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3

2011.01.31

커져라! 타이거 마스크 감동

일본열도 녹이는 ‘익명의 선행’ 확산…기부문화 정착 ‘터닝 포인트’ 되나

  • 도쿄=이종각 한일관계 전문 칼럼니스트

    입력2011-01-28 1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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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져라! 타이거 마스크 감동

    1960년대 후반 큰 인기를 끌었던 타이거 마스크. 정체를 숨긴 채 기부를 하던 만화 주인공처럼 최근 일본에서는 ‘익명의 선행’을 하는 이가 늘고 있다.

    일본에선 지난 연말 이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동양호시설 고아들에게 란드셀(등에 메는 통가죽 가방) 등을 보내는 기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타이거 마스크 현상’으로 불릴 정도다. ‘타이거 마스크’는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주간 소년 매거진’이란 만화책에 연재돼 인기를 끈 프로레슬링 만화의 주인공이다. 이후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크게 히트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인 다테 나오토(伊達直人)는 고아원(현재는 아동양호시설)에서 자란 후 악역 레슬러 양성조직에 스카우트된다. 그는 그곳에서 호랑이 복면을 쓴 레슬러, 즉 타이거 마스크가 된다. 그는 자신을 키워준 고아원이 경영난으로 존폐 위기에 빠지자 정체를 숨긴 채 기부를 시작한다. 그 돈은 그가 맞아서 벌어들인 파이트머니. 이 때문에 상납금을 내지 못해 조직으로부터 추궁을 당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도리어 고아원을 찾아가 선물을 나눠준다. 한마디로 그는 ‘의리의 사나이’로 묘사된다.

    이 만화는 수많은 고아를 양산했던 태평양전쟁 20여 년 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일본이 전쟁 후 가난으로부터 막 벗어나려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때 선풍적으로 인기를 끈 만화 캐릭터에 열광했던 소년들은 지금 일본을 움직이는 주축인 중년층이 돼 있다. 일본에는 현재 580여 개 아동양호시설에 3만여 명의 고아가 수용돼 있지만 만화가 나온 40여 년 전처럼 부모와의 사별이나 가난을 이유로 맡겨진 경우는 많이 줄고, 생활난과 부모에게 학대를 받아 버려진 경우가 반수 이상이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인해 경기가 나빠진 최근 몇 년 사이 고아가 급증했다.

    지난해 연말 란드셀 기증이 발단

    지난해 크리스마스, 군마(群馬)현 마에바시(前橋) 시 아동상담소 현관 앞에 란드셀 10개가 놓여 있었다. “어린이를 위해 써달라”는 쪽지와 함께였는데 발신인은 ‘伊達直人’이었다. 만화 속 타이거 마스크 주인공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 기부천사 타이거 마스크의 첫 출현이었다. 이 사실이 매스컴에 보도된 뒤 연말연시 연휴가 끝나자, 전국 각지의 아동시설에 란드셀과 문구류, 상품권, 현금 등을 기부하는 움직임이 줄을 이었다. 1월 말 현재 수백건을 넘어섰고, 기부 금액은 수천만 엔에 상당한다.



    란드셀은 대체적으로 한 시설에 3~10개가 보내졌는데, 가격은 1개에 3만~5만 엔이다. 동봉한 편지엔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주기 바란다” “늦었지만 나도 동참할 수 있어 다행이다” “타이거 마스크 운동의 취지에 공감한다. 전국의 다테 나오토 씨에게서 진심과 용기를 얻었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직접 아동시설을 방문해 전달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데, 그중엔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찾아온 사람도 있다. 가방 파는 가게에 연락해 ‘伊達直人’란 이름으로 배달을 부탁하거나,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현관에 란드셀 4개를 갖다 놓았으니 시설에 전달해주기 바란다”고 부탁한 경우도 있다.

    현금과 상품권은 초기엔 10만~20만 엔의 소액기부였다. 신문, 방송이 ‘타이거 마스크 현상 전국에 확산’ ‘복면의 선의’ ‘열도에 인정의 물결’ 등의 미담 기사로 앞다퉈 보도하자 일반인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기부가 급증했다. 정초에 받은 세뱃돈을 내놓는 초등학생도 있고, 현금 100만 엔, 200만 엔을 기부하는 사람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아동시설 우편함에서 “우리 아버지가 이곳에서 어릴 적 신세를 졌다. 내가 대신 조금이라도 그 은혜를 갚고 싶다”는 편지와 함께 시가 100만 엔이 넘는 금괴(300g)가 든 봉투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쌀, 감자 등 농산물이나 복권, 마스크를 보낸 사례도 있고 학원을 운영하는 각큐샤(學究社)는 500만 엔을 란드셀 구입비용으로 내는 등 기부 운동이 기업으로도 확산되는 중이다. 여성 기부자는 남성 이름인 ‘伊達直人’ 대신 여성 이름인 ‘다테 나오코(伊達直子)’로, 초등학생은 ‘소년 伊達直人’란 이름으로 보내고 있다. 기부자의 이름으론 다른 만화 히트작인 ‘가면 라이더’도 등장했다.

    “일시적 현상” 견해도 많아

    커져라! 타이거 마스크 감동

    지난해 크리스마스, 아동시설 란드셀 기증으로 시작된 타이거 마스크 운동. 이를 계기로 기부 문화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타이거 마스크 현상이 일어나자, 서점에 이 만화를 찾는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40여 년 전 이 만화를 출판했던 대형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는 수일 만에 1만3000부를 찍는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다. 한편 ‘다테 나오토(伊達直人)’와 이름이 같은 간 나오토(管直人) 총리는 이 운동과 관련한 기자의 질문에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운동이다. 공조의 정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기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이지만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는 잠재의식은 높다. 익명의 기부는 일본인 특유의 나서지 않으려는 문화의 표현이다”(가족사회학자), “가공의 영웅 이름을 빌린 일종의 놀이 같은 측면도 있지만, 일과성으로 그치기보다 기부를 사회적으로 정착해나가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사회심리학자)라고 분석했다.

    일본은 기부 문화가 별로 발달하지 않은 나라다. 최근 1년간 개인이 기부한 총액은 약 5455억 엔으로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0.12%에 지나지 않는다. 기부 대국인 미국(약 19조 엔, GDP의 1.6%)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영국(약 1조3000억 엔, GDP의 0.68%)과 비교해도 5분의 1 이하다. 일본 정부는 마침 비영리조직(NPO) 법인에 대한 기부를 촉진하는 시민공익세제 도입을 위한 세제 개정작업을 검토 중이다. 신문 사설 등은 이번 타이거 마스크 운동을 계기로 선의의 기부 문화가 제도적으로 정착해 확산될 수 있도록 세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타이거 마스크 운동이 새 학기를 앞두고 일어난 일시적 현상이라 보는 견해가 많다.

    일본은 1990년 버블경제 붕괴 이후 계속되는 불황으로 장기침체의 늪에 빠졌고, 그에 따라 사회 분위기도 가라앉아 있다. 지난해 연말 일본인 학자 2명의 노벨화학상 공동 수상을 제외하고는 최근 밝은 뉴스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던 차에 이 타이거 마스크 운동은 모처럼 일본인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인정가화(人情佳話)가 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독지가가 평생 모은 수백억 원의 재산을 대학 등에 기증하거나, 유명 연예인이 거액의 기부를 해 화제가 되기도 한다. 일반인이 동참할 수 있는 이 같은 소액기부 운동도 활성화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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