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20

2012.01.09

집, ‘감금’이라는 낯설고 불편한 형벌

‘내가 사는 피부’와 ‘송곳니’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입력2012-01-09 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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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감금’이라는 낯설고 불편한 형벌

    영화 ‘내가 사는 피부’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사설감옥에서 보낸 15년은 차라리 행운이다. ‘미저리’의 소설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지지리도 재수 없는 ‘감금’의 사례가 두 건 있다. 먼저 영화 ‘내가 사는 피부’에 나오는 ‘베라’라는 여성이다. 수년 전 어느 날 황당한 교통사고 후 누군가에게 납치됐다. 눈을 떠보니 온몸이 묶인 채 침대에 누워 있다. 그 후 베라는 한 유명 외과의사의 비밀 실험대상이 된다. 성형수술과 피부 이식이 거듭된다. 그 결과 완벽한 피부와 아름다운 외모를 얻지만, 여전히 갇힌 신세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대저택. 베라는 그곳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또 한 편의 영화 ‘송곳니’는 주인공이 불행을 자각할 수조차 없는 극단의 경우다. ‘긴급출동 SOS 24’ 같은 TV 프로그램에 제보할 만한 사례다. 역시 크고 아름다운 집이 배경이다. 차를 탄 채로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넓은 정원과 수영장이 하얀색 가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유럽의 전형적인 상류층 가정이다. 큰 회사를 운영하는 중년의 가장과 다소곳한 아내, 20대의 큰딸과 10대의 두 남매.

    “아빠는 너희를 사랑해, 엄마도 너희를 사랑해, 사랑이 넘치는 우리 집….”

    매일 노래가 끊이지 않는 다섯 식구의 남부러울 것 없는 ‘스위트 홈’. 하지만 이 가족의 세 남매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문밖을 나선 적이 없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부부는 아이들을 바깥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해왔다. ‘양육’이 아니라 ‘사육’이다.

    유럽에서 날아온 두 편의 영화 ‘내가 사는 피부’와 ‘송곳니’는 모두 감금을 모티프로 했다. 가둔 자와 갇힌 자가 등장하고, 이들의 욕망이 일으키는 파열음을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학을 통렬히 보여준다. 가둔 자는 갇힌 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조종한다. 갇힌 자는 가둔 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이자 포로다. 갇힌 자는 가둔 자에게 온전히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금단의 경계 너머를 욕망한다. 지배와 권력이 본능이라면 반란과 자유 또한 그렇다.



    ‘내가 사는 피부’에서 가둔 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형외과의 로버트(안토니오 반데라스 분)다. 그의 아내는 몇 년 전 끔찍한 화상을 입고 자살했다. 아내를 잃은 후 그는 완벽한 인공 피부를 만들기 위한 비밀 시술을 계속해왔다. 베라를 납치해 원래의 피부를 걷어내고 끊임없이 새로운 조직을 이식한 것이다. 수년을 고통 속에서 보낸 베라는 자해와 항변을 계속하지만 로버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프로젝트를 이어간다.

    집, ‘감금’이라는 낯설고 불편한 형벌
    그런데 어느 날 로버트가 집을 비운 사이 호랑이 옷으로 가장한 사내가 대저택에 침입해 베라를 범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완벽하게 유지되던 대저택의 일상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로버트와 베라에 얽힌 비극적인 과거사, 베라의 충격적인 정체가 드러난다. 전신 화상으로 괴로워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 엄마의 충격적인 죽음을 목격하고 정신병에 시달리다 결국 같은 길을 선택한 딸. 로버트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베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피부는 세계와 ‘나’의 물리적 경계다. 우리가 ‘누구’라고 했을 때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는 곧 어떤 사람의 피부색과 굴곡, 질감, 윤곽이 이루는 외모다. 피부는 나의 일부고 정체성의 출발이자 근원이며, 세계와의 경계선이고, 내가 살고 있는 ‘집’이다.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내가 사는 피부’는 우아하지만 강렬하고 날카롭다. 유려한 실내악이 흐르는 가운데 메스가 살갗을 찢고 피가 사방으로 튀는 수술대를 보는 듯하다. 완벽한 인공 피부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창조물을 빚고자 하는 남자와 자신만의 고유한 외피를 잃어버려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는 여자. 그 둘이 이루는 팽팽한 긴장감이 시종 전율을 일으킨다. 여기서 지배자의 최종 목적은 피지배자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모종의 복수를 완성하는 것이다. 과연 지배자의 권력의지와 자유를 향한 피지배자의 반란은 어떤 파국을 낳을까.

    ‘내가 사는 피부’만큼이나 기이하고 기발한 그리스 영화 ‘송곳니’에서 지배자는 남편이자 아버지고, 피지배자는 아내와 자식들이다. 집과 가족은 가장의 지휘 아래 완벽한 화음을 내는 왕국이다. 이곳에서 바깥세상으로 출입이 가능한 유일한 인물은 아버지다. 세 남매는 태어날 때부터 외부 세계와 격리된 채 성장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욕을 해소해주려고 회사 여직원을 집으로 데려와 관계를 맺게 한다.

    집, ‘감금’이라는 낯설고 불편한 형벌

    영화 ‘송곳니’

    세 남매는 부모에게 매일 교육을 받는다. 외부로부터의 어떤 위험이나 자극, 유혹 징후도 철저히 차단된다. 예를 들어, 부모는 자식들에게 ‘바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침실에 있는 팔걸이 의자라고 가르쳐준다. ‘고속도로’는 정원에 부는 강풍이고 ‘좀비’는 뜰에 핀 노란색 꽃이다. 들고양이는 무조건 죽여야 하는 외부 침입자다. 그리스어밖에 모르는 자식들에게 미국 재즈곡 ‘플라이 투 더 문’을 들려주면서 아버지는 “우리집은 즐겁고 아름다워, 나는 우리집을 사랑하고 우리집을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야”라며 전혀 엉뚱한 가사를 알려준다. 아버지는 말한다. “집을 나갈 수 있는 성인이 되면 송곳니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송곳니가 빠지면 너희는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고 육체의 욕망까지 해소해주며 바깥세계의 온갖 악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존재다. 자비와 은혜, 구속과 응징, 공포의 신(神). 절대 신의 왕국은 아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 데려온 회사 여직원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한다. 여직원과 말을 섞고 모종의 거래를 하던 큰딸이 바깥세상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영화는 충격적인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자신의 창조물을 너무 사랑하고 걱정한 나머지 완벽하게 구속했던 신과 창조주를 숭배하고 경외하지만 자유의 본능을 이길 수 없었던 피조물. ‘송곳니’는 종교와 독재, 미디어에 대한 조롱과 야유, 풍자를 보여주는 블랙코미디다.

    ‘내가 사는 피부’와 ‘송곳니’ 두 편 모두 세계가 인정한 수작이다. 오랜만에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지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내가 사는 피부’는 제 63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이며, ‘송곳니’는 제6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부문 대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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