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0

2012.03.26

우사(牛舍) 대신 ‘마구간’

일부 구제역 피해농가 소 없는 축사에 말 사육…새 성장동력으로 주목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12-03-26 09: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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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사(牛舍) 대신 ‘마구간’
    “소든 말이든 무엇보다 키우는 정성이 가장 중요해. 짐승은 사람 손 가기에 달린 법이지.”

    3월 19일 오후 4시, 경기 파주시 광탄면 방축리에 자리한 신영진농장. 농장주 안일선(70) 씨의 얼굴 표정에선 모진 나날을 견뎌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묻어났다.

    안씨가 자신의 한우와 젖소 59마리를 살처분해야 했던 때는 2010년 12월. 그해 11월 경북 안동에서 처음 발생한 구제역은 이내 전국으로 퍼졌고, 지난해 4월 경북 영천에서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출 때까지 국내 축산농가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장장 143일간 총 153건이 발생해 살처분한 소, 돼지 등 가축만도 348만 마리에 이른다. 약 6조 원의 직간접 비용도 발생했다.

    전국에서 구제역 피해가 가장 컸던 경기도. 파주는 그중에서도 최대 피해지역이다. 축산농가 328가구가 구제역으로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새 식구로 들어온 말과 당나귀



    안씨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웃 축산농가에서 번져온 구제역은 그가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던 소들을 몽땅 앗아갔다. 35년간 일군 축산업을 접고 남은 것은 깊은 한숨과 끝 모를 시름뿐.

    “텅 빈 축사를 뒷정리하는데, 자꾸 눈길이 축사 바로 옆에 있는 살처분 매몰지로 향하는 거야. 한동안 농장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두문불출했어. 피해보상은 받았는데 소를 재입식(再入殖)할 엄두가 안 났지.”

    그랬던 안씨 농장엔 지금 새 식구들이 ‘입주’해 있다. 소가 아니라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말인 ‘미니어처 호스’, 몸집은 작아도 탄광이나 고산지대에서 무거운 짐을 나르는 데 활용했던 ‘셔틀랜드 포니’ 등 말 62마리와 ‘아시아당나귀’ ‘아프리카당나귀’ 25마리가 그의 보살핌을 받는다.

    1500여㎡나 되는 넓은 축사가 말과 당나귀로 들어찬 것은 지난해 6월. 소 재입식을 계속 망설이던 안씨는 말사육사로 일하는 넷째사위 신형근(46) 씨의 권유로 광탄면 마장리의 유일레저타운이 소유한 말과 당나귀를 입식해 위탁사육을 했다. 축사시설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안씨가 유일레저타운으로부터 받는 돈은 월 300여만 원. 말 먹이인 건초와 사료 구입비는 유일레저타운 측이 부담한다.

    “말은 통굽이라 구제역에 걸리지 않아. 선역이라는 전염병에 걸릴 수는 있지만 생명엔 거의 지장이 없어 안심이지. 게다가 젖소 키울 땐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젖을 짜야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으니 시간도 절약돼. 하루 세 번 먹이를 주면서 잘 돌보기만 하면 되니 힘이 덜 들어 좋아.”

    안씨는 “처음엔 말과 당나귀의 습성을 잘 몰라 새끼 낳은 당나귀를 만지려다 뒷발로 이마를 차여 엉덩방아를 찧은 적도 있지만 이젠 녀석들에게 익숙해졌다”며 “마을의 다른 축산농가도 말 사육에 관심을 조금씩 보이는데 말에 대해 잘 몰라서인지 입식은 주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기지역에서 안씨 경우처럼 소 대신 말을 대규모로 키우는 구제역 피해농가는 아직 드물다. 하지만 ‘우사(牛舍)’의 ‘마구간’ 변신 시도는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지난해 4월 이후 국내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적은 없지만 구제역 토착화 우려는 상존한다. 게다가 사료값 폭등과 육우값 폭락 등 가뜩이나 열악한 소 사육 환경에 시달려온 축산농가로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소비가 크게 늘면 고충은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사(牛舍) 대신 ‘마구간’

    말고기 육회.

    이런 상황에서 말산업 선진국과의 단시일 내 격차 해소, 농촌경제 활성화, 국민 삶의 질 향상 등을 위해 지난해 3월 ‘말산업 육성법’을 제정, 시행해 말을 향한 축산농가의 관심은 한층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말산업 육성법은 말을 대상으로 한 세계 최초의 특별법이다. 이에 따라 경기도는 2000년 이후 3차례나 구제역 파동을 겪은 데다 지난번 구제역 사태 당시 사육 소의 28%, 돼지의 88%를 매몰해 정신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경기북부지역을 말산업 특구 최적지로 판단하고, 피해농가들의 새로운 소득원으로 말산업을 지원하려 잰걸음을 하고 있다.

    현재 경기지역에서 사육하는 말의 총 두수는 3600여 두로 전국 2위(1위는 제주, 2만5000여 두). 경기도는 이 같은 인프라를 바탕으로 말산업을 육성하려고 양주시의 승마장 조성 계획(예정지는 양주시 은현면)을 올해의 마필산업 육성사업으로 선정해 15억 원을 투입한다고 3월 5일 밝힌 바 있다. 이에 앞서 1월 12일엔 경기도와 양주시, 서정대학이 말산업 발전 및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전체 축산농가의 2% 걸음마 단계

    우사(牛舍) 대신 ‘마구간’

    구제역으로 살처분한 소 대신 말과 당나귀를 키우는 안일선 씨.

    정상현 경기도 축산정책과 애그로파크 담당은 “말은 다른 가축과 달리 승마, 관광, 재활승마, 말고기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해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 말 사육에 대한 구제역 피해농가의 주목도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국민소득 증가, 주5일제 수업 실시, 전 국민 말 타기 운동, 재활승마 및 승마동아리 활성화 등 승마 인구의 저변 확대가 예상되는 데다, 경기도는 수도권이라는 지리적 강점이 있는 만큼 앞으로도 말산업 관련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삼식 시장이 생태승마공원 조성을 공약한 경기 양주시 또한 말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한다. 윤재선 양주시 농축산과 마필산업TF팀 팀장은 “구제역 피해농가를 대상으로 말 사육 수요 조사를 벌인 결과, 30여 농가가 희망해 말 사육 전문 교육을 실시했고, 그중 2개 농가는 이미 자부담으로 말을 입식했다”며 “현재 희망 농가들이 자체적으로 협의체를 구성해 말 사육 법인화를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말이 축산농가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되려면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 올해 1월 ‘농업인 예비 승마장 경영자’ 강습을 진행한 현상훈(45) 유일레저타운 대표는 “승용마 1마리를 해외에서 들여오는 데 드는 항공료, 관세, 검역비 등 제반 비용만도 1400만 원에 달해 수입 말을 키우는 건 영세한 국내 대부분 축산농가에는 언감생심”이라며 “말산업을 활성화하려면 국내 말 개체수를 늘리고 위탁사육 대신 축산농가가 직접 망아지를 구입한 뒤 비육해 식용 말을 생산해야 판로가 트일 뿐 아니라 수익도 창출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현재 국내 말 사육 농가는 전체 축산농가의 2%에 불과한 1700여 곳. 기르고 싶어도 구할 곳이 마땅치 않고 유통 경로도 아직 불투명한 말 사육은 구제역 걱정과 한미 FTA 발효로 한껏 그늘이 드리운 축산농가에 희망의 빛을 던져줄 수 있을까. 말(馬)은 말(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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