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6

2011.02.28

저작권 대행업체 이상한 규정

  •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11-02-28 10: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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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는 시의 시대로 일컬어졌다. 장기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으로 자유로운 삶을 압박받던 사람들이 시에 위안받으면서 시가 폭발했다. 그러나 이념시나 민중시라는 불로 뜨거워진 대중의 몸을 식혀준 것은 서정시였다. 1987년에는 서정윤의 ‘홀로서기’와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 베스트셀러 1, 2위를 휩쓸 정도로 정점을 달렸다. 그즈음 이해인, 김초혜 등의 시들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크나큰 위안을 안겨줬다. 이후 시는 무명 시인들이 사랑과 이별을 어설프게 노래한 ‘대중시(낙서시)’에 밀리다가 인터넷이 등장하고 대학가에 ‘4행시’ 열풍이 불면서, 지금은 시집을 초판 1000부도 팔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시를 필요로 한다. 시는 교과서, 학습지, 단행본 등에 재수록되거나 방송, 공연 등에서 낭송되며 수익이 발생한다. 출판업자가 단행본에 시 한 편을 절반 이상 인용하면 계약기간 3년, 발행부수 2만 부 기준으로 5만2500원을, 한 연만 인용해도 3만1500원을 부담해야 한다. 학습참고서에 인용할 때는 이보다 초기 비용은 떨어지지만 1만 부 기준이라 전체 수익은 더 많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한때 잘나가던 유명 시인들조차 시집의 인세나 신작 고료보다 재수록에 따른 저작권 수익이 훨씬 많다. 소설이나 동화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저작권자와 사용업체가 너무 많다 보니 저작권자가 직접 관리하기 어렵다. 그래서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라는 저작권 대행업체가 등장했다. 작가나 시인이 협회에 저작권을 신탁하면 협회가 대신 관리해준다. 이 협회 약관에 따르면 “위탁자는 현재 소유하고 있는 저작권 및 장차 취득하는 저작권을 저작권신탁계약서에 규정(이하 ‘신탁저작권’이라 한다)한 바에 따라 수탁자에게 신탁하고, 수탁자는 위탁자를 위하여 이를 관리하고 이로 인하여 얻어진 저작물 사용료 등을 위탁자에게 분배한다”고 돼 있다.

    최근 글뿌리출판사가 ‘창작동화전집’(총 60권)을 묶어냈다. 한데 전집에는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판매 중인 작품 41권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안겨줬다. 글뿌리출판사는 2009년 11월 이 협회를 통해 저작권 계약을 맺고 2010년 10월에 출간했지만, 협회는 그 사실을 저자들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문제는 글뿌리출판사의 행태가 현재로서는 어이없게도 합법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전에 작품을 출판한 출판사들이 불법이며, 저작권자는 협회의 허락 없이 출판사와 신간 계약을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협회가 신탁 시기와 관계없이 과거, 현재, 미래의 저작재산권을 포괄적으로 신탁하도록 돼 있는 규정을 악용하면 앞으로도 이런 사태는 속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작권자가 자기 의지에 따라 부분 신탁을 할 수 있도록 하루빨리 협회의 약관이 개정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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