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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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가 프랑스 여인을 만났을 때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2-06-04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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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남자가 프랑스 여인을 만났을 때
    5월 27일(현지시간) 폐막한 제65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다른 나라에서’는 미모의 프랑스 중년 여인 안느(이자벨 위페르 분)가 주인공이다. 안느는 전북 부안의 모항을 찾는다. 아름다운 이방의 여인을 접한 한국 남자들은 다양한 행태를 보인다.

    먼저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는 중년 남자 종수(권해효 분)는 세계적 영화감독인 안느를 안다. 임신한 아내(문소리 분)와 모항을 찾은 그는 안느에게 “우리 키스한 거 기억나요? 베를린의 놀이터에서요. 하지만 우리는 그냥 친구예요. 그냥 키스한 거죠”라고 말한다. 이어진 술자리에서 결국 취한 종수는 “안느, 키스해도 돼요?”라고 묻는다.

    안느를 처음 만난 해수욕장 안전요원(유준상 분)은 엉터리 영어를 섞어가며 ‘라이프 가드’라고 자신을 소개하고는 “If you swim, I protect you(당신이 수영을 한다면 내가 보호해줄게요)”라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진다. 그는 안느를 자신의 텐트로 끌어들이려고 지나치다 싶은 친절을 베풀며 환심을 산다. 심지어 노래를 만들어 불러준다.

    수컷의 콤플렉스와 조바심

    안느와 불륜관계인 한국의 유명 영화감독 문수(문성근 분)는 술에 취해 젊고 건장한 안전요원과 대거리하는 안느에게 언성을 높인다. “멍충이 안전요원이 그렇게 좋아? 젊은 놈 몸뚱이가 그리웠나 보지?”라며 눈을 부라리고 억지를 부린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홍상수의 나라’는 일면 ‘동물의 왕국’이다. 수컷이 ‘교미’ 가능성을 타진하며 암컷 주위를 빙빙 돈다. 수컷이 보내는 구애 신호는 맨정신일 땐 은밀하고, 술자리에선 노골적이며, 제삼자가 보기엔 촌스럽고 유치하고 우스꽝스럽다. 그래서 객석에선 웃음이 터진다. ‘홍상수의 나라’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대체로 볼품없는 지위에 있거나 낙오될 위기에 처해 있다. 암컷과의 짝짓기 기회가 적은 수컷이다. 그래서 더욱 조바심을 낸다.

    이러한 캐릭터는 홍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에서부터 시작해 제법 역사가 길다. 최근작에선 작품을 수년째 만들지 못하거나 영화계에서 도태될 위기에 있는 감독(‘북촌방향’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 수컷들은 은연중 콤플렉스를 드러내곤 하는데, 예를 들어 ‘다른 나라에서’에서 종수는 안느에게 떳떳하게 구애할 수 없는 유부남이며, 유명 영화감독 문수는 제법 높은 명망과 권력을 가진 것 같지만 남자로선 이미 전성기를 넘겼다는 사실이 콤플렉스다. 젊은 도전자(안전요원)에게 위협을 느끼는 힘 빠진 수컷인 것이다.

    홍 감독의 13번째 영화 ‘다른 나라에서’는 빚에 쫓겨 내려온 모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머니(윤여정 분)와 함께 도망쳐온 영화학도 원주(정유미 분)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이어 펼쳐지는 이야기 3개는 원주가 구상하는 시나리오다. 일종의 액자구성이다. 3개 이야기에선 안느라는 이름의 프랑스 여인이 각기 다른 인물로 등장하나 모두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다. 극중극인 3개 이야기는 서로 독립적이지만 인물, 공간, 시간 면에서 이어져 있다. 서로 다른 아이디어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일 수도 있고, 원주가 구상하는 시나리오의 서로 다른 3가지 버전일 수도 있다.

    영화와 현실의 모호한 경계

    한국 남자가 프랑스 여인을 만났을 때
    첫 번째 이야기에서 안느는 프랑스의 유명 영화감독이다. 친분이 있는 한국 다큐 영화감독 종수 부부와 모항에 놀러 왔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안느는 서울 서래마을에 사는 부자다. 프랑스 남편의 눈을 피해 불륜관계인 한국의 유명 영화감독 문수와 밀회를 즐기러 모항을 찾았다. 마지막 편에서 안느는 한국 여성에게 남편을 빼앗긴 이혼녀다. 미련과 실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려고 한국의 지인인 민속학 교수(윤여정 분)와 위로 여행차 모항을 방문했다.

    홍 감독이 구사하는 영화 문법의 키워드는 ‘차이와 반복’이다. 인물과 상황, 대사가 미묘한 차이를 빚어내면서 반복된다. 3개 이야기 속 안느는 서로 다른 인물이지만, 같은 이름을 갖고 있고 같은 배우가 연기하며 늘 안전요원을 만나 등대가 있는 곳을 물어본다. 안전요원이 안느를 위해 노래를 만들어 불러주는 장면이나,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환심을 사려 하고 텐트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대목도 3개 이야기에 거듭 등장한다. 종수는 안느와 이미 알거나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술자리 때마다 취해 추파를 던진다.

    관객들은 대개 홍 감독의 영화 속 시간과 공간이 모호하다고 느낀다. 같은 인물이 동시에 여러 곳에 등장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 시간의 전후가 뒤섞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홍 감독 영화에서 인물과 시공간은 기억에 의해 주관적으로 체험되고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미국 영화나 주류영화는 단일한 인물, 하나의 공간, 하나의 중심을 갖고 있지만 홍 감독 영화는 이러한 전통적 관념이나 화법을 거부한다. 홍 감독은 인물과 대사, 상황을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반복하고 변주하며 농담, 유머, 나태, 우울, 냉소, 역설, 습관, 기시감, 어색함, 민망함, 낭패감, 자신감 등 일상의 감각을 영화적 체험으로 옮긴다. 그 결과 홍 감독 영화에선 현실과 스크린 위의 환영이 서로의 거울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안팎의 경계를 나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다. 일상의 감각에 대한 유머러스한 즉흥환상곡이며, ‘홍상수의 나라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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