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4

2011.07.04

美 망명 탈북자 부부 ‘비극의 드라마’

서원경 씨 美 적응 실패로 아내 살해 후 자살 ‘북한 붕괴’ 이후 고단한 삶과 후유증 대비 시급

  • 김형덕 한반도문제 평론가 www.cyworld.com/eagle0701

    입력2011-07-04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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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망명 탈북자 부부 ‘비극의 드라마’

    1 2006년 7월 미국 의회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탈북자들. 6·25전쟁 이후 최초로 미국에 난민 자격으로 망명한 이들이다. 2 2009년 여름 서원경 씨 가족과 함께한 필자. 왼쪽부터 부인 김연화 씨, 서씨, 필자, 서씨의 두 아들이다. 3 미국 뉴욕 주 로체스터에 있는 서원경 씨 가족의 임대주택.

    며칠 전 미국 뉴욕 주 로체스터에 사는 지인에게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e메일 말미에는 필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소식이 하나 담겨 있었다. 북한을 탈출해 2009년 미국에 정착했던 한 가족에게 벌어진 끔찍한 사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에 정착한 지 2년 남짓 만에 남편이 아내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자신은 밧줄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 소식에 남다른 아픔을 느꼈던 이유는 이들이 처음 로체스터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정착을 도왔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서원경 씨. 올해 53세다. 처음에는 식량을 구하러 중국에 왔다가 장기 체류하게 된 그는 기회를 틈타 20대 초반의 두 아들과 아내 김연화(47) 씨를 중국으로 밀입국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한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동남아 국가로 탈출해 현지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1년여 조사를 받는 동안 그는 한국과 미국대사관 관계자들에게 한국행을 권유받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서씨 가족은 2004년 미 의회가 ‘북한인권법’을 제정한 이래 100명 남짓을 헤아리던 북한 출신 미국 망명자 대열에 합류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다

    서씨 가족이 미국에 도착할 당시 필자는 로체스터 현지에서 연수를 하던 중이었다. 온 가족이 함께 미국에 오는 탈북자는 서씨 가족이 처음인 데다, 필자 또한 자유를 찾아 북한을 떠나온 그들이 자유사회에 온전히 정착해 원했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로체스터공항에서 처음 본, 장시간 비행으로 초췌한 가운데도 희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들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서씨 아내는 물론, 두 아들의 눈에서도 호기심과 꿈을 읽을 수 있었다.

    미국은 난민이 입국하면 정부가 아닌 지역 구호단체나 민간 기구에 안내를 위탁한다. 당시 서씨 가족을 위탁받은 단체는 북한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망명 온 난민의 초기 정착과 안내를 맡아온 ‘가톨릭패밀리센터’라는 종교단체였다. 이 단체가 로체스터의 한 한인교회에 서씨 가족에 대한 통역과 지원을 부탁했고, 한인교회의 목사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협력을 요청했다. 이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필자는 먼저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인교회 관계자들에게 그들을 소개했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정착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서씨 가족은 해당 교회에 다녔고, 필자도 그들의 집을 방문해 고민을 들어주곤 했다.

    그런데 서씨를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먼저 그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고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갈 필자와는 장기적인 관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서씨 가족이 생각한 미국 정착의 이상과 필자가 말하는 현지 생활 요령이 사뭇 달랐다는 점이다. 미국에만 오면 모든 것이 달라지리라 믿었던 서씨의 기대와 하루하루 삶을 영위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어찌할꼬

    언젠가 서씨는 자신과 아내, 아들들이 모두 일하면 금세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계획을 들려준 바 있다. 미국의 시간당 최저임금이 7.5달러이므로 네 사람이 하루 8시간 일하면 240달러를 벌 수 있고, 한 달에 20일만 일해도 월 4800달러의 수입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몸이 부서져라 일해 월 6000달러씩 한 해 7만 달러를 3~4년간 모아 두 아들을 번듯한 미국 대학에 보내겠노라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 눈에는 실현하기 매우 어려운 꿈이었다. 먼저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서씨 가족이 하루 8시간 일할 수 있는 정규직을 찾기란 근본적으로 어려웠다. 수입을 고스란히 저축한다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은 부연할 필요가 없을 터. 더욱이 미국 대학이 난민 청소년에게 입학 기회나 등록금 혜택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졸업을 위해서는 언어 능력은 물론 학업 능력도 충분해야 한다. 영어를 처음 접하다시피 한 서씨의 두 아들이 그 수준에 도달하려면 하루 종일 도서관에 파묻혀 지내도 모자랄 판이다. 부모가 수십 년 동안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 헌신한 뒤에야 2세대가 가까스로 주류사회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미국 교민 사회의 현실을 얘기해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두 아들에게는 대학교육보다 자동차 수리나 도장 같은 기술교육을 받게 하는 게 훨씬 안정적이라고 조언했다. 로체스터에서는 이러한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정부 차원에서 비용은 물론, 생활비도 일부 보장해주고 있었고,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이 쉽게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정 소득을 벌어들이는 한편, 학업을 따라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뒤에 다른 직종으로 전환을 시도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씨는 이러한 조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한인 사회에서 미국 문화를 간접적으로 익힌 뒤 장기적으로 미국 사회에 천천히 접근해나가는 것이 좋다는 권고도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그 대신 그는 한국 교민과의 접촉을 가급적 피하고, 미국인과 직접 상대하면서 일하는 게 영어 습득이나 빠른 정착에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처음부터 필자와 서씨는 현실 인식에서 큰 차이가 있었던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서 필자는 점점 서씨의 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관찰자로만 남게 됐다.

    애초에 기대했던 난민지원센터에서 알선해주는 일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그것도 하루에 5시간 미만밖에 할 수 없는 단기 직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서씨는 미국 생활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반면 부인 김씨와 두 아들은 교인이나 이웃과도 잘 어울렸고, 세탁소 등에서 일을 배우며 성실한 삶을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특히 일주일에 2~3일 생선 장사를 하면서도 난민지원단체에서 진행하는 영어 수업에 열심히 참석하는 두 아들이 대견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씨가 직업이 없는 동안에도 다른 가족은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하려고 노력했다는 차이가 가족 내 갈등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필자가 한국에 돌아온 후의 일이지만, 서씨 가족과 같은 교회에 다니던 지인의 말에 따르면 서씨는 이때쯤부터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잦았다. 일터에서 돌아온 아내와 아들들을 격려하는 대신 북한에서의 가부장 방식대로 군림하고 호통하는 습관도 버리지 못했다. 서씨가 간간이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도 이 무렵부터다. 처음에는 아내 김씨 역시 북한에서처럼 참고 지냈지만, 상황이 점점 달라졌다. 술에 취한 서씨가 아내를 폭행하려는 것을 아들들이 말리다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생겼다. 이로 인해 서씨는 아내와의 별거를 명령받기도 했고, 이혼한다는 부부를 교회 관계자들이 나서서 화해를 주선하기도 했다.

    북한에 있는 동안 서씨는 잘났든 못났든 유교식 가부장주의가 권위를 부여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으며, 그 소임을 어떤 방식으로든 수행했다. 그런 서씨로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어올 능력이 없는 가장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구성원의 동의와 인정을 받지 못하는 가장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그에게 미국 사회의 생존 환경은 너무 가혹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내 살해와 자살이라는 끔찍한 결말이었다.

    북한 붕괴와 급변사태 진짜 걱정

    서씨 가족을 지켜보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가장 큰 우려는 북한 주민이 대부분 서씨처럼 자유주의 사회에서 살기 위한 어떤 준비도 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서씨 사례는 미국이나 한국 같은 자본주의 사회와 처음 맞닥뜨리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탈북자가 겪는 갈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 온 탈북자 역시 온전히 남한 사회에 정착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다. 2010년까지 2만 명 이상의 탈북자가 남한에 왔지만, 그중 3000명 가까이가 다시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재탈출’했거나 이를 계획하고 있다. 여전히 절반 이상의 탈북자가 정부 생활보조금을 받고 있기도 하다. “만일 처벌이 없다면 북한으로 돌아가겠느냐”는 질문에 많은 탈북자가 “그렇다”고 응답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현실을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한국 사회가 곱씹어야 할 교훈이 적지 않다고 필자는 믿는다. 먼저 생각할 것은 북한의 급격한 붕괴가 한반도에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에 관한 것이다. 지금의 탈북자 문제가 북한 주민 전체 규모로 바뀌는 것이 바로 북한 붕괴고, 그렇게 되면 사정은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이다. 남한 경제력으로 과연 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면 결국 통일 문제는 점전적인 해결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어떤 사람은 북한이 붕괴해도 휴전선을 남겨둔 채 이원화된 사회로 운영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적 대안 같지는 않다. 북한 정권이 붕괴하고 주민 통제 능력을 상실하면, 과연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최고의 가치라고 말하는 남한 정부가 북한 주민의 자유 이주를 물리력을 동원해 막을 만한 명분이 있을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남북한 통합은 자유주의 시장경제 가치에 의한 통일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믿는다. 북한이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주민 의식 역시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우리의 기준을 들이대기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인내하고 기다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함께 진행해야 할 것은 꾸준한 교류와 협력을 통해 북한 주민이 자본주의를 ‘선행학습’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경쟁을 통한 생존, 능력에 비례한 욕구 조절 같은 전제를 북한 주민도 인정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돕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중요성이야말로 서씨 가족의 처참한 비극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美 망명 탈북자 부부 ‘비극의 드라마’
    * 1993년 북한을 탈출한 김형덕 씨는 이듬해 9월 남한에 입국했다. 2001년부터 탈북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회의원 비서관을 지냈고, 이후 대성그룹기획팀을 거쳐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 소장으로 일했다. 2008년 9월부터 2년간 미국에서 연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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