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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켜켜이 남은 이야기 서울에 古宅이 있었네

골목마다 100년 세월 간직,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

켜켜이 남은 이야기 서울에 古宅이 있었네

우리는 잊고 살지만 서울은 많은 이야기를 담은 도시다. 도심의 희뿌연 분주함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골목마다 역사의 어스름한 기억을 한 자락씩 간직한 옛집이 숨어 있다.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계절. 고택의 낡은 기와 한 장, 퇴색한 나무기둥마다 덮인 100년 남짓한 시간의 두께를 되짚어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옛집에 담긴 사연을 알고 나면 매일 지나치는 골목이 더는 그냥 골목일 수 없다.

>>>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家 : 사적 제438호 서울 종로구 안국동 8-1 외

1880년대 말 어느 날, 고종은 조회를 마치고 물러가려는 민영주를 불러들였다. “네가 요즘 대궐을 짓고 있다면서?” 당시 법도로는 종친이나 대관이라도 99칸 이상의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고종의 귀에 민영주가 100칸이 훨씬 넘는 대저택을 짓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처조카뻘이라 벼슬을 주긴 했지만 평소 망나니 소리를 들을 만큼 행실이 나빠 못마땅하게 여기던 터였다.

민영주는 낯을 붉히며 변명했다. “대궐이 아니오라 절이옵니다.” 고종은 재치 있는 대답이라 생각하고 돌려보냈다. 몇 달 뒤 다시 민영주에게 물었다. “그래, 짓는다는 절은 다 지었느냐?” “네.” “절에 어느 부처님을 모셨느냐?” “세상 사람이 저더러 금부처라 하옵니다.” 뚱뚱한 풍채에 워낙 돈을 밝혀 붙은 별명이었다. 고종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민영주가 이 터에 처음 지은 집은 375칸 규모였다고 하는데, 정작 그는 이 집에서 몇 년 살지 못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정권이 바뀌자 새 내각은 이 집을 적몰해 갑신정변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박영효에게 주었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후 박영효는 일본으로 도주했고, 내각 보좌관으로 있던 일본인 츠네야 모리노리(恒屋盛服)가 한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 1899년 츠네야가 귀국한 뒤 이 집은 황실이 관리했다. 1902년까지는 궁내부 산하에 설치한 서북철도국 청사로 사용했으며, 1902년부터는 일본인 궁내부 고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의 관사로 내줬다.

통감부 재정고문부 주도하에 한국 황실 재산 ‘정리’를 강행하던 1909년경, 장안의 부호 김용달이 이 집을 사들였다. 그는 이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해 180칸 규모인 ‘장안 제일의 저택’으로 꾸몄다. 김용달은 돈을 물 쓰듯 한다는 말을 듣던 사람이었으나 1917년 결국 파산해 이 집을 한성은행에 넘겼다. 한성은행으로부터 이 집을 인수한 남작 조동윤은 이 집을 지었던 민영주와 개축했던 김용달이 모두 망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다시 매물로 내놓았다. 마(魔)가 낀 집을 산 탓에 자기도 망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다.

1918년 윤치소가 이 집을 큰아들 윤보선의 명의로 사들였다. 가격은 알 수 없지만 아마 조동윤보다 싸게 샀을 것이다. 당시 ‘마가 낀 집’이라는 소문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명문가 출신으로는 드물게 일찍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윤치소는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 집에서 아버지 윤영렬을 모시고 아홉 남매를 키웠다. 1925년에는 궁궐 전각을 모방한 사랑채를 지었고, 1934년에는 본채 일부만 남긴 채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집에 마가 끼었다는 말과 반대로, 그의 일가는 한국 최고의 명문가가 됐다. 장남 윤보선은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셋째 아들 윤원선은 경기도지사, 막냇동생 윤치영은 초대 내무부 장관, 사촌 동생 윤치왕은 초대 육군 군의감을 지냈다. 서울대 대학원장을 지낸 윤일선, 세브란스병원장을 지낸 윤유선, 농림부 장관을 지낸 윤영선 등 조카와 당질 중에도 쟁쟁한 인물이 많다.

집이 좋아 집주인이 잘된 것인지는 몰라도, 집주인이 잘된 덕에 집이 살아남은 것은 분명하다. 서울 북촌 고택이 대거 사라질 때도 이 집은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킬 수 있었다. 비록 집 소유권은 1964년 주식회사 영안에 넘어가고 윤씨 일가는 이 집을 떠났지만, 100년 넘은 ‘장안 제일가’의 풍모는 여전하다.

켜켜이 남은 이야기 서울에 古宅이 있었네
>>> 가회동 백인제 家 : 서울시민속자료 제22호 서울 종로구 가회동 93-1

1921년 9월 1일 미국 석유왕 록펠러의 아들 존 D. 록펠러 2세가 부인과 딸, 기타 일행 9명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조선호텔에 여장을 푼 일행은 다음 날 창덕궁에서 순종의 다과 접대를 받고, 3일에는 조선총독 사이토를 방문한 뒤 서울 북촌의 웅장한 한옥으로 안내받았다. 이완용의 생질(甥姪)이자 당시 한성은행 지배인이던 한상룡의 집이었다.

일본 사관학교에서 유학하다 1901년 각기병으로 중퇴하고 귀국한 한상룡은 한동안 여러 말단 관직을 전전했지만, 1903년 일생일대의 전기를 맞았다. 당시 내장원경 이용익과 노청은행(露淸銀行)은 차관 도입 교섭을 진행 중이었는데, 일본 측은 이를 방치할 경우 한국에서 러시아의 세력이 더 커지리라고 판단했다. 일본은 다이이치(第一)은행으로 하여금 김종한이 대표로 있던 한성은행에 돈을 빌려주게 했고, 한성은행은 그 돈을 다시 한국 황실에 빌려줬다. 일본이 이 과정에서 한성은행에 심은 자기 편 사람이 바로 한상룡이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이때부터 한상룡은 관직을 떠나 ‘실업’에 집중했다. 그는 한성은행에 참여하면서 다이이치은행 총재 시부자와 에이치(澁澤榮一)를 만났으며, 그를 평생의 롤모델로 삼았다. 을사늑약 이후 친일파 한상룡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총리대신 이완용의 생질, 그리고 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알아주는 젊은 실업가라는 타이틀을 밑천 삼아 수많은 이권에 개입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1906년 가회동에 새로 집을 마련한 그는 그때부터 몇 년에 걸쳐 이웃집 12채를 사들였다. 1913년에는 이들 집을 다 헐고 새 집을 지었다. 목재는 압록강 흑송(黑松)을 썼다. 일본말로 ‘구로마츠’라고 하는 흑송은 일본에는 흔한 수종이지만, 한국에서는 압록강과 울릉도 일대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서울 한옥에는 적송(赤松)만 썼기 때문에 그의 새 집은 목재만으로도 일본 냄새를 짙게 풍겼다. 게다가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만드는 등 전체적으로 한국식과 일본식을 절충한 구조를 택했다. 대지는 약 2998㎡(900여평), 건물은 약 364㎡(110여 평)였다.

한상룡은 이 집을 조선에 오는 일본인 유력자를 위한 숙소 겸 총독부 관리와 사업가를 위한 연회장으로 활용했다. 역대 조선총독이 모두 이 집을 방문했을 정도로 조선인보다 일본인에게 더 유명한 장안의 명소였다. 그러나 한상룡의 황금기는 1923년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끝났다. 대지진으로 도쿄지점이 불탄 이후 한성은행은 경영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928년 한상룡은 조선식산은행에서 구제자금을 받는 대가로 이 집을 내놓았다. 조선식산은행 소유였던 이 집을 해방 후 불하받은 사람은 장안 제일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다. 6·25전쟁 때 백인제가 납북된 이후에는 그의 부인이 집을 지켰다.

켜켜이 남은 이야기 서울에 古宅이 있었네
>>> 성북동 수연산방 : 서울시민속자료 제11호 서울 성북구 성북동 248

서울 사람 대부분에게 1910년 경술국치는 곧 실업(失業)이었다. 양반 관리, 군인, 관청 서리(胥吏), 정부 조달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시골에 연고가 없던 사람은 지게꾼, 인력거꾼 노릇을 해서라도 살아야 했지만, 굳이 서울에서 버틸 이유가 없던 사람은 연고지를 찾아 떠났다. 아예 전 재산을 처분해 중국으로 망명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식민지 체제를 정비하면서 새로운 질서에 먼저 적응한 사람이 곧바로 빈자리를 메웠다.

3·1운동 이후 서울 인구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시골 대지주, 학생, 대대로 농사짓던 땅에서 쫓겨난 농민이 서울에 몰려 들어온 것이다. 건축업자가 예전 양반 저택을 사들여 필지를 쪼개고 유리창을 낸 한옥을 지어 팔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포화상태가 됐다. 가난한 사람은 예전 같으면 생각지도 못했던 자리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개천가나 성벽 주변이 그런 자리다.

서민은 도성 안 북촌 집에 세를 들고 빈민은 개천가나 산기슭에 토막집을 지어 살았지만, 뒤늦게 서울에 들어온 당대 중산층은 성 밖 한적한 곳에 아담한 새 집을 지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사격훈련장으로 쓰던 곳, 남쪽으로 성벽을 마주하고 있어 볕이 잘 들지 않는 곳, 숙청문을 늘 닫아둬 도성에서 왕래조차 쉽지 않던 성북동이 주택지로 바뀌었다.

소설가 이태준이 성북동에 개량 한옥을 지은 때는 1933년이다. 비슷한 시기에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과 혜곡 최순우의 옛집도 한 동네에 세워졌다. 이태준은 “아침이면 성벽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이 집에서 ‘달밤’ ‘돌다리’ ‘황진이’ 같은 작품을 썼다. 1999년부터 그의 외종손녀 조상명이 이태준이 지은 당호 ‘수연산방’의 팻말을 내걸고 찻집으로 쓴다.

켜켜이 남은 이야기 서울에 古宅이 있었네
>>> 행촌동 딜쿠샤(Dilkusha) : 서울 종로구 행촌동 1-88

서울 서대문 북쪽 성곽 밑에는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의 집이 있었다. 그 집 마당의 은행나무가 크게 자라 동네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기에 행촌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은행나무 옆쪽으로 얼핏 보면 낡은 연립주택 같은 2층 벽돌건물이 있다. 건물 벽 옆에 늘어선 장독 틈으로 ‘DILKUSHA 1923’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지금 이 집은 국유재산이지만, 아직 17가구가 산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행촌동의 오래된 양식 주택으로만 알려진 이 집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2006년이다. 그해 브루스 테일러라는 미국인이 서울을 방문해 자기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을 찾아냈다. 그의 조부 조지 테일러는 1898년 아들 앨버트 테일러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운산금광 직원으로 일했다. 앨버트는 경술국치 이후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고, 금광사업을 하면서 UPI통신 서울 특파원직을 겸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그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서와 제암리학살사건 소식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그는 1923년 이 집을 지은 뒤 42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강제 추방될 때까지 살았다. 그 뒤 이 집의 내력은 한국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던 해인 1948년, 앨버트는 “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의 묘소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어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역에 묻혔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그 뒤 60년 가까이 그가 짓고 살았던 집조차 몰랐다. 딜쿠샤는 아직 문화재가 아니다.

켜켜이 남은 이야기 서울에 古宅이 있었네


주간동아 2011.10.10 807호 (p56~59)

  • 전우용 서울시 문화재위원, 서울대 강사 histopia@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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