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2

2011.01.24

포스트 정몽준 선수 출신? 기업인?

鄭 회장 사실상 퇴장 축구 수장 ‘인물난’…이회택·김주성,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등 거론

  • 신진우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niceshin@donga.com

    입력2011-01-24 1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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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 정몽준 선수 출신? 기업인?
    1993년 1월, 대한축구협회의 분위기는 추운 날씨만큼 싸늘했다. 그가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였다. 전임 회장이었던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축구 발전에 뜻이 없다”는 비난 여론에 떠밀려 사퇴한 상황. 태극전사들은 실력으로 이미 아시아를 주름잡았지만 국내 축구 행정 수준은 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웃 나라 일본만 해도 월드컵 조 추첨식 등 굵직한 행사에서 귀빈 대접을 받았지만 한국 인사들은 자리 배정조차 받기 힘들었다. 그만큼 국제무대에서 한국축구는 찬밥 신세였다.

    이때 그가 등장했다. 대한축구협회장 취임 당시 한 신문은 “기대 반, 걱정 반, 잘할 수 있을까”란 타이틀을 지면에 실었다. 프로축구 현대를 이끌 만큼 축구에 애정은 있어 보였지만 그 애정이 투자와 관심으로 이어질지 우려 섞인 시선이었다. 그 뒤 18년. 그의 이름은 한국축구와 늘 함께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한국축구사에 길고 굵은 한 획을 그었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60) 얘기다.

    FIFA 부회장 실패 엄청난 충격

    1월 6일 카타르 도하의 쉐라톤 호텔. 아시아축구연맹(AFC) 총회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선거 직후 정 명예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평소 언론에 우호적인 그였지만 이날만큼은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입을 꾹 닫은 채 현장을 빠져나갔다. 이날 5선에 도전했던 그는 요르단 왕족인 알리 빈 알 후세인 요르단축구협회장(36)에 밀려 낙선했다. 1994년 FIFA 부회장 당선 이후 16년 동안 지속된 재임 기간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인맥을 총동원해 선거에서 승리를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중동 국가들의 담합 등 이해관계에 밀렸다. 충격적인 결과를 손에 쥔 그의 얼굴엔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정 명예회장은 1월 1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성원에 감사합니다. 정치에 헌신하겠습니다’란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이 글에서 “축구 일선에 나서지 않겠다. 축구는 좋아서 했지만 정치는 헌신해야 할 분야다. 앞으론 우리나라 정치 발전을 위해 일하겠다”고 밝혔다. 1993년부터 이어진 ‘정몽준 축구시대’가 저문 것이다.



    정 명예회장이 2009년 대한축구협회장에서 물러날 당시엔 아무도 그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실제 정몽준에서 그의 최측근인 조중연(65)으로 대한축구협회장 명함만 바뀌었을 뿐 축구판에서 정 명예회장의 영향력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정 명예회장의 한 측근은 “지난해 12월 FIFA 집행위원회에서 2022년 월드컵 유치에 실패한 데 이어 될 것으로 믿었던 이번 부회장 선거까지 떨어져 충격이 컸다”고 했다. 축구협회 관계자는 “회장님이 ‘한국축구를 위해 소명을 다했다’는 얘기를 하셨다”면서 “이젠 한 마리 토끼(정치)라도 확실히 잡아야 할 때란 판단을 하신 것”이라고 전했다.

    물론 아직 변수는 있다. 6월 FIFA 회장 선거에 출마하거나 4년 뒤 부회장 선거를 통해 부활을 꿈꿀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나 최근 그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현실적으로 힘들어 보인다. 이제 시선은 ‘포스트 정몽준 시대’로 돌아간다. 정 명예회장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우느냐가 한국축구의 최대 현안이자 고민거리로 떠올랐단 얘기다.

    현실적으로 당장 그의 공백을 채우기는 힘들어 보인다. 정 명예회장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이끌어냈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도 그의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매년 500억 원 이상 축구에 투자하고, 프로·아마추어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 지원을 한 것도 그였다. 더불어 국제 축구계에서 한국의 위상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그는 FIFA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축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지나치게 독단적이다’ 등 일부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지난 18년 한국축구를 ‘정몽준 시대’라 부르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국제 스포츠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던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 2005년 금품 로비 사건으로 퇴진한 뒤에도 한국 스포츠 외교가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걸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체력이 생긴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또 “사람 하나만 바라보는 축구 행정은 한계가 있다. 정몽준의 퇴장은 언젠가 닥칠 상황이었고 그걸 극복하는 것도 시대적인 소명”이라고 덧붙였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힘을 모아 ‘포스트 정몽준’을 찾는다면 ‘위기 속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포스트 정몽준’ 후보에 대해 축구 관계자들은 “우리도 이제 선수 출신 행정가를 길러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세계 축구계 파워 랭킹 10위 안에 드는 미셸 플라티니 FIFA 부회장이나 프란츠 베켄바워 FIFA 집행위원이 대표적인 롤 모델. 한준희 KBS해설위원은 “스타 선수 출신은 인지도가 높고 축구를 잘 알고 애정도 넘친다”면서 “축구에 ‘올인(다걸기)’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도 충분하다”고 예찬론을 펼쳤다.

    전직 관료·경영인 거론도

    포스트 정몽준 선수 출신? 기업인?

    정몽준 전 FIFA 부회장이 5선에 실패하면서 스포츠 외교를 이끌어갈 축구 행정가 발굴이 시급한 과제로 부상했다. ‘포스트 정몽준’으로 주목받는 이회택 부회장과 김주성 국장(왼쪽부터).

    현재 국내 선수 출신 행정가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김주성(45) 대한축구협회 국제국장. AFC 경기위원회에도 소속된 그는 일찌감치 축구 행정가로 나서 나름 입지를 굳혔다는 평가다. 반면 경험, 인지도 등에서 ‘포스트 정몽준’이 되기엔 부족하다는 말도 나온다. 금전적인 한계도 문제.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해외 유명 선수 출신과 달리 국내 선수 출신 행정가에게 가장 큰 장벽은 바로 재력”이라며 “종잣돈이 부족하단 얘기는 그만큼 운신의 폭이 좁다는 얘기”라고 전했다. 그 밖에 차범근(58) 전 수원 감독, 허정무(56)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등 선수 출신 거물급 인사들이 거론되지만 행정 경험이 전혀 없고, 부족한 외교력이나 재력 등이 걸림돌로 지적된다.

    선수 출신으로 오랜 기간 축구계에 몸담은 인사들도 있다. 대한축구협회 조중연 회장과 이회택(65) 부회장이 대표적인 인물. 문제는 국제적인 마인드다. 프로축구연맹 관계자는 “이들 모두 경험 많고 축구 행정가로도 성공한 분이지만 국내용이란 꼬리표를 떼기 힘들다”고 잘라 말했다. 정 명예회장처럼 정치, 경제 등 다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 가운데 ‘포스트 정몽준’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중 최근 가장 이름이 많이 거론되는 인물은 정의선(41) 현대자동차 부회장. 정 부회장은 정 명예회장 못지않게 축구에 애정이 많은 걸로 알려져 있다. 또 정 명예회장이 퇴진해 ‘현대가 축구판을 좌지우지한다’는 부담 없이 운신의 폭을 넓힐 여유까지 생겼다. 나이가 젊은 데다 현대자동차가 FIFA 공식후원사로 참여하는 등 축구와 밀착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매력. 정 부회장은 현재 공석인 프로축구연맹 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박문성 SBS해설위원은 “정 부회장이 연맹 회장, 축구협회 회장 등을 거치며 축구 행정 경험만 쌓는다면 축구계와 정 부회장 모두 ‘윈윈’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전망했다.

    전직 유명 관료나 경영인 가운데 축구 전문 행정가를 키워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최순호 강원 FC 감독은 “현직 유명 인사가 단지 직함만 축구계에 걸어놓는 수준이라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발전 가능성이 없다”며 “차라리 능력이 검증된 전직 전문 경영인을 뽑아 그를 축구 행정가로 만드는 게 ‘포스트 정몽준’을 키우는 최선의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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