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6

2011.07.18

“한류 매력에 홀딱…한국말 배워요”

문화상품 소비하다 한국 유학까지…지구촌 곳곳 한국학 연구 체계적 지원 필요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김보경 인턴기자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

    입력2011-07-18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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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류 매력에 홀딱…한국말 배워요”

    2007년 2월 13일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외국인전통문화체험’에 참가한 연세대 어학당 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케이팝 좋아해요.”

    7월 8일 즉석에서 이뤄진 인터뷰에 흔쾌히 응한 앨리슨 챈(21) 씨는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막 연수를 마쳤다. 작년 여름에 도착했으니 대략 1년 동안 한국어를 배운 셈이다. 영국 셰필드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챈 씨는 소속 대학 교환학생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작년에는 8명이었는데 올해는 17명이나 온다”며 한국어 전공 학생 수가 급격히 늘어난 이유로 조심스럽게 ‘한류(Hallyu)’를 꼽았다.

    챈 씨의 말처럼 영국 청소년 사이에서도 한류는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를 지구 반대편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덕이다. 이들은 단순히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류 콘텐츠를 계기로 자연스레 한국과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다.

    3월 이화여대에 교환학생으로 온 일본인 오카노 사쿠라코(21) 씨도 그런 경우다. 그는 동방신기를 좋아해 한국어에 관심을 갖다가 결국 현해탄을 건넜다. 요코하마에서 국제교류학을 전공하면서 배우기 시작한 한국어는 이제 한국사 강의를 들을 정도의 실력이 됐다. 비록 장문의 논문을 완벽히 이해하거나 시험답안을 한국어로 작성하는 일은 아직 어렵지만, 틈틈이 교양 한국어 수업을 들으며 실력을 쌓고 있다. 그는 “열도에도 한국 대중문화를 접한 뒤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늘었다”고 전했다.

    한국어 석·박사 학위 유학생 급증



    한국문학과 한국학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하는 유학생이 꾸준히 늘고 있다. 과거에는 단순히 교류 대학 소속 어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차원이었지만, 지금은 한국어 석·박사 학위 취득을 목표로 하는 학생이 크게 증가했다. 실제 중국에선 한국 관련 교수 임용의 최소 조건이 한국 현지 대학에서 받은 석사학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국 유학생은 대부분 국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 진학까지 염두에 둔 채 한국에 온다. 고려대 국어국문과 전공 수업에는 중국, 일본 등지에서 온 석사과정 학생이 적게는 서너 명, 많게는 대여섯 명씩 포함돼 있다. 그들은 대부분 능숙한 한국어로 교수와 질의응답을 주고받는다. 태국이나 몽골 등지에서 학부생으로 입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대학이 국제화를 외치며 적극적으로 외국인 학생 유치에 뛰어든 결과가 이제야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09학번 리첸(25) 씨는 외국인 학생에게 수여하는 특별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미디어학부 또는 공학 전공으로 입학한 중국인 동기도 3명이나 된다.

    리첸 씨는 학부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2004년부터 한국어를 배웠다. 중국에서 ‘조선어’라 부르는 한국어를 전공해 3년 만에 마치고, 한국어와 문학을 전공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런 그에게도 수업을 따라가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 그는 “아무래도 외국 학생은 시험을 볼 때 불리하다”면서도 “중국인이라 한자가 편하다. 고전 시가(詩歌) 수업이 가장 즐겁다”며 웃었다.

    한국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려고 한국어를 배우는 이도 늘었다. 제시카 고슬링(21) 씨와 저스티나 골로브(24) 씨는 영국 런던대 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출신이다. 2명 모두 유럽인으로 동아시아학을 공부하다가, 한국의 언어나 국제 관계에 관심이 생겨 본격적으로 한국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2009년 고려대 한국어문화센터에서 1년간 어학수업을 마친 고슬링 씨는 SOAS에서 한국학을 공부 중이다. 2년 반 정도 일본어를 배우다가 한국인 친구를 만나면서 한국과 한국어를 배우게 됐다. 교양으로 듣던 한국어 수업에 흥미를 느껴 고고학과 예술사학에 한국학까지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학 전공자에게 한국어 실력은 필수. 학문 자료가 영어로 번역된 경우가 많지 않고, 사료나 언론 자료를 참고할 때 수준급 이상의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특히 어려운 것은 일제강점기에 발행한 신문 기사를 읽는 일이다. 고슬링 씨는 “일본어 번역 문장을 이해하기 힘들어 한국 근현대사 자료를 찾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미국 미시건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영국 유학길에 오른 골로브 씨 역시 한국학 전공자다. 아시아의 국가보안, 정치경제학, 인권과 환경 문제가 집결한 한국의 매력에 이끌려 한국학을 선택했다. 그는 강의실에서 배운 자신의 한국어 실력이 충분치 않다고 느껴 한국에 왔다. 폴란드나 영국에서와 달리 한국인에게 둘러싸여 제대로 한국어를 배울 수 있어 만족스럽다. 현재 한국학 심화연구를 위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학 중이다.

    이렇듯 한국어 배우기가 하나의 유행으로 번지면서 대학 부설 어학원도 특수를 누린다. 서울시내 주요 사립대는 소속 어학당을 운영하면서 꾸준히 한국어 교재를 편찬한다. 국어학계에서는 한국어 교육을 주제로 교재 편찬과 언어별 교수법에 대한 비교언어학적 연구를 하고 있다.

    교재와 프로그램 천차만별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한국어 교육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방향 설정과 체계적 지원이 아쉽다. 중국의 경우 베이징대에서 한국어 교재를 집필해 대부분의 중국 대학 한국어학과에서 동일한 교재로 수업한다. 반면 한국은 대학별로 어학원 프로그램이 천차만별이다. 문법, 회화, 쓰기 등 주력 분야도 다르기 일쑤. 독일 파더본대를 졸업하고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 첫걸음을 시작한 모리츠 오트만(24) 씨는 “어학당 커리큘럼이 요구하는 문법, 독해, 작문 수준이 한국어 초보자에게 지나치게 높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어학당에서 사전에 약속한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지 않거나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학습자에게 영어나 기타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교사를 배정하는 일도 종종 있다. 오트만 씨는 “학습자의 언어 구사력에 맞는 교수법을 시도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이어간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는 외국 대학의 외국어 교수법과 대비된다. 오트만 씨가 속했던 대학의 독일어 강의는 학생 수준별로 반을 편성하되 초보자 반은 대부분 영어로 수업을 한다. 학생의 어학 수준이 아래 단계인 반에서는 영어로 독일어와 독일 문화를 소개하다가 실력이 향상될수록 교사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비중을 늘린다. 편지나 e메일 쓰기, 기차표 예매하기 등 실생활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표현부터 배운다. 그 결과 제2외국어 학습자가 비교적 단시간에 회화가 가능할 정도로 언어 구사력이 향상된다.

    그나마 중국이나 일본은 지리상 인접해 있고 교류도 빈번해 한국어 교사를 만나거나 교재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유럽 대륙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은 한국어 교사를 만나는 일도, 다양한 학습 교재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국립국제교육원에서 한국어능력시험(TOPIK)을, 한글학회에서 세계한국말인증시험(KLPT)을 주최하지만, 대학 도서관 외에 딱히 한국어 자료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골로브 씨는 “설령 어렵사리 한국어를 배웠다 해도 언어 사용 환경이 열악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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