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9

2011.03.21

니가 김태희면 난 장동건이다, 흥!

우리 시대 유명인과 동명이인들 … 때로는 황당, 때로는 당황 “그래도 기분은 좋아”

  •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입력2011-03-21 1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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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가 김태희면 난 장동건이다, 흥!
    2010년 부산에서 여중생을 성폭행 후 살해한 김길태의 동명이인 14명이 법원의 허가로 새 이름을 얻었다. 이른바 ‘나영이 사건’으로 악명을 떨친 성폭행범 조두순의 동명이인 2명도 이름을 바꿨다. 2009년에는 연쇄살인범 강호순과 이름이 같은 19명이 개명했다.

    대법원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9년까지 73만277명이 이름을 바꿨다. 2000년 3만3210건에 불과했던 개명 신청이 2009년 17만4901건으로 9년 만에 5배 넘게 늘어났다. 이 중에는 ‘삼순이’처럼 이름이 촌스러워 신청한 사람도 있지만, 흉악범과 같은 이름인 경우도 있다. 유명세를 떨친 사람과 동명이인의 삶을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연예인, 정치인, 범죄자 등 우리 시대 유명인과 동명이인으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장면 1. “야, 나 김태희 봤어!”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여성에게 쏠렸다.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드라마 ‘아이리스’와 ‘마이 프린세스’ 속 여신의 모습. 그러나 거기 있던 이는 앳된 얼굴의 대학생 김태희(24) 씨다. 김씨의 친구가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던 것. 사람들의 표정이 일순 기대에서 실망으로 바뀌었다.

    장면 2.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정준호입니다.”



    회사원 정준호(49) 씨는 3년 전 제주도의 한 횟집에 자신의 이름으로 예약했다가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횟집 직원들이 자신을 보기 위해 가게 앞에서 기다렸던 것. ‘연예인이 온다’며 호들갑을 떨던 직원들은 정씨를 보자 민망한 눈짓을 주고받곤 뿔뿔이 흩어졌다.

    장면 3. “아… 그쪽이 저랑 통화하신 김희선 씨?”

    회사원 김희선(25) 씨는 2년 전 소개팅에서 불쾌한 경험을 했다. 소개팅할 남성과 전화통화를 할 때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이름 때문에 기대된다는 말을 몇 차례 해서 살짝 걱정은 됐지만. 아니나 다를까, 걱정은 현실이 됐다. 소개팅에서 만난 그의 표정은 ‘실망’ 그 자체였다.

    호명하면 그녀에게 쏠리는 눈

    “부모님이 작명소에서 받은 ‘김희선’과 ‘김태희’ 중 연예인 이름을 피하려 ‘김태희’를 택하셨다는데…. 지금은 김태희 씨가 데뷔하고 더 유명해져서 말이죠.”

    대학에 다니는 김태희 씨는 수업 시간에 출석 점검을 할 때마다 민망한 경험을 한다. 이름이 불리면 모든 이목이 그녀에게 쏠리면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스키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친구들이 이름을 불렀는데 리프트를 탄 사람이 전부 고개를 돌려서 김씨를 쳐다봤다. 김씨는 “자기소개 하면 대부분 ‘네가 김태희면 난 장동건이다’라고 놀린다”고 말했다.

    당대를 풍미한 미녀스타의 동명이인은 모두 괴롭다. 전지현(23) 씨도 사정이 비슷하다. 이름 자체는 흔하지만 같은 이름의 연예인이 미인의 전형이라 종종 애매한 상황과 맞닥뜨린다. 그는 “키도 작고 통통한 편이라 전지현 씨와 비교되는 게 너무 싫다. 미팅이나 소개팅에 나가면 어김없이 이름으로 놀림당했다”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연예인과 같은 이름에 만족하는 동명이인도 있다. 정육점을 운영하는 최민식(40) 씨는 “연기파에다 이미지가 좋은 배우와 이름이 같아서 좋다. 고기 팔면서도 이름을 얘기하면 아주머니들이 ‘연예인한테 고기 사간다’며 즐겁게 맞장구친다”라고 말했다.

    유력 정치인의 동명이인은 연예인 동명이인들과 겪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정치인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동명이인을 대하는 태도가 갈리기 때문. 판촉 사업을 하는 회사원 김영삼(39) 씨는 업무를 하면서 이름 덕을 보는 경우. 그는 “대통령과 이름이 같은 데다 어감이 재미있어서 ‘아이스 브레이킹’에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입사해서 자기소개를 했을 때 선배들이 ‘우리보다 한참 높은 분 납셨다’며 즐거워했어요. 판촉사업을 할 때도 이름이 특이해 사람들이 한 번만 말해도 잘 기억했고요. 회식 장소 빌릴 일도 많은데 식당 게시판에 제 이름이 있으면 웅성웅성했습니다.”

    고등학생 김대중(18) 군은 친구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잘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놀림당할 일이 없었다. 한데 고등학교 때 현대사를 배우면서 ‘DJ’라는 별명이 붙었다. 김 전 대통령 특유의 쉰 목소리 성대모사로 놀리는 친구도 늘어났다. 김군은 “어르신들에게 이름을 말하면 호불호가 갈리는 걸 느낀다. ‘평화의 사절이다’라는 분이 있는 반면 ‘젊은 놈이 왜 빨갱이 이름을 달았느냐’라는 반응도 있다”라고 전했다.

    대통령 집권 시절의 향수로 덕을 보는 이름도 있다. 주부 박정희(46)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애정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이따금 ‘선물’을 받는다. 박씨는 “한번은 과일을 사러 재래시장에 갔는데 물건 팔던 할머니께서 좋은 이름이라며 사과를 하나 얹어주셨다.나물을 사러 가도 한 움큼씩 더 주신다”라며 웃었다.

    반면 대체로 이미지가 좋지 않은 대통령과 비슷한 이름을 가지면 곤욕을 겪는다. 전두한(27) 씨는 인기 작가 강풀의 만화 ‘26년’이 연재되는 내내 고달팠다. ‘26년’은 5·18민주화운동 26년 뒤 전직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내용을 다룬 웹툰. 전씨는 “어릴 때는 ‘대머리’라고 놀림당하다 웹툰이 연재되는 동안에는 ‘나쁜 놈’ 소리를 들었다. 또 대부분 ‘전두환’으로 이름을 잘못 받아 적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범죄자와 같다” 사이버 테러

    니가 김태희면 난 장동건이다, 흥!

    2010년 2월 부산에서 여중생을 성폭행 살인한 김길태(왼쪽)와 노인, 여성 21명을 연쇄살인한 유영철.

    김길태, 강호순, 김수철, 신창원, 유영철, 정남규, 조두순…. 시대에 한 획을 그은 범죄자들의 동명이인은 울고 싶다. 범죄자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사이버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고등학생 김길태(18) 군은 2010년 2월을 떠올리면 지금도 울화가 치민다. 김군의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살인범 김길태’에 대한 욕설로 도배된 것. 사건 발생 당일에는 방문자 수가 8000여 명에 달했다. 그는 “욕설 방명록을 지우다 지쳐 한동안 미니홈피를 닫았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이상한 놈 때문에 놀림감이 돼 속상했다”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20명의 여성을 살해한 희대의 연쇄살인마 ‘유영철’. 그가 날뛰던 2003~2004년, 유영철(52) 씨는 진지하게 개명을 고민했다. 이름을 밝히면 어두워지는 사람들의 낯빛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는 “인터넷에서 개명 절차를 알아보기도 했다”라며 말을 이었다.

    “태어나기도 내가 유영철보다 먼저 태어났는데 이게 뭔가 싶었죠. 이제는 그냥 웃어요. 이 나이에 이름까지 바꿔야 하나 싶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름을 바꾸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요.”

    회사원 강두순(29) 씨는 동전의 양면 같은 이름으로 울고 웃은 경우. 그의 이름을 들으면 언뜻 떠오르는 사람이 없지만, 다시 들으면 연쇄살인범 ‘강호순’과 초등학생 성폭행범 ‘조두순’ 이름이 절묘하게 섞였다. 그는 “친구들이 ‘넌 세상에 전무후무한 흉악범이 될 거냐’며 놀리곤 했지만 좋은 점도 있다. 입사시험에서 면접관이 특이한 이름에 이력서를 자세히 봤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2005년 인기를 끈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촌스러운 이름이 콤플렉스인 삼순이는 이름을 ‘김희진’으로 바꾸려 고군분투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름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개명 신청은 한 줄기 빛이다. 대법원은 2005년 11월 “개명 신청자가 범죄를 숨기려는 의도 등이 없다면 개인 의사를 존중해 개명을 허가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한 법원 관계자는 “개명 당사자의 의지와 행복을 중시하는 풍조라 과거보다 이름 바꾸기가 쉬워졌다. ‘점쟁이가 이 이름으로 지어야 몸이 아픈 게 낫는다고 했다’는 사유를 쓰더라도 개명을 허가한다”라고 설명했다.

    케이블 채널 tvN에서 매주 금요일 방영하는 ‘막돼먹은 영애씨’라는 리얼다큐 드라마 주인공 이름은 ‘이영애’다. 그녀는 ‘산소 같은 여자’를 연상케 하는 이름과 달리 뚱뚱한 노처녀 회사원이다. 이름에서 오는 의외성을 노린 작명인 셈이다. 이처럼 이름은 단순한 ‘호명’의 수단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름으로부터 그의 정체성을 파악하려 애쓴다. 하지만 기억하자. 동시대 다른 누군가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울고 웃는 ‘유명인 동명이인’의 애환을. 세상에는 늘씬한 ‘전지현’뿐 아니라 짜리몽땅한 ‘전지현’도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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