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2

2011.01.24

伊, 교수직 족벌 세습 해도 너무해!

대학 총장 아버지에 아들·며느리 교수 다반사…‘백’ 없는 우수한 인재들 해외로 밀려나

  • 로마=김경해 통신원 kyunghaekim@tiscali.it

    입력2011-01-24 1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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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伊, 교수직 족벌 세습 해도 너무해!

    (왼쪽) 이탈리아 대학생들이 2010년 11월 30일 로마 시내에서 대학교육 개혁안의 의회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시위를 벌였다. (오른쪽) 로마 라 사피엔자 국립대학 학생들.



    2010년 9월 13일 이탈리아 시실리 팔레르모 국립대학 건물 옥상에서 철학과 박사과정 노르만 자르코네(Norman Zarcone·27)가 투신자살했다. 그는 대학에 남아 장래 교수가 될 꿈을 꾸었지만 담당 교수의 솔직한 충고를 듣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을 결심했다. 담당 교수가 “넌 잘나가는 든든한 친인척이 없어 교수가 되기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 그의 죽음은 혈연, 지연, 학연에 얽매이고 부패할 대로 부패한 이탈리아 대학의 교수 임용 관행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12월 23일 대학교육 개혁안 국회 투표를 앞두고 이탈리아인들을 분노하게 한 사건이 또 터졌다. 개혁안 투표를 앞두고 일부 대학 교수진의 가족들이 ‘초스피드’ 승진을 했기 때문이다. 로마 라 사피엔자 국립대학의 루이지 프라티(Luigi Frati) 총장은 아들 자코모(Giacomo)를 정교수로 승진시켰다. 프라티 총장은 대학 개혁안이 통과되면 같은 대학에 학부 내 직계가족은 물론 사촌까지 교수로 임용하는 일이 전면 금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의 승진을 서둘렀다. 대학교육 개혁안을 두고 찬반 논쟁이 치열했고 과격 시위까지 벌어졌지만 직계가족 임용 금지안만은 대부분이 반긴 사안이었다.

    대를 이어 막강 권한 ‘바로네’ 천국

    의대 학장을 거쳐 총장 자리에 오른 프라티 총장 가족은 부인, 딸, 아들이 모두 의대 교수로 막강 파워를 자랑한다. 자코모는 36세의 나이에 조교수에서 정교수로 승진했다. 그는 11월 19일 정교수 특별시험에서 25명의 응시자 중 최고점을 얻었다. 나머지 응시자는 모두 그보다 경력이 뛰어난 연장자였다. 정교수 등록 행정절차를 국회 투표 전까지 끝낼 수 있도록 조정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프리티 총장은 이에 “내 아들이 똑똑해서 어쩔 수 없다”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탈리아 학계는 50대 나이에도 정교수가 되기 힘든 상황에서 36세로 정교수 자리에 오르기는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것으로 유명하다. 프라티 총장의 전횡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코모의 부인 루치아나 리타 안젤레티는 남편이 학장으로 있던 로마(라 사피엔자) 의대에서 의학사 교수가 되기 전까지 고등학교 교사였다. 게다가 법대 출신인 딸 파올라는 이 대학 법의학 정교수로 재직 중이다.

    토르 베르가타 로마 제2대학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프라티 총장처럼 의대 학장 출신인 레나토 라우로(Renato Lauro) 총장의 며느리 파올라 로리아니가 대학 개혁안 통과 직전 가장 먼저 승진했고, 아들 다비데 역시 아버지가 학장으로 지냈던 의대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프라티 총장처럼 대를 이어 대학 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교수를 ‘바로네(barone)’라고 비꼬아 부른다. 바로네는 ‘남작’이란 뜻이다. ‘보스’ 교수인 남작의 후광을 받으려고 비위를 맞추는 교수들도 풍자의 대상이다. 이탈리아 문화교육부 장관 마리아 스텔라 젤미니(Maria Stella Gelmini)는 대학 내 ‘안티바로네’ 제도 도입을 취임 초부터 적극 주장했다.

    한 전직 로마 대학 강사는 “선배 교수로부터 보스에 무조건 복종하는 갱스터의 마음가짐 없이는 교수직에 비집고 들어갈 자리조차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한마디에 대학 강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며 씁쓸해했다. 게다가 공식적인 교수 임용시험을 치러도 일등 합격자가 미리 정해진 경우가 다반사다. 지원자가 외국 학계 논문 발표 등 화려한 경력을 제출해도 결국은 시험관이 이를 평가하기 때문에 사전에 정해둔 사람이 합격할 수밖에 없다. 전형 자체를 그들에게 유리하게 왜곡하기 때문이다. 바로네 교수의 후광을 받은 사람을 합격시키기 위한 억지 시험이 치러지는 셈. 이런 관행은 인문계 학과일수록 심하고 순수 이공계 쪽은 덜하다.

    노르만 자르코네의 죽음 몇 달 전. 잔마르코 다니엘리(Gianmarco Danieli)의 용감한 졸업 논문이 화제가 됐다. 그가 친척 등용, 족벌 교수진의 온상으로 악명 높은 바리 국립대학에 제출한 논문 제목은 ‘이탈리아 국립대학 수준과 교수진 내 동명 성(姓)’이다. 이 논문은 몇몇 바로네 교수 가문이 대학을 장악한 이탈리아 현실을 파헤쳤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학과마다 같은 성씨를 가진 교수들이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성이 달라도 결코 남남이란 보장은 없다. 며느리, 사위, 부인, 처조카도 모자라 내연 관계까지 있다.

    전문직 직업마저 세속 급증

    다니엘리는 이 논문을 발표한 뒤 이탈리아에 발붙일 곳을 못 찾아 외국으로 떠났다. 든든한 혈연 ‘백’이 없으면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도 외국으로 떠나야 하는 비정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탈리아 언론이 “매년 수천 명의 영재가 해외로 떠나고 있다. 비상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보도를 내지만 꽁꽁 문을 닫은 대학은 핏줄이란 열쇠 없이는 열리지 않는다. 이탈리아는 무상으로 대학까지 교육시킨 영재가 외국 대학, 연구소 등으로 떠나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유명 외국 대학에서 수년간 연구하다 모국 강단에 서려고 결심한 교수들도 학계 네트워크가 없어 귀국을 포기하기도 한다. 정년을 70세까지 연장하려는 노장 바로네 교수들의 욕심도 교수진 세대교체의 장애물이다.

    두뇌 해외유출은 의사, 변호사, 건축가 등 전문직 세습 전통도 책임이 크다. 12월 13일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의 보도에 따르면 세습은 대학 학과 선택부터 시작된다. 아들이 아버지의 전공 학과를 선택하는 비율은 건축학 43,9%, 법대 42%, 화학·약학과 40.8%, 공대 39,2%, 의대 38.6%, 경제학 28.1%, 정치학과 23,6%, 이공계 학과 14,5%, 외국어학과 13,9%다. 아버지와 같은 전공을 공부한 뒤 같은 직업을 택하면 아버지의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다. 좋게 보면 가업 계승이지만, 집안 배경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회적 신분 상승을 가로막는 벽이다. 사회학자들은 “세습은 특정 지역에서 확보한 고객을 이권으로 삼던 중세 방식이다. 이탈리아가 사회 유동성이 없는 경직된 사회가 됐다”고 지적했다. 고향을 잘 떠나지 않는 이탈리아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견주어보면 해외 인재 유출은 심각한 상태다.

    이탈리아에서 현재 대학교육 개혁안이 법적 효력을 발휘하면서 친인척 족벌 교수 문화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탈리아 문화교육부도 대학에 능력 평가를 최우선하는 제도를 구축하려고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네 교수들의 케케묵은 사고방식은 쉽사리 변화하지 않으리라는 게 시민 대부분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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