

    “만일 이렇게 투표가 끝나면 135명은 명실공히 중립 내지는 친이(친이명박) 세력으로 구분돼 대통령의 후계자에게 인계됩니다.”

    “….”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측 이탈 표가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고는 김무성이 길게 숨을 뱉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대표님, 대세를 따르십시다.”

    박근혜의 시선을 잡은 김무성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어차피 세종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의 의표를 찌르면서 우리 기반을 굳히자는 말씀입니다.”

    # 2009년 2월 14일 오후 2시,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대표실로 돌아온 박근혜가 막 자리에 앉았을 때다. 보좌관 한성주가 서둘러 다가왔다.

    “대표님, 청와대 비서실장 전화가 왔는데요.”

    박근혜가 머리를 끄덕이자 한성주는 무선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전화기를 귀에 붙인 박근혜가 응답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대표님, 저 조순형입니다.”

    조순형이 정중하게 말을 잇는다.

    “결례입니다만, 제가 30분쯤 후에 찾아뵈어도 될는지요?”

    # 그리고 30분 후인 오후 2시 반, 대표실에서 박근혜와 조순형이 독대하고 있다. 조순형이 입을 열었다.

    “김 총무 말을 들었더니 대표께서도 세종시 건설 백지화에 찬성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박근혜는 시선만 주었고 조순형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대통령께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심호흡을 한 조순형이 똑바로 박근혜를 보았다.

    “대통령께서는 박 대표님이 백지화에 반대하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원칙과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국민께 보여드리라고 조언하셨습니다. 대통령께선 약속을 어기고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세종시 건설을 내세웠지만 차기 대통령 후보이신 박 대표께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게 낫다고 하시는군요.”

    “….”

    “물론 대표께서 반대하셔도 백지화는 가결될 것입니다. 그리고….”

    조순형의 포커페이스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가 금방 지워졌다.

    “오히려 이것으로 박 대표께서 당내 의원들의 신임을 얻게 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박근혜는 소리 죽여 숨을 뱉는다. 지금 속마음을 조순형에게 드러내 보인다면 세종시 백지화에 찬성하고 싶은 것이다. 세종시가 어떻게 되든 이명박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기 때문이다.

    # 2009년 2월 14일 오후 4시 40분, 세종시 건설 문제에 대한 세우리당 당내 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재적 인원 179명 중 백지화 찬성에 117명, 반대 62명. 당대표 박근혜가 오후 2시까지 백지화에 찬성했다가 돌연 반대로 결심을 굳힌 것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래서 정치학 교수들이 잠시 신바람을 냈지만,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박근혜의 신의에 대해서는 누구나 입에다 게거품을 물고 칭송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세우리당의 세종시 투표에서 아직도 굳건한 박근혜 대표의 기반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서산대학 진국 교수가 ‘50분 토론’에 나와 그렇게 말했다. 정색한 진국 교수의 얼굴이 화면에 클로즈업됐고 그것을 이명박과 박근혜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본다.

    “끝까지 주관을 지킨 박 대표가 이번 결정의 진정한 승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종시 건설 문제는 백지화됐다.

    이원호

    레임덕은 없다
    194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 전북대를 졸업했다. (주)백양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무역 일을 했고, (주)경세무역을 설립해 직접 경영했다. 1992년 ‘황제의 꿈’과 ‘밤의 대통령’이 100만 부 이상 팔리며 최고의 대중문학 작가로 떠올랐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 스케일이 큰 구성,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그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다. 기업, 협객, 정치, 역사, 연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지금까지 50여 편의 소설을 냈으며 10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주요 작품으로 ‘할증인간’ ‘바람의 칼’ ‘강한 여자’ ‘보스’ ‘무법자’ ‘프로페셔널’ ‘황제의 꿈’ ‘밤의 대통령’ ‘강안남자’ ‘201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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