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2

2011.08.29

“수난을 딛고 살아남은 한민족 생명력 더 다룰 겁니다”

‘최종병기 활’ 감독 김한민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1-08-29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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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난을 딛고 살아남은 한민족 생명력 더 다룰 겁니다”
    태산을 밀듯 활을 받쳐 쥐고, 호랑이 꼬리처럼 활줄을 비튼다. 퉁~. 손에서 떠난 화살은 적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휭~슉. 회전이 걸린 화살은 곡선을 그리며 적의 목을 뚫는다. 활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저격자는 몸을 숨긴다.

    영화 ‘최종병기 활’이 늦여름 극장가를 관통했다. 역대 최고 흥행 사극 영화 ‘왕의 남자’(2005년)의 개봉 첫 주 흥행기록을 넘어섰고, 개봉 12일 만에 관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7광구’ ‘고지전’ 등 한국 대작 영화뿐 아니라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2부’ 등 해외 블록버스터와 겨뤄 이룬 성적이라 더욱 의미 있다. 올여름 영화계를 관통한 이 솜씨 좋은 궁사는 김한민(42) 감독이다.

    활 소리 구현하고자 애리조나 사막행

    8월 19일 서울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은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최종병기 활’은 올 2월 중순 촬영을 시작해 여섯 달 만에 개봉했다. “촬영을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활처럼 슝~ 날아왔다”는 그는 “요즘 영화 반응이 좋다는데 사실 기쁨을 만끽할 여유도 없다”면서 도리어 인터뷰 전날 영화를 본 기자에게 영화관 분위기를 물었다. “평일인데도 극장이 만원이었다”고 하자 그가 환하게 웃었다.

    ‘최종병기 활’은 1636~37년 병자호란이 배경이다. ‘조선시대 가장 치욕적인 전쟁’ 때 청나라에 끌려간 포로만 약 50만 명. 역적의 자식으로 신분을 숨긴 채 살던 남이(박해일 분)는 포로로 끌려가는 여동생 자인(문채원 분)을 구하려 죽음을 불사한다. 청나라 무사 쥬신타(류승룡 분)는 청나라 왕자를 살해한 남이를 잡고자 혈안이 된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고, 남이와 쥬신타는 서로를 죽여야 한다. 남이의 유일한 무기는 아버지가 남긴 활 한 자루다.



    “2009년 여름 영화를 구상하던 중 한강에 자전거를 타러 갔거든요. 잠원지구에서 서울숲으로 가는 길목에서 활터를 봤어요. 아, 이거다 싶었죠. 활은 한국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몇 안 되는 전통 아이템 중 하나예요. 한국 양궁은 세계에서도 알아주잖아요. 올림픽 때마다 메달도 많이 따고요. 또한 활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나타내죠. 날렵하게 날아가 적의 심장을 꿰뚫는 것 역시 한국의 민족성과 닮았지요. 극도의 긴장감에서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는 활은 통쾌함 그 자체예요.”

    ‘최종병기 활’은 눈으로 보는 영화가 아니라 귀로 듣는 영화다. 그만큼 음향효과가 좋다. 팽팽하게 활을 쥘 때, 활이 날아갈 때, 활이 목표물을 관통할 때 나는 소리의 쾌감이 대단하다. 김 감독은 “활 사운드를 완벽하게 구현하고자 미국 애리조나 근처 사막에 가서 소리를 녹음해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화제의 장면, 호랑이가 남이를 도와 청나라 무사를 무찌르는 장면 역시 김 감독의 노고가 녹아 있다.

    “호랑이를 100% CG(컴퓨터그래픽)로 하면 안전하고 편하긴 하겠지만 실감이 나지 않잖아요. 태국에 가서 호랑이를 48시간 동안 매트릭스 안에 가둬놓고 그 모든 움직임을 찍었어요. 호랑이를 촬영한 영상을 앞서 찍은 배경화면이랑 합쳐 그 장면을 만들어낸 거죠. 실제 CG로 쓴 호랑이는 전체 3분의 1밖에 안 돼요.”

    그가 이렇게 고생하면서 호랑이 장면을 고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험할 수 있지만 꼭 찍고 싶었어요. 호랑이란 두려운 존재이면서 신령스러운 영물이잖아요. 호랑이가 본의 아니게 주인공을 도와 청나라 무사를 무찌르는 장면에서 관객이 통쾌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뭉클해할 것 같았죠. 어려웠지만, 그만큼 성취했다는 느낌을 준 장면이에요.”

    “수난을 딛고 살아남은 한민족 생명력 더 다룰 겁니다”
    호랑이 장면 위해 48시간 연속 촬영도

    이 영화에는 유난히 동물이 많이 나온다. 남이를 도와주는 호랑이뿐 아니라 말, 노루, 강아지 등이 등장한다. 그만큼 아찔한 상황도 많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말의 경우, 온몸에 와이어를 매단 후 줄을 갑자기 잡아당겨서 넘어뜨렸어요. 계속 NG가 나서 3번이나 찍었죠. 폐마 직전의 말을 쓰긴 했지만 정말 미안했어요. 이 지면을 빌려 영화를 위해 희생한 동물들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

    김 감독과 박해일의 인연은 처음이 아니다. 김 감독의 데뷔작 ‘극락도 살인사건’(2007)에서도 박해일이 주연을 맡았다. 김 감독은 “둘 다 야구를 좋아해 종종 캐치볼하는 사이”라며 “박해일은 얼굴은 곱상하지만 한국 대표 액션배우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해일 씨 어깨가 넓고 좋아요. 같이 한강에서 공 던지고 놀다 ‘저 친구, 활도 잘 당기겠다’라는 느낌이 왔어요. 게다가 해일 씨는 무거운 칼을 드는 것보다 활을 드는 게 어울리지 않나요? 얼굴을 보면 꾀도 많을 것 같고, 선한 듯 어딘가 날카로운 게 저격자의 느낌도 나잖아요. 실제 촬영하다가 어떤 장면에서는 ‘아, 저 눈빛만으로 한 세 명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고의 캐스팅이었다고 자부해요.”

    “수난을 딛고 살아남은 한민족 생명력 더 다룰 겁니다”
    김 감독은 데뷔 4년 차다. 1995년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한 영화 배급·제작사에 취직했다. 대학 시절 경영학 공부보다 영화공부를 더 많이 한 그로선 몸이 근질근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 감독은 “‘충분히 선수로 뛸 수 있는데 왜 내가 심판을 하지’라는 고민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결국 그는 4년 만에 회사를 박차고 나와 동국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장편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 꼬박 8년이 걸렸다.

    “8년 동안 일곱 번 엎어졌어요. 정말 10년 가까이를 훌러덩 까먹었죠. ‘그만두더라도 장편 한 번 찍자. 투자 못 받으면 독립 장편이라도 찍겠다’는 마음으로 극본을 썼어요. 그게 ‘극락도 살인사건’이에요.”

    ‘극락도 살인사건’은 한 섬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다. 시종일관 어두컴컴한 분위기와 충격적인 반전으로 화제를 모았다. 김 감독은 이 데뷔작으로 2007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과 각본상,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선정 주목할 만한 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배우 엄태웅과 박용우가 열연한 차기작 ‘핸드폰’(2009) 역시 주목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충무로가 가장 주목하는 젊은 감독이 됐다. 오랜만에 기회를 잡은 만큼 욕심도 많다.

    “내년 이맘때도 영화 한 편 개봉해 인터뷰를 하면 좋겠어요. 속도를 더 내려고요. 지금 제 지성, 이성, 체력은 만점인 것 같아요. 어떤 의미에서 전성기죠. 이 시기를 아껴 정말 좋은 작품을 많이, 빨리 남기고 싶어요.”

    임진왜란·일제강점기 배경 3부작 완성할 것

    “수난을 딛고 살아남은 한민족 생명력 더 다룰 겁니다”
    최근 배우 한예슬 씨의 드라마 촬영 거부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김 감독은 말을 아끼면서도 “왜 요즘 개봉하는 영화는 대부분 남자 배우 단독 혹은 투톱 주연일까?”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좋은 재목을 배우로 키워가야 하는데, 요즘은 외모만 보고 발굴하는 시스템이라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한 제작 현장의 열악함에 대해서는 “영화, 드라마뿐 아니라 야외에서 하는 일은 원래 다 힘들지 않나요?”라고 반문했다.

    김 감독은 병자호란을 다룬 ‘최종병기 활’을 필두로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역사 3부작’을 완성할 계획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선조들이 수난을 가장 많이 겪은 세 사건”이라며 “이 세 사건을 겪은 우리 민족의 태도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고 전했다.

    “영화에 나오듯, 청나라에 끌려가는 백성 중 다수는 스스로의 힘으로 도망치고 적을 무찔렀어요. 일제강점기에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자살 폭탄테러를 한 사람은 없어요. 적의 우두머리를 저격했을 뿐이죠. 가장 처참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통해 우리 민족정신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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