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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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4년 차에 개헌카드를 뽑았나

MB정권에서도 개헌 논의 급물살 … 이전 3번 성공은 국민적 지지 때문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김호경 인턴기자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입력2011-01-28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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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4년 차에 개헌카드를 뽑았나

    이재오 특임장관이 1월 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푸른한국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오늘날 시대정신은 청렴공정사회다. 시대정신에 따라 법이 바뀌어야 한다. 몸집은 커졌는데 20년 전 낡은 옷을 입은 형국이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300조가량의 사회갈등 비용이 발생하는 것도 정치갈등 때문이다.”

    1월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홀. (사)푸른한국이 주최한 ‘이제는 개헌이다. 청렴공정사회를 위한 권력분산’ 토론회에서 이재오 특임장관이 기조연설을 시작하자 곳곳에서 “옳소” 하는 추임새가 이어지더니, 결국 “이재오” 연호가 터져 나왔다. 세종홀 650석 자리는 토론회 시작 10분 전 이미 만석이 됐고,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수백 명의 청중은 통로와 행사장 뒤쪽에 서서 토론회를 지켜봤다. 토론회 열기만큼은 이미 개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고도 남았다.

    사그라지는 듯하던 개헌 논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개헌 전도사’ 이재오 특임장관과 친이(친이명박)계 의원 40여 명이 18일 비공개 긴급 심야회동을 갖고 ‘개헌 대오’를 꾸리더니, 23일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지도부가 만나 개헌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개헌 논의는 가속페달을 밟는 양상이다. 한나라당은 설 연휴 이후 의원총회를 통해 개헌 문제를 논의해나가겠다는 입장이다.

    왜 4년 차에 개헌카드를 뽑았나

    <b>1960.8</b> 4·19혁명 이후 내각제 개헌으로 등장한 장면 내각. <b>1987.6</b> 서울 명동성당에서의 민주화 시위 모습. 9차 개헌은 6월항쟁 이후 국민적 지지 속에 이뤄진 개헌이었다.

    이전 정권과 닮은꼴 행보

    개헌 불씨가 활활 타오를지, 폐기 절차를 밟을지 현재로선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24년간 이어져온 개헌 논의를 분석해보면 그 의도와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다. 분석 결과 흥미로운 점은 현재의 여권발(發) 개헌 논의가 1987년 9차 개헌 이후 각 정권 때마다 불거져 나온 개헌 논의와 궤를 같이한다는 것. 그러나 개헌 절차와 방법에서는 전 정권의 개헌 실패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듯, 다분히 전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정치선진화를 추진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개헌도 국회에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개헌을 언급했다. 앞서 6·2 지방선거와 7월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경선 과정에서도 개헌론이 피어났고, 올해 들어서는 친이계 의원이 집단 회동을 갖는 등 ‘액션’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23일 청와대 안가(안전가옥)에서 이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가 만나 개헌 방향과 내용, 주체와 시기에 대한 일종의 ‘4대 가이드라인’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개헌 논의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집권 3년 차에 시작해 4년 차에서 급진전하는 ‘개헌 논의 사이클’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노태우 정부에서 내각제 개헌 합의를 토대로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을 한 시기도 1990년 1월. 집권 3년 차였다. 김영삼(YS) 정부 시절 김종필(JP) 대표위원이 민주자유당을 탈당, 내각제 개헌을 목표로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한 시점도 집권 3년 차인 1995년 2월.

    김대중(DJ) 정부 역시 집권 3년 차인 2000년 6월, 이한동 총리서리가 ‘대통령 중임제 개헌’을 제기해 개헌 논의에 불을 지폈다. 2005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6석을 잃고 원내 과반수가 붕괴(열린우리당 146석)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 주도의 대연정 구성을 제안했다. 야당은 “개헌 없이는 대연정이 불가능하다”며 맞받으면서 개헌 화두가 고개를 들었다.

    집권 4년 차에서는 개헌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다. 현재의 양상도 4년 전, 8년 전 신문을 뒤져보면 ‘오십보백보’임을 알 수 있다.

    왜 4년 차에 개헌카드를 뽑았나

    <b>1990.1</b>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왼쪽),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고 있다. <b>2007.3</b>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강력 차기주자 반대하면 ‘없던 일’

    1991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이 “국민 다수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내각제 개헌을 할 수도 없고 추진해서도 안 된다”고 발표하기 전까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는 여당과 대통령제를 지지하는 야당 간의 논쟁은 치열했다. 여당에서도 내각제에 소극적인 민주계와 민정·공화계 간에 논쟁을 계속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집권 3년 차인 2000년 6월 이후 대통령 중임제를 두고 활발한 논의를 전개했다.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 입장을 고수했고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지금은 개헌을 논의할 시기가 아니다’라는 입장이었다. 한나라당은 개헌론을 ‘한나라당 와해공작’이라며 경계했지만 김덕룡, 박근혜 의원은 ‘4년 중임제와 정·부통령제 개헌’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활발한 개헌 논쟁은 차기 대선후보가 모습을 드러낼 즈음 급속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김영삼 대표가 민자당 대선주자로 확정된 1992년 5월 이후, 1997년 7월 DJP(김대중·김종필) 후보단일화 협상이 시작될 때도 그랬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헌 사이클’은 왜 비슷할까. 경윤호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객원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정권마다 개헌 논의와 종결에 대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사이클을 보일 수밖에 없다. 집권 3, 4년 차는 차기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 해인 만큼 정국 주도권과 선거와 연결하려는 정략적 판단에서 개헌을 활용한 측면이 강하다. 개헌은 예비 대선주자들끼리 이합집산을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 셈이다.”

    현재의 개헌 논의를 둘러싸고도 “개헌 이슈로 친이(친이명박)계의 결속을 다지고, 국정 주도권을 틀어쥐려 한다”는 정치권 일각의 분석이 있다. 한편으론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은 ‘박근혜 전 대표 견제용’이라는 의구심을 내비치고 있다.

    개헌 논의가 후끈 달아오르더라도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가 반대하면 개헌은 ‘없던 일’이 됐다. 2007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의 4년 연임제 개헌 제안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참 나쁜 대통령”이란 말 한마디에 ‘없던 일’이 됐고, 1999년 DJP가 연내 완료하기로 한 내각제 개헌을 유보한 주요 이유 역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반대가 컸다. 1990년의 개헌 무산은 민자당 차기 대선주자였던 YS의 입장이 달라진 탓이다.

    정치권에서 ‘개헌은 어렵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박근혜 전 대표와 김문수 경기지사, 민주당 손학규 대표 등 차기 대선주자들이 개헌에 부정적이라는 이유가 크다. 한 친박계 중진 의원의 설명이다.

    “이재오 장관이 처음에는 권력구조 분권형 개편을 주장하다가 친박계의 반발을 사자 ‘개헌 논의에 걸림돌이 된다면 백지로 돌아갈 용의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요즘 그쪽(친이계)에선 권력분점이니 권력구조 개편이니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강력한 대선주자가 반대하면 개헌이 어렵다는 것을 이제야 안 것 같다.”

    그래서일까. 24일 열린 토론회에서도 이 장관은 대통령 권력분산이라는 말 대신 ‘시대정신’ ‘청렴공정사회’를 위한 개헌임을 강조했다.

    왜 4년 차에 개헌카드를 뽑았나

    1월 20일 열린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홍준표 최고위원(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개헌 추진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자 안상수 대표(가운데)가 “개헌 논의는 국민적 약속”이라며 반박했다.

    대통령이 나서면 필패(必敗)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1987년 이후 개헌 논의는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한 정치세력, 혹은 대선후보가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1995년 창당 이래 일관되게 ‘내각제 개헌’을 고수한 김종필 대표 체제의 자민련도 그랬고, 14대 대선에서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와 17대 대선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역시 대선에 임박해 개헌 카드를 꺼냈다. ‘개헌 반대’ 입장을 보였던 정몽준 후보는 16대 대선이 임박한 2002년 11월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개헌을 매개로 한 정치연합은 대선 승리를 안겨줬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개헌 약속은 이행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승자독식을 하는 현행 대통령제에서 정치적 연합을 위한 개헌 합의는 지켜지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당선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당선되지 않더라도 권력을 일부 가질 수 있는 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가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막상 당선돼 권력의 단맛을 보게 되면 권력을 절대 나눠줄 수 없다는 것. 역설적으로 대통령의 권력을 줄이고자 하는 개헌 논의를 임기 내에 추진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나서 개헌을 주도해도 필패(必敗)였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는 6차례에 걸쳐 대통령이 주도해 개헌을 이뤘지만 노태우,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추진은 실패로 끝났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개헌은 당에서 주도하되,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한 발언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어쨌든 한국 현대사 속의 개헌 논의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정치권이 개헌을 당리당략과 정계개편을 위해 활용했기 때문이다. 반면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4·19혁명 직후 2차례 개헌과 1987년 개헌은 성공했다. 명분과 절차야 어떻든 정치권이 개헌의 성공을 바란다면 우선 뭘 해야 하는지도 자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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