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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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요청 교통정리 곤혹스러워…경선 패배 반복은 없다”

박근혜 前 대표 비서실장 이학재 의원 “나를 정치인으로 키운 건 8할이 아버지”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11-02-21 09: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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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남 요청 교통정리 곤혹스러워…경선 패배 반복은 없다”
    질문을 하면 어김없이 탁자 위 깍지 낀 두 손의 검지가 아래위로 몇 차례 움직였다. 그러곤 넓은 이마만큼 시원시원한 답변이 이어졌다. 두 손의 검지는 머릿속 답변을 정리해주는 ‘엔터 키’였다.

    한나라당 이학재(47) 의원이 박근혜 전 대표 비서실장을 맡은 지 반년이 됐다. 지난해 8·8 개각 당시 비서실장이던 유정복 의원이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바통을 넘겨받았으니, 벌써 6개월이 흘렀다. 그도 “그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행은 차치하더라도, 박 전 대표와의 만남 자리 주선 부탁부터 각종 강연·인사말 요청까지 그를 바쁘게 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했다.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정중히 거절 말씀을 드려도 미안하더라고요. 그만큼 박 전 대표의 지지자가 많다고 생각하고, 한 번 더 이해를 구합니다. 제가 잘못하면 박 전 대표가 왜곡돼 비칠 수 있어 무척 조심스럽습니다.”

    그는 공식·비공식 자리를 위한 각종 자료는 박 전 대표가 직접 챙기는 편이라 비서실장으로서 일하기 편하다고 했다. 하지만 친이(친이명박)계 의원들과의 회동과 개헌 문제, 대선 캠프 조직 등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러고 보니, 1시간 반 인터뷰 도중 박 전 대표와 친이계 의원 관련 질문에는 ‘엔터 키’가 작동하지 않는 듯했다. 검지가 아래위로 한참을 움직여도 답변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괜한 오해를 사면 안 된다’는 일종의 자기최면은 그가 유력 대권주자의 비서실장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박 전 대표가 지난 대선 후보 경선에서의 패배를 반면교사 삼아 경선 캠프를 일찍 출범시킬 것’이라는 정치권의 예측에 대해 ‘두 번의 패배는 없다’라고 단언했다. 싱크탱크로 알려진 국가미래연구원과 달리 조직 구성 등 실질적인 역할을 할 캠프 설치에 대해선 “현재로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제가요?” 신인에서 전국적 인물로

    “만남 요청 교통정리 곤혹스러워…경선 패배 반복은 없다”
    “곁에서 보니 박 전 대표는 준비 잘된 대통령입니다. 한 번의 경선을 치르며 무엇이 부족했고 과했는지 사전 학습을 한 상태입니다. 그런 문제(경선 패배)는 다시 반복하지 않을 거예요.”

    이 의원은 민선 3기 최연소 구청장(인천 서구청장)에 당선돼 인천지역에서는 이름이 알려졌지만, 비서실장이 되기 전까지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정치 신인’이었다. 비서실장에 임명될 무렵 정치권과 기자들 사이에는 “이학재가 어떤 사람이냐”는 반응이 튀어나왔다.

    “지난해 유 장관 입각이 결정되고 며칠 후 박 전 대표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유 장관이 하신 일을 맡아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물으시더라고요. 평소 스타일대로 제 의견을 먼저 물으셨죠. 그때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요?’라고 말했을 정도니….”

    박 전 대표의 스케줄을 챙기고 청와대와 친이계의 창구 구실을 하는 비서실장을 정치 신인에게 요청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가 박 전 대표와 인연을 맺은 대선 후보 경선으로 흘렀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인천지역 당원협의회 위원장 12명 중 8명은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반면 인천지역 구청장 10명 중 8명은 박 전 대표를 밀었다. 당시 서구청장이었던 이 의원은 인천지역 군수구청장협의회 총무를 맡아 구청장‘8대 2’구도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를 포함해 2006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기초단체장들은 박 전 대표가 만든 상향식 공천제도 때문에 당선된 경우가 많았어요. 당원협의회 위원장과 구청장은 대의원 투표 등 경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경선 캠프에서 서로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경쟁이 치열했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행정가여서 객관적으로 후보자를 판단했죠. 그때 판단 잘한 거 같아요(웃음).”

    2년 뒤 구청장 자리를 내놓고 18대 국회의원(인천 서구강화갑을)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을 때 ‘그 판단’은 부메랑이 돼 날아들었다. 친이계 핵심 의원이 인천에 와서 ‘(친박계인) 이학재는 안 된다’며 공천을 반대했다. 그는 ‘무소속으로라도 출마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무소속이든, 한나라당 소속이든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가 나오자 당 공천심사위원회는 결국 그에게 공천을 줬다. 그는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 53.77%(4만5346표)의 득표율로 국회에 입성했다.

    “막상 ‘무소속 출마 배수진’을 쳤지만 공천을 받았기 때문에 당선되지 않았나 싶어요. 시골 지역에선 여전히 당을 보고 찍는 분이 많거든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도움을 주신 거 같아요.”

    ‘웬 아버지?’하고 기자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의 입에서 사부곡(思父曲)이 흘러나왔다.

    “만남 요청 교통정리 곤혹스러워…경선 패배 반복은 없다”
    “중학교 때까지 꿈이 이장이었습니다. 이북에서 혈혈단신 월남한 아버지는 마을(옛 김포군 검단면) 이장으로서 어려운 일을 도맡아 했어요. 물난리가 났을 때도 자신의 전답(田畓)을 돌보기보다는 마을 사람들을 먼저 도왔으니까요. ‘저도 아버지 같은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1995년 이립(而立)의 나이에 지방선거에 출마해 구의원이 됐고, 이후 두 번의 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지내기까지 그의 정치적 스승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항상 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도 거침없이 해내셨어요. 속이 불편한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베이킹) 소다를 한 스푼 입에 털어 넣고 일하셨죠. 힘들 때면 ‘아버지도 그렇게 멋있게 사셨는데 이 정도 시련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최면을 걸었죠.”

    2001년 중앙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그는 인천 부평고와 서울대 축산학과를 졸업했다) 이듬해 인천 서구청장에 출마해 43.9%(3만7216표)를 득표하면서 전국 최연소(37세) 구청장이 됐다.

    “구청장이 돼 보니 제가 없어도 시스템으로 돌아가더라고요. 그래서 오전 7시쯤 집을 나와 2시간 정도 구(區)의 곳곳을 걸어서 돌아다녔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마을에 어려운 게 없나’하고 일거리를 찾아 나선 거죠. 1년 구 예산이 2000억 원가량인데 경상비 빼면 100억 정도밖에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신규사업을 벌이기보다는 있는 자원을 잘 활용하자고 생각했죠.”

    “만남 요청 교통정리 곤혹스러워…경선 패배 반복은 없다”
    경찰을 자주 찾아가 좋은 관계를 맺고 이것저것 치안 서비스에 대해 묻고, 학교를 찾아서는 잘 가르쳐달라 부탁하고, 우체국 직원들에게는 민원인이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종의 ‘마을 이장식’ 접근이었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잖아요. 격려하고 칭찬하면서 분위기를 잡아나가는 거죠. 당연히 서비스를 받는 주민들의 생활만족도도 커지게 되죠.”

    그래서일까. 그는 4년 만에 19.2%포인트나 득표율을 끌어올렸다. 2006년 구청장 연임에 도전해 63.1%(7만1346표)를 획득, 인천지역 단체장 중 최다득표를 기록했다. 그를 ‘전국적 인물’로 만든 사람이 박 전 대표였다면, 정치인으로 키운 건 8할이 아버지였던 셈이다. 이 의원의 아버지는 이 의원이 중학교 2학년 때인 1978년 고혈압과 중풍으로 쓰러져 21년간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이 정도면 천운이죠. 37세에 구청장이 돼 10년간 큰 실패를 하지 않고 왔으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도우신 거죠.”

    어느새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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